"난 널 설득시킬 테니까 넌 날 설득시켜봐!"

산 너머 산, 그래도 대화로 풀고 싶습니다

등록 2010.09.19 13:39수정 2010.09.1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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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산책을 다녀와 집에서 쉬고 있는데 학부형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명희(가명) 엄마였습니다. 뭔가 아쉬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 인사말부터 풀이 죽어 있는 목소리였습니다.

"저 죄송한데요. 명희 수학여행을 못 보낼 것 같습니다."
"아니, 왜요?"
"집안 사정이 좀 어려워서요. 저도 웬만하면 보내주고 싶은데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예. 말씀하세요."
"돈이 통장에서 빠져나갔네요. 급한 데 써야할 돈인데. 추석명절도 보내야하고…."

그날 학부형과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 그런데 길게 하소연을 늘어놓은 것은 명희 엄마가 아니라 바로 저였습니다.

"명희 말고도 못가겠다는 아이들이 많네요. 명희처럼 형편이 어려워서 못 가는 아이들도 있고 몸이 아프거나 멀미가 심해서 못 가겠다는 아이들도 많고요. 수학여행을 못가는 아이들이 많으면 그만큼 수학여행비 단가가 올라가기 때문에 학교로서도 곤란한가 봐요. 다른 반은 별 문제 없이 잘 되는데 저희 반만 그래서 눈치가 보이기도 해요. 명희야 사정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만  저도 많이 힘드네요."

그 다음 날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명희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제는 죄송했어요. 어머니께서 어렵게 전화를 주셨는데 저도 좀 힘들다보니까 제 입장만 생각하고 말을 그렇게 했네요. 사과드립니다. 그런데 오늘 행정실에 가서 알아보니까 돈이 한 번 빠지면 곧 바로 뺄 수는 없나 봐요. 개인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이 아니어서 과정이 좀 복잡하다네요. 교장 선생님 결재도 있어야하고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다는데 어떡하죠? 추석명절 보낼 돈이라고 하셨는데…."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지요 뭐. 선생님께서 약속만 해주시면 추석명절 보낼 돈은 어디서 빌려봐야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찾아뵙지도 못하고."


"죄송하긴요. 제가 더 죄송하죠. 그런데 명희가 너무 예뻐요. 중학교 때 습관이 조금 남아 있긴 해도 이상하게 저한테는 참 잘하네요."

"선생님이 그만큼 잘 해주시니까 그렇죠.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지도 않아요. 애들 잘 해준다고 다 달라지는 건 아니거든요. 아직은 철이 덜 들어서 그렇겠지만 잘못을 해놓고도 잘못을 지적해주면 오히려 짜증내고 그러는 아이들도 많거든요. 그런데 우리 명희는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수업시간에 애들이 너무 떠들면 명희가 애들을 나무래요.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운지 몰라요."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쉬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어서 화장실을 다녀와서 보니 그 사이 갖다놓았는지 책상 위에 수학여행비 미납자 명단이 놓여 있었습니다.  마침 다음 시간이 학급 적응활동 시간이어서 미납자 명단이 적힌 종이를 들고 교실에 들어갔습니다.

"솔직히 말할게요. 우리 반에서 3명 이상 수학여행을 가지 않게 되면 선생님이 좀 곤란해져요. 그런데 지금 안 가겠다는 학생들이 8명이 넘어요. 수학여행비 미납자는 그보다 훨씬 많고요. 수학여행은 정규적인 교육과정이어서 모두 참석해야 되요. 하지만 선생님이 생각해도 정말 가기 힘든 친구들이 있어요. 그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갔으면 좋겠어요."

사실은 조금 강하게 밀어붙이려고 했던 것인데 하필이면 명희와 눈이 딱 마주치는 바람에  금세 마음이 물렁해져서는 그렇게 말을 던지고 만 것입니다.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반장 아이가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이 3명까지는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니까 애들이 그 속에 끼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무조건 다 가는 걸로 해요. 그래야 선생님이 편해요."

반장의 개입이 눈물겹도록 고마웠습니다. 제가 딱해 보였는지 몇몇 아이들도 반장의 말에 동조하여 한 마디씩 거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운데 선생님은 또 여러분들 중에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수학여행을 못 가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잖아요. 선생님은 힘이 조금 들어도 끝까지 대화로 풀고 싶어요. 물론 이런 식으로 하다보면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요. 선생님 도와 줄 거죠?"

그렇게 말하고는 아이들의 표정을 살피는데 한 아이가 저를 빤히 바라보며 손을 들어보였습니다. 평소 얌전하고 너무 착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그 아이는 돌연 폭탄선언으로 제 가슴을 철렁하게 했습니다.

"선생님, 저 수학여행 못가요."
"뭐? 왜 못 가는데?"
"오빠가 군대 가요."
"오빠 군대 가는 것 하고 너 수학여행 가는 것하고 무슨 상관인데?"
"수학여행 가는 날 오빠 군대 가는데 가족들이 강원도까지 함께 가기로 했어요."

산 너머 산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저도 모르게 발끈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혼을 내주었는데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또 마음이 물렁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청소시간에 그 아이에게 해준 말입니다.

"지금은 머리가 아프니까 머리 좀 식혔다가 월요일 날 얘기하자. 난 널 설득시킬 테니까 넌 선생님을 설득시켜 봐. 나도 고집 부리지 않을 테니까 너도 괜한 고집 부리지는 말고. 알았지?"

월요일날 아이를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지 아직은 난감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이도 딱 저만큼만 난감했으면 좋겠습니다.
#수학여행 #순천효산고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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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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