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동지대표회가 지각변동을 일으키지 않고 끝나자 "후유!" 한 사람은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총영사였다. 자칫 그의 관운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공방전은 치열했다. 총영사는 적지 않은 돈을 주고 한인 유학생을 매수해서 밀정으로 회의에 침투시켰다.
박용만도 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본 스파이가 발언 내용을 일일이 기록해 본국에 보고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모이던 것을 중지했다. 회의장을 자신의 숙박소 건물로 옮긴 다음 입구에 경비원을 세웠다. 위임장이나 증명서가 없는 사람들은 출입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세 가지였다고 일본 총영사는 본국에 보고했다. 첫째 각 지방 각 단체가 일체가 돼 국사에 임할 것, 둘째 각지에 통신소를 설치해 각지의 상황을 지실(知悉)하도록 할 것, 셋째 국민교육에 필요한 내외서적의 저술 번역을 추진할 것이었다.
일본 총영사가 판단하기로는 애국동지대표회는 독립운동을 규합하기 위한 최초의 회의였지만 그 결과는 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 격이었다.
그는 위에 언급한 사항들 정도이지 회합의 결과가 특별한 게 없다고 결론을 지었다. 쓸데없이 과격하게 나감으로써 외부의 반감을 살 게 아니라 먼저 한인들의 지식을 계발하여 실력을 배양함으로써 후일을 기약하고 교육의 보급과 애국심의 고무에 힘쓰며 한국의 존재를 세상이 망각하지 않도록 애쓰자는 극히 온건하고 일반적인 결의를 한 것으로 보고서를 꾸몄다.
그러나 그가 놓친 것이 있었다. 박용만이 네브래스카 주 헤이스팅스대학에 소년병학교를 세우기로 한 것에 대한 의결사항이었다. 한인밀정의 표현이 온순해서 총영사의 판단을 잘못 유도한 거였다.
"네브래스카에 있는 청년들은 매년 방학에 커니로 모여서 여름학교에서 공부하며 또한 기한을 정하고 운동 체조 조련도 연습하기로 가결하다."
밀정이 그렇게 보고했기 때문에 총영사는 학생들이 여름 방학 중 모여서 운동이나 체조를 하는 정도로 알았지 실제 소총을 쏘며 군사조련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애국동지대표회의 성과는 성과를 내지 않은 게 성과였다. 일본 총영사가 가뜩이나 주시하고 있는 판에 눈이 번쩍 뜨이는 성과를 내놓았다면 어떻게 되겠나. 밀착 감시만 더 심해졌을 것 아닌가. 그 때문에 소년병학교는 다음해 여름방학에 개교를 했는데도 2년 동안 일본 측이 눈치를 채지 못했다.
들킨 것은 헤이스팅스에 최초로 복엽비행기가 나타나 시범비행을 하자 구경을 나왔던 인근의 일본인 농부에 의해서였다. 소년병학교 훈련생들이 행사에 참가해 절도 있는 산병교련을 시범하는 것을 보고 농부는 소년병학교가 조선총독부를 타도하려는 무관학교라고 샌프란시스코의 총영사관에 긴급 보고했다.
어렵사리 어떤 회의를 조직하면 그 성과물로 새로운 조직체를 내오는 게 상례다. 그러나 애국동지대표회는 새로운 조직체를 결성하지 않았다. 그 또한 역설적으로 성과라면 대단한 성과가 아니겠는가. 당시 하와이에는 한인협성협회라는 큰 단체와 샌프란시스코에는 공립협회라는 큰 단체가 있었다. 만약 박용만이 개인적인 야망으로 또 하나의 운동단체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연합사건에 대해서는 각 대표 중 4분의 3은 일치한 의논을 가지고 모든 것을 완전히 조직하고자 하나 다만 리승만씨와 몇몇 대표는 그렇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여 오늘은 다만 베이비(Baby) 토론으로 하고 완전한 결론은 장차 공립협회와 자유회 참가의 모든 단체로 공동 의논하자 함으로 마침내 그같이 결정돼 이번에는 다만 각처 통신소를 설치하고 매삭 1차씩 교통할 일과 일주년에 한 번씩 아무 곳에서든지 총 의회를 열 일과 그 기회에 수삼 조건 긴요한 일을 가결하여 준비만 완전히 하였더라."
이것은 새로운 단체는 공립협회를 비롯한 모든 단체와 협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결의한 것을 밀정이 기록한 것이다. 당시 자유회라는 단체는 없었는데 밀정의 착오인 것 같다.
박용만은 독불장군이 아니었다. 애국동지대표회를 열기 전에 공립협회의 의사를 꾸준히 타진했다. 실제 회의가 열리기 2달 전 공립협회에 편지를 보낸 게 1908년 5월 6일자 공립신보에 기사화됐다.
"덴버에서 유학하는 박용만씨가 금년 6월에 그 지방에서 미국 정당의 회집을 기회삼아 애국동지대표회를 조직하고 취지서를 광포함은 이미 본보에 게재하였거니와 이제 애국동지대표회 덴버 임시회의 소회장 박용만씨가 공립협회로 공함하였으되 본 지방의 인심 경향과 시기의 적절로 각 단체를 연합할 주의로 이미 광포했으나 귀 지방에서 통합할 의논이 긴하다 한즉 통합하는 것이 연합하는 것 보다 승하겠기로(낫겠기로) 본회에서도 대등한 중의를 종코저(따르고자) 하오니 회기(시기)와 회소(장소)를 공의 선택하심을 바란다 하였더라."
이 기사를 미뤄보더라도 박용만 역시 공립협회의 의사가 통합에 있음을 사전에 파악하고 회의 참가자들의 이해를 구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반년도 되지 않아 하와이의 한인협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가 통합을 해 대한인국민회가 탄생했다.
1909년 2월 1일 대한인국민회 창립기념일을 전후해서 공립신보는 신한민보로 신문이름을 바꿨다. 1905년 11월 20일 창간한 공립신보가 1909년 1월 27일자를 마지막으로 종간했고 2주 후인 2월 10일 신한민보로 속간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는 2년도 되지 않아 그 조직이 확산돼 120여 지방총회들이 미국 본토, 하와이, 중국, 러시아, 멕시코 등지에 설립됐다.
대한인국민회가 창립되고 2년이 됐을 때 문양목 회장이 네브래스카 주를 방문했다. 그는 박용만에게 샌프란시스코로 와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아줄 것과 대한인국민회를 해외단체의 구심점이 될 수 있도록 헌장을 고쳐달라고 간청했다. 그 간청을 뿌리치지 않은 박용만은 6개월 휴학을 한 후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2010.10.22 11:19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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