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포해수욕장. 고운 모래, 넓은 백사장.
성낙선
9월 28일(화) 게으름이 극치를 달리고 있다. 연 이틀 씻지도 않은 상태에서 곯아떨어졌다.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어 편하긴 한데 영 찝찝하다. 그래도 그저께 밤엔 빨래라도 해 놓고 잤는데, 어젯밤엔 빨래조차 하지 않았다. 뭐 이렇게 살아보니 빨래 같은 건 하루 이틀 대충 건너뛰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터득한 거다. 자기 합리화를 위해 나중엔 물을 절약해서 좋지 않느냐는 생각까지 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부랴부랴 샤워부터 한다. 여행 다니면서 참, 아침저녁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몸을 씻고 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그날의 여행 코스를 숙지하는 일이다. 가능하면 지명이나 갈림길, 주요 방문지 같은 것들은 반드시 외우려고 하는데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명사를 암기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극단적으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지도를 들여다본다. 그런데도 지도를 접어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나면, 방금 기억하려고 했던 게 뭔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는다. 그렇게 해서 주요 이정표를 지나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처구니가 없을 때가 많다. 지도가 복잡한 탓이려니, 남 탓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영 마음이 편치가 않다. 이러다 집에 돌아가는 길조차 잃어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날그날 해야 할 일을 해놓지 않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은 수시로 잊어버리고, 이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다. 점점 더 바보가 돼 가고 있는 느낌이다.
나 홀로 길 위에 서 있는 날이 점점 더 많아지다 보니, 내가 누군지 되돌아볼 때가 많다. 집에서나 회사에서 평소 어떻게 지냈는지 되돌아볼 때도 있다. 단순히 씻고 안 씻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평소 해야 할 일을 잊고 산 게 너무 많았던 게 아닌가 하는 자각이다. 매일 밤 빨래를 해야 하듯이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들, 길 위의 이정표를 기억해야 하듯이 했어야 하는데 새카맣게 잊고 산 게 무엇인지 되짚어보고 있다.
밤새 비가 내렸다. 혹시 아침까지 비가 내리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창문을 열어보니 비는 내리지 않는다. 대신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분다. 풀들이 몸을 누이는 정도로 봐서 강풍임이 틀림없다. 바닷가라서 그런지 평상시에도 바람이 몹시 거칠다. 이런 날씨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살짝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아침 기온이 뚝 떨어졌다. 이제 드디어 여름이 가고, 겨울이 한 발 더 바짝 다가온 느낌이다. 지난여름에 사람 몸살 나게 더웠던 것에 비하면 추위가 지나치게 일찍 찾아온 셈이다. 서서히 추위에 대비해야 할 때다.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자전거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바퀴가 저절로 굴러간다. 지금은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나중에 옆이나 앞에서 불어올 때는 자전거 타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 바람이 부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바람의 세기인데, 오늘 부는 바람은 무시할 만한 수준을 벗어났다.
걷기 열풍의 흔적을 만나다 신진도를 다시 되돌아 나와 황골항을 향해 달린다. 황골항은 태안읍에서 서남쪽으로 튀어나온 작은 반도 남쪽에 위치해 있는 조그마한 항구다. 황골항에서는 주민들이 그물 손질에 여념이 없다. 마을길이며 부둣가가 온통 꽃게 그물이다. 햇볕이 따뜻하고 바람이 불어 바닷물에 전 그물을 널어 말리고 손질하는 데 좋은 날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