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위원장 맡으시오, 안 하면 반동입네다"

[윤씨이야기②] 전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된 대한민국

등록 2010.10.05 14:23수정 2010.10.05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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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마이뉴스 창간 10주년 기념 기획-르포기사 공모전> 기타(사는이야기 등) 분야 우수작입니다. [편집자말]

영화 <작은연못>의 한 장면. ⓒ (유)노근리 프로덕션


6월이 오고 하순이 될 때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었다. 나는 우리는 마을에 유일하게 라디오가 있는 참봉 할아버지 댁으로 달려갔다. 분명 새벽 북한의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서울로 진격하고 있다는 방송이었다. 소문은 쫙 퍼졌고,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우왕좌왕했다.

드디어 서울이 인민군 수중에 넘어가고 남으로, 남으로 피난행렬이 이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를 통해 서울을 기어코 사수하겠다고 장담했지만, 실상 이 대통령은 이미 수원을 거쳐 대전까지 피난을 간 상태였다. 그리곤 북의 탱크와 인민군을 차단하기 위해 한강 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서울 시민들이 서울을 빠져 나가지 못해 인민정부에 부역자가 되어 버렸다.

서울이 3일 만에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고 이어 수원 대전으로 인민군이 내려오고 있을 때 이 대통령은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임시수도를 정했다. 전북을 거쳐 전남 광주지방도 인민군이 접수할 무렵이었다. 그런데 효골 우리 마을에 사는 당숙은 형님이 죽은 뒤 4월에 소위 보도연맹이라는 전국적인 조직에 가입했다. 보도연맹은 좌익 세력으로 분류된 자를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조직한 단체였는데, 6·25가 터지고 남한으로 진격하고 있는 인민군과의 결합을 차단하기 위해 보도연맹을 소집해 처단한 것이다.

보도연맹 사건으로 집단학살 당한 당숙

당숙모는 당숙이 경찰의 소집에 응했는데 며칠째 귀가하지 않자 수소문을 했다. 장성의 어느 산골짜기에 300여 명이 집단 학살을 당했다는 소식에 머슴을 데리고 현지로 갔다. 이틀 동안을 찾았는데 뒤섞인 시체더미에서 당숙의 하체를 발견하고 신발이 당숙 것임을 확인해 효골로 운구했다.

당숙의 시체는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육모 정자에 하루 동안 안치했는데, 한여름이라 시체가 부패하여 그 냄새가 마을을 진동했다. 나도 당숙모의 슬픔에 동참하고 울기만 했다. 이틀 후에 시신이 당숙 댁에 안치돼 제례법 대로 상여놀이를 하고 3일장으로 상여가 나갔는데 온 마을 사람들의 곡소리가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더구나 당숙에게는 5살 짜리 아들과 세 살배기의 딸이 있었는데 애들이 상주가 되어 상여 뒤를 따르고 있었으니…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슬픈 장례행렬이었다. 당숙은 뒷산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우리 마을 효골에선 영철 형의 첫 희생에 이어 두 번째 죽음이 나온 것이다. 당숙은 잘생기고 똑똑했는데, 당시에는 식자가 들거나 세상을 앞서가는 뜻있는 청장년들이 좌익세상을 꿈꾸었다.


이렇게 장례를 치르고 난 1주일 후에 효골에 인민군이 진입했다. 그날이 7월 22일이었다. 학교와 지서와 면사무소에는 태극기가 아닌 인공기가 게양되어 되었다. 인민군은 남한 전역을 접수하고 치열하게 낙동강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낙동강 전투는 마지막 보루였기에 남북은 총력을 폈고,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는 전투가 계속됐다. 어디 이뿐인가. 폭격기는 인민군 주둔지로 지목되는 곳이면 여지없이 폭격을 가해 불바다로 만들었고, 이에 따른 민간인 사상자들도 늘어났다.

영화 <작은연못>의 한 장면. ⓒ (유)노근리 프로덕션


그렇게 전쟁이 이어지던 중 7월 23일이었다. 내가 학교에 특별활동을 하고 돌아온 오후였는데 대문을 열고 낯선 사람들이 들어섰다. 군관 장교와 호위병이 2명 그리고 민간인 한명이 아버지 앞에 섰다.


"이 댁이 윤영철 동지의 댁입니까?"
"그렇소만 당신들은 누구시오."

"아 그래요, 조국의 해방과 통일을 위해 혁혁히 투쟁하다 동아가신 윤영철 동지의 충정을 높이 평가합니다."
"아니 당신들이 우리 영철을 어찌 안단 말이요?"

"네, 다 압니다. 이분은 군당위원장이시고 저는 군관 장교입니다. 영철 동지 아버님이신가요? 오늘부터 아버님은 효지면 인민위원장으로 임명되셨습니다."
"위원장이라니요. 나는 일자무식이고 농사짓는 농부인데 어떻게 중요한 일을 맡는다는 말입니까? 다른 유능한 사람 찾아 시키십시오."

"아닙니다. 아버지가 꼭 하셔야 합니다. 못 하신다면 반동입니다. 다 밑에 요원들이 알아서 합니다. 염려 마십시오."
"정말 나는 농사 밖에 모릅니다."

"여기 서있는 젊은 동지는 영철 동지의 아우가 되십니까?"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 의용군에 들어와 조국통일전선에서 함께 해야 합니다. 당장 나와 같이 근무합시다."

그들이 집에 들어선 지 10분 만에 순식간에 일사천리로 일들이 이뤄졌다. 그때 할머니와 어머니도 계셨는데, 다들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별을 단 군관과 인민군들이 버티고 있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위원장을 극구 사양했으나 "반동"이라는 말에 어쩌면 아들에 이어 당신도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함구하고 말았다고 한다. 더구나 할머니와 부모님은 둘째 형이 19살인데 바로 의용군에 입대한 뒤 떠나버린 터라, 또 자식을 잃을 것 같다는 마음에 심란해 하고 있었다. 당시 육촌 형은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당장 노래교사가 돼 '김일성 장군과 북의 애국가'를 여러 어린이들에게 밤마다 가르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바뀐 대한민국

영화 <작은연못>의 한 장면. ⓒ (유)노근리 프로덕션


그들은 당초 어머니에게도 부녀위원장을 권했으나 사양했고, 결국 보름 전 돌아가신 당숙의 부인인 당숙모에게 부녀위원장을 맡겼다. 이뿐이 아니라 당숙의 동생들이 둘이 있었는데 한분은 보도위원으로 한분은 의용군으로 차출되었다. 대한민국이 하루아침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세상이 바뀐 그때를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한순간 바뀐 세상에 마을사람들도 어리둥절해 했다. 위원장의 집이라고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론 큰아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맡아 고역일 것이라고 동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비교적 넓은 우리집에는 아예 인공기를 달았다. 우리집은 인민군들이 오다가다 들어와 밥을 먹고 낮잠도 자고 가는 병영이 되었다.

인민군들은 '귀여운 소년동무'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밤이면 연극을 하여 주민들이 동원됐고 인민단결의 기치 아래 노래하고 춤을 췄다. 그러다가 밤중에도 비행기의 공격을 피해 방공호를 파고 피하는 연습도 했었다. 이런 상황이 2개월 동안 계속되더니 '인천상륙작전'을 벌인다는 소문이 라디오를 통하여 들려왔다. 둘째 영호 형은 가끔 군관 장교와 함께 집을 찾았는데 상당히 높은 지위인 군관참모를 맡았다고 했다.  

한편 아버지는 날마다 면사무소로 출근해 근무하였는데 주민들의 민원이 무척 많이 들어왔다. 주로 "지주나 경찰 또는 면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하소연과 심지어는 "논에 물꼬 트는 일을 해결하여 달라"는 소소한 일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원래 심성이 곧고 효자였으며 법이 없이도 살아 갈 수 있는, 그야말로 양반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맡은 직책으로 고민이 많으셨다. 그러나 한문을 하시고 식견이 있어 한때는 언문과 한문을 광유재 제각에서 가르친 훈장이기도 하셨기에, 이치와 상식은 알고 있었다. 군관 동무의 일방적 위원장 임명에 피해가려고 무식자라 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그래서 면민들의 엉뚱한 민원이나 호소에는 단호히 결정을 내렸다. 아버지는 "당신들이 생각하기에 세상이 아주 바뀐 것이 아니다, 또 달라지면 그때는 원수가 되는 것이니 양보를 하라"며 독려를 했다. 그 결과 마을사람들은 서로를 많이 이해했고,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고 죽고 죽어가는 일들은 없었다. 그 점이 아버지의 공적이었다. 비록 살기 위해 부역자가 되었지만 인간적으로 그리고 바르게 처리한 인민 위원장이었다. 가끔 아버지의 점심을 갖고 면을 찾으면 면당위원들이 "우리 위원장 셋째 아드님이 왔다"며 퍽이나 반갑게 대해 주었다. 거기에는 일가친척들도 여러 명 근무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급하게 몸을 피하신 아버지

그런데 소문으로만 돌아다녔던 인천상륙작전은 치열하기만 했다. 유엔의 맥아더사령관이 진두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은 함포사격과 폭격기로 인천시의 건물을 파괴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인민군은 낙동강까지 점령했던 인민군과 의용군이 38이북으로 후퇴할 때까지 일주일 이상 맞섰다. 그러나 결국 그해 9월 29일 인천상륙작전은 유엔군이 상륙하면서, 국군과 함께 중앙청에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꽂으며 막을 내렸다. 이로 말미암아 이남에 주둔했던 인민군과 의용군은 북으로 후퇴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거리상으로 전라도나 경상도에 주둔한 병사들은 시간상으로 늦어져 철수에 과연 온전히 북으로 갈 수 있는가가 문제였다.

인민위원장인 아버지는 어찌 대피하실까 걱정이었다. 그런데 인민군이 철수한 10월초였다. 효지초등학교 교실이 6개 있었는데 교실마다 인민군의 군량미와 설탕, 광목, 솜 등이 꽉 들어있었다. 인민군이 철수했다는 소문에 면민들이 너나없이 지게와 수레를 갖고 와 교실에 있는 물품들을 가져가고 있었는데, 아수라장이었다. 나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아버지와 부위원장이 죽창을 들고 면민들을 말리고 있었다. 그 때의 위원장인 아버지의 모습이 처량하기만 하였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큰 소리로 난리를 치는 면민들을 향해 말했다.

"여보시오. 면민 여러분, 여기 있는 물건들은 다 나라의 것이오. 마음대로 가져가면 불법이요. 자중하시오."
"당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인민군이 떠났으니 우리 것인데…."

"비록 인민군이 두고 떠났지만 이는 나라의 공용 물품이기에 불법인 것이요."
"아니 당신은 인민위원장이 아니오? 지금 국군과 경찰이 오고 있는데 빨리 피하지 않고 뭐하는 짓이요. 죽고 싶소?"

어떤 면민의 말에 아버지도 움찔했지만 나도 그 사람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선량한 공직자로서 북이 되었든 남이 되었든 어디까지나 공적인 물품이라는 판단 아래 죽창을 들고 복무를 하고 있었지만 이는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다. 10살 먹은 나도 판단이 서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바로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말씀드렸다.

"아버지, 지금 저 면민의 말이 맞아요. 지금 경찰과 국군이 오고 있을 겁니다. 빨리 피하십시오."
"그래, 알겠다. 집에 가서 할머니와 어머니께 아버지는 진외가로 당분간 피해간다고 말씀드려 안심시켜 드려라."
"네, 아버지 빨리 피하세요. 조심하시고요."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는 아버지가 뒤늦게나마 피하시는 뒷모습을 보면서 '부디 무사하셔야 할 터인데'라고 불안한 마음을 가졌다. '과연 서창면의 진외가로 가실 수 있을까?' '중간에라도 붙잡히면 총살을 당하실 터인데…' 등등 끝없는 걱정이 계속되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가 당분간 진외가로 가 계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역시 할머니와 어머니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세상을 잘못 만나 큰아들 잃고 자신마저 불행한 순간에 있다"고 하시며 눈물을 글썽거리셨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가져가지 말라고 했던 학교 교실의 쌀과 설탕을 집 머슴들이 갖다 놨다. 나는 "아버지가 함부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고 지키셨던 물건인데 우리가 갖고 있다면 말이 되느냐"며 걱정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국군과 경찰이 들어오더니 각 마을에 공고를 했다. 학교 교실에 보관 중이던 물건들을 임의로 가져간 사람은 3일 안에 반납하지 않으면 엄벌에 처하겠다는 경고였다.

주민들은 잘못하면 처벌을 받는다니, 다시 이고 지고 수레에 실어 반납을 했다. 교실의 물품을 너나없이 훔쳐가고 있을 때의 광경은 그야말로 그런 난리가 없었다. 바로 난리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그때 느꼈다. 우리집에 왔던 물건도 설탕 한가마만 남기고 모두 반납했다. 당시 설탕은 누런 황설탕이었는데 피곤할 때 설탕물을 마시면 기운이 났다. 나는 그 설탕을 외가에 갈 때 일부 갖다드렸다. 그때는 참으로 별미였다.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넘긴 아버지

영화 <작은연못>의 한 장면. ⓒ (유)노근리 프로덕션


아버지의 근황이 걱정이었다. 인민위원장을 했으니, 당연히 요시찰 인물이었다. 나중에 듣기론, 아버지는 진외가로 간다고 했지만 막상 나서니 일단 무등산으로 피신을 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지원동을 거쳐 무등산 입구 삼거리에 섰다. 잠시 숙고하였는데 무등산으로 입산하면 일단 안전은 하겠지만 토벌작전에 결국 빨치산이 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아버지는 "빨치산이 되면 영원히 처자식과  담을 쌓아야 하는데 그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어 시내로 나가기로 했다. 무등산으로 입산하면 빨치산이 되는 것이요, 시내로 가면 부역자로 살아가야 했다. 아버지는 노모와 처자식을 위한 길을 택하기로 작정하고 그 길을 따라갔다. 한집에 들어가서 배가 고파 고구마를 얻어먹고 다른 집에 들어가 망태와 호미를 슬쩍하여 그걸 짊어지고 한참을 걸어 나왔다. 그 순간 무등산 군경합동토벌대인 군경 수십 명이 나타났다.

"누구냐, 손들어! 어디서 오는 길인가, 혹 첩자가 아닌가?"
"네, 저는 무등산에 약을 캐러 갔다가 오는 길입니다."  

"어디에 살며 약은 무슨 약을 캔다는 것인가?"
"네, 나주에 사는 박동강이고 제 노모님이 병환이 깊어 약을 캐러 갔다 옵니다."

"그래, 보아하니 효자구만, 지금 이곳은 위험한데 빨리 가시오."      
"고맙습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이요. 바쁜데 빨리 말하시오."
"증명을 하나 해주세요. 가다가 또 검문당하면 보여 주려고요"

"꽤 귀찮게 하네. 그러나 효자이니 하나 써 주겠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갖고 시내로 나오면서 무려 세 번이나 검문을 당했으나 부대장의 증명으로 통과되었다. 당시에는 도민증도 없던 때인지라 그 길이 통했다. 아버지의 기지 또한 번뜩였다. 만약 약초 망태와 호미가 없었다면 그들이 말하는 시내와 산사람과의 중간역할을 하는 첩자로 오인 받을 법도 했었다. 첫 번째 사선을 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시내로 무사히 나와 일단 진외가로 갔다. 진외가에서 외숙과 숙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난날에 양자가 되었을 때 외가에 신세를 지고 만호서당에서 몇 년 동안 한학을 했을 때 만난 서당 동학들도 있었으나 문밖에 출입은 삼가 했다. 그때는 타지에서 도피해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타지방 사람이 마을에 들어오면 신고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용케도 무사했다.
#6.25 #인민위원장 #인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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