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나들길5 우리는 비가 내려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걱정하지도 않았으며 마냥 행복하게 길을 걸었다.
고양올레 윤숙희
길은 인간의 삶을 품고 있는 역사이자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세월 속 자연의 풍화와 격변이 남겨져 있는 생명의 핏줄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더구나 못생기고 무딘 발바닥의 촉감으로 밟히는 오늘의 길은 사뭇 달랐습니다. 인간의 끈질긴 삶과 죽음, 전쟁과 고난, 수많은 관계와 인연이 뒤엉킨 파란의 역사가 미세한 가루로 부서져 흙 속에 스며든 흔적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강화 나들길 2구간(호국돈대길) 곳곳에 자리 잡은 갑곶돈대, 용당돈대, 화도돈대, 오두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강화라는 섬을 둘러싼 진, 보, 돈대는 섬을 지키기 위한 호국의 보루였습니다. 조선의 심장부를 노리는 수많은 외적들이 서해를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오기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침략의 항로가 강화 나들길 옆 염하(鹽河)의 물길이었을 것입니다.

▲강화 나들길6 '용당돈대' 위를 한바퀴 걸어 돌아보며 강화의 역사, 섬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고양올레 윤숙희
돈대 위에 올라 염하를 조망하였습니다. 흐릿한 회색빛 물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조심스럽게 거듭하며 가만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건너편에는 빼빼 마른 실뱀의 꼬리처럼 보이는 '문수산성'의 옅은 흔적이 구불구불 이어져 산등성이를 타고 있었습니다. 염하와 문수산성을 가만히 바라보자니 오래 전 역사 속 이야기의 한 장면이 '오버랩'되어 희미하게 떠올랐습니다.
나는 조용히 생각을 더듬어 가며 당시 최강의 기마 전투력을 자랑하던 청나라 군대와 오합지졸 조선의 군대, 무능하고 무기력한 초라한 조선의 임금을 떠올려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했고, 엉뚱한 충동으로 상상했습니다.
'1636년 평생 바다를 경험하지 못한 초원민족 청나라 용골대의 군사들은 김포지역의 민가를 때려 부수어 판문과 서까래 등으로 엮어 만든 뗏목을 타고 염하를 건넜습니다. 방심하고 있던 조선의 병졸들은 살육되었고, 인조의 부인인 중전과 세자는 인질로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결국 남한산성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올리게 되었으니... 아, 수북하게 눈 쌓인 길을 맨발로 걸어가 머리를 조아렸던 죽음보다 견딜 수 없었던 치욕이여...'물목의 폭이 짧게는 불과 2~3백 미터에 불과한 염하를 아마도 청나라 군대는 독수리 같은 살기로 건넜을 것이고, 상륙하여 조선의 병졸들을 무참히 죽이는 참혹한 상상이 순간적으로 섬뜩하게 찾아왔습니다. 나는 그 순간 부끄러움과 치욕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욕망을 쟁취하려는 인간들의 무서울 정도로 강인한 의지와 자신감, 그리고 광폭한 살기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강화 나들길7 - 염하(鹽河)로 흐르는 탁류 염하(鹽河)로 스며드는 흐릿한 탁류가 갯골 사이를 흐른다.
고양올레 윤숙희
강화 나들길 위에 남겨진 오래 전 역사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남아 교훈이 되었고, 사연이 되기도 했습니다. 나는 엉뚱한 충동이 발동된 갑작스런 상상으로 '강화'라는 섬의 역사를 혹시나 무례하게 조롱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조심스레 걱정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금 초행의 자세로 돌아와 일행들의 뒤를 따르며 그들과 한데 어우러져 또 나들길을 걸었습니다.
어느 순간 몇 방울의 비가 떨어지더니 이내 가는 비가 되어 대지에 뿌려지고 있었습니다. 나와 일행은 그 비를 두려워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비를 맞으며 걸었고, 서로를 진심으로 배려하고 격려하며 걸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따스한 인간미가 아낌없이 발휘되는 촉촉하고 아름다운 가을날의 강화 나들길을 걸었습니다.

▲고양올레 나들길 걷기 <고양올레> 1주년 생일맞이 강화 나들길 걷기 기념 단체사진
고양올레 윤숙희
광성보 팔각정에 둘러앉아 우리는 서로를 위해 고운 노래를 불러주었고, 그에 반응하여 수줍고 착한 미소를 나누어 주었으며, 서로에 대한 의리와 배려를 체감했습니다. 길을 걸으며 길과 사랑에 빠졌고, 길이 가진 자연성과 생명성이 담긴 조화로움의 철학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면 보이고, 보이면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오묘한 원리와 이치가 우리가 걷고 있는 길가에 가만히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분홍빛 코스모스와 새빨간 천일홍, 연보라색 벌개미취, 하얀 쑥부쟁이와 그 밖에 이름 모를 수많은 들꽃, 들풀들이 어우러져 피어난 가을날의 나들길은 행복이었습니다. 산과 들, 바다와 하늘이 사람을 품어 조화롭게 펼쳐놓은 이 아름다운 강화의 길에서 나는 다시 수줍은 사랑에 빠집니다.
사랑하면 보이고, 사랑하면 느껴지나니...길은 사랑이어라. 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2일 <고양올레>1주년 생일맞이 걷기 행사로 강화 나들길 2구간(호국돈대길)걷고 와서 쓴 글입니다. # 2구간은 호국돈대길로서 강화역사관~초지진까지 약 17km의 거리로 5시간 내외 소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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