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간 세 밀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독립기념관
1908년 3월 윤병구와 함께 뉴욕으로 돌아온 이상설은 스티븐스 저격사건과 애국동지대표회의 진행과정과 1909년 2월 1일의 대한인국민회의 창립과정을 지켜보았다. 그 사이 박용만과도 교감을 자주 나누었다.
애국동지대표회 연해주 대표였지만 밀정의 보고에 의하면 유고가 있어 회의에는 불참했다. 어딜 가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그는 어른으로 대접 받았다. 샌프란시스코에 주로 머물면서 대한인국민회 제1차 이사회도 참여했고 만주와 러시아에 국민회 지회를 확산하는 계획을 세워 그 실천에 들어갔다.
이상설은 원래가 조용한 사람이었다. 아무 때나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보고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고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을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버리고 내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이 남긴 유언이었다. 자괴의 흔적을 깡그리 지워버리고 싶은 게 그의 심정이었다. 1917년 그가 우수리스크에서 병으로 죽자 동지들은 화장한 재를 강물에 뿌렸다. 공중으로 흩어지고 강물에 흘러간 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2001년 우수리스크의 수이푼 강가에 유허비가 세워졌다. 연해주에 있는 우수리스크는 1870년 이래 한인들이 이주해서 개척한 곳으로 이상설, 안중근, 이동녕, 이동휘, 박은식, 신채호 등 우국지사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이상설은 27세 때 성균관 관장에 올랐다. 오늘날로 치면 국립대학 총장이 된 셈이다. 영어, 불어, 노어, 일어를 공부하고 국제정치와 법률을 연구했다. 그처럼 실력이 탄탄했기에 고종의 특명을 받지 않았을까. 그는 '산술신서(算術新書)'라는 한국 최초의 수학책도 펴냈다. 일본의 우에노 기요시가 저술한 '근세산술(近世算術)을 번역 편집한 것이었다.
그가 의정부 참찬으로 있을 때 을사5조약이 체결됐다. 체결을 막기 위해 회의장으로 들어가려다 저지를 받았다. 그는 막아서는 헌병지휘관의 어깨를 지팡이로 후려쳤다.
"(전략) 대저 그 조약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아니해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나라를 위해 순사(殉死)할 것을 결의하시어 단연코 거부하시옵소서. 원하옵건대 성상께옵서 일본과의 조약체결에 참여한 제 대신들을 모두 징계하시어 국권을 바로 잡으시고 조약인준을 엄히 거절하시어 천하 만세에 성심이 있는 바를 바로 알게 함이 옳을 것입니다."이것은 을사5적이 1905년 11월 17일 늑약을 체결한 이틀 후 이상설이 고종께 올린 상소문의 일부다. 이듬해 봄 그는 망명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