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북한에 태어났어도 똑같을 거야"

'남한의 정태인'이 '북한의 정태인'에게 쓰는 편지

등록 2010.10.16 11:23수정 2010.10.16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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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 경제평론가 ⓒ 남소연

"당신은 북한에 태어났어도 똑같을 거야."

언젠가 내 처가 자꾸 세상과 어긋나기만 하는 나에게 한 얘기다. 타고난 불평분자라는 말 같아 조금 억울하긴 하지만 아마도 그랬을 거다. 100%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야말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던 70년대 말, 80년대 초의 비겁한 나를 떠올려 보면 지금 북한에서도 아무 말 못하고 술만 마실 가능성이 꽤 있기 때문이다. 해서 틀림없이 있을, 그러나 술만 마시고 있을지도 모를 '북의 나'에게 편지를 써 본다.

"안녕하신가? 아니 4대강과 한미 FTA로 인해 부글부글하는 나만큼 자네도 평안할리 없겠지. 3대 세습이라... 누가 뭐래도 말이 안되는 일이 벌어졌으니 말일세. 하지만 지금 남에서 왈가왈부하는 데는 신경쓰지 말게나. 속 마음이 어떻든 그건 다 남한의 대중을 향한 말들이니 말일세. 이제 진보가 북한에 대해 할 말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수구세력들의 공격과 대중의 혐오에 대해 예방주사를 놓는 것일테고, 제 속을 털어 놓지 못하고 입 다물겠다 선언한 사람들 역시 고립을 두려워 하기 때문일테니 말일세. 그 어느 쪽도 자네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건 아닌 듯 하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아... 천안함 사태를 떠올리지 말게나. 남쪽의 형편없는 짓거리를 밤새도록 열거한다 해도 공화국 인민의 삶이 한치도 나아지는 건 아니니 말일세. 공화국이 어떤 운명에 처해 있다고 자네가 생각하는지 진정으로 궁금하네.

나는 한 때 개성공단의 청와대 담당자였네. 그래서 사상 두 번째 자동차로 휴전선을 넘는 감격을 누리기도 했지. 비서관이었기에 글로 남길 순 없었지만 당시에 내 느낌은 휴전선을 넘자마자 "하늘 아래 녹슬지 않은 것이 없다. 참고 또 참으려 해도 눈물이 난다."는 것이었네. 거기서 움직이는 트럭은 대우 아니면 현대였고 마중나온 낡은 벤츠를 빼곤 개성까지 네바퀴로 굴러가는 물체를 단 하나도 보지 못했네.

아... 환경까지 고려한 삶의 질을 생각하면 자동차가 뭐 그리 대단한 지표냐고 하지 말게나. 개성의 고려 왕궁 부근을 빼곤 천지사방이 온통 벌거벗은 민둥산이니 북쪽에서 환경을 얘기하기엔 민망스럽지 않겠나. 70년대에 지어졌음직한 아파트 몇몇 집엔 땔감용으로 보이는 나무가 쌓여 있는데, 같이 간 통일부 국장은 노동당 간부 집일 거라고 하더군. 물론 틀린 얘길 수도 있지만 어쨌든 아파트 난방을 나무로 하고 있다는 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네.

자네가 북의 나라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아다시피 난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네. 특히 최근에는 인간이 협력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를 곰곰이 따져 보는 중이라네. 이 쪽(행동경제학, 진화경제학)의 논리로 보면 북한은 참 괜찮은 세상일 수 있네. 핏줄(민족)을 강조하는 것도 그렇고 익명성이 없는 사회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고, 자기 정체성에 관한 인민들의 '렬렬한' 확신은 세상 어디에 버금가겠나.

바깥에 대한 적의로 똘똘 뭉치는 것도 역시 인간 협력의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이니 북한은 인간 협력의 조건을 거의 다 갖추고 있는 셈이네. 150년 전에 다윈이 갈파했듯이 협력은 경쟁보다 나은 결과를 낳기 마련인데 왜 북의 인민들은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는 것일까? 아.. 미국이나 그 꼭두각시인 남쪽 탓하지 말기 바라네. 조금 전에 얘기했듯이 그 사실 자체가 협력과 성장의 조건이기도 하니 말일세.

자네가 북의 나라면 내가 대학 시절에 자본론을 탐독했듯이 최신 경제이론도 들춰보고 있겠지. 아무리 북이라도 구글 검색을 막을 수는 없을테니 하는 말일세. 진화경제학은 그 수수께끼를 "잠김효과"(lock-in effect)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네. 협력의 아름다운 공동체가 기술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자신을 지나치게 믿으면 결국 정체하게 된다는 건 이론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증명된 일일세. 그래서 협력하는 사회일수록 개방성과 다양성을 갖춰야 하는 것이네. 북유럽이나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이 평등하면서도 높은 경제적 성과를 누리는 건 그들의 개방성과 다양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네.

나한테 3대 세습은 "북한이 잠김의 수렁으로 더 깊이 빠져 드는구나", 이렇게 다가오네. 주체사상이라는 터무니 없는 이론이 가져오는 획일적 문화, 그리고 기술마저도 "우리 것"을 찾는 건 실은 다른 세상 사람의 능력을 하찮게 여기는 폐쇄성과 오만함에 다름 아니네.

물론 그게 북한의 자구책이라는 점은 분명하네. 중소분쟁 속에서 김일성 주석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고 김정일위원장이 군부와 개방파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사실을 왜 모르겠나. 김정은'대장'이 아니고선 현상유지조차 어렵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자네같은 사람들이 인민의 마음을 얻어 치고 올라오건, 아니면 노동당과 군부가 스스로 근본적 변화를 꾀하지 않고선 공화국이 잠김의 수렁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니 말일세. 3대 세습은 군부와 당이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택한 길이니 폐쇄와 획일성은 더욱 강화될 수 밖에 없지 않겠나. 혹시 중국모델을 꿈꾸고 있을지 모르겠네.

하지만 그 모델도 등소평이 화국봉을 몰아 내는 방식으로 모택동 노선을 폐기했기에 비로소 가능했다는 걸 자네가 모르지는 않을 걸세. 더구나 그 중국도 조만간 경제위기를 겪고 나면(사실 이때가 남북 모두의 최대 위기가 될 걸세) 일당 독재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될 걸세. 김'대장'이 구름을 부르고 비를 내리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자신의 아버지와 신의 반열에 오른 조부를 비판하리라 상상할 수 있겠나?

진정 인민의 뜻으로 떠오른 지도자라면 반드시 그리 되어야 하겠지만 냉혹한 국제질서가 더더욱 과거의 길을 고집하게 만들 것으로 보이는 걸 어쩌겠나. 중국 쪽에서 보면 전 역사를 통해 항상 목에 걸린 가시같았던 한반도의 반쪽이 스스로 반식민지가 되겠다 하니 얼마나 기껍겠나? 공화국이 망하도록 놔두지야 않겠지만 그렇다고 '주체적 식민지'를 힘들여 막을 이유도 없겠지.

이리 얘기하니 자네도 갑갑하겠지만 내 보기에 북한은 수많은 장점을 가진 사회네. 인민의 신뢰를 잃지 않고 있는 국가부문은 민주적 운영만 보장된다면 효율을 되찾을 것이고 공동체 정신이 살아 있는 사회경제 역시 훌륭한 토대가 될 수 있을 걸세.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시장경제를 무서워 할 이유는 전혀 없네. 그게 무서워서 경제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화폐개혁'의 칼을 휘두르는 게 오히려 우스갯거리라네.

진정으로 인민을 위한 세상이 어떤 것인지 상상을 하고 말하는 것부터 시작일걸세. 어느 세월에 그게 가능할까, 비관부터 하지 말기 바라네. 자네들이 폐허에서 나라를 일으켜 세웠듯, 또 우리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던 군부독재 타도를 이뤄냈듯 그렇게 한발 한발 나아가면 틀림없이 북한이 진정한 '인민 공화국'으로 거듭나게 될 걸세. 또 우리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날, 우리는 만나게 되겠지.. 막걸리를 푸지게 마시게 될 그 날을 기다리면서...

2010년 10월 14일
#북한 3대 세습 #김정은 #김정일 #정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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