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간이역. 1900년대 초.
Sergei M. (저작권 해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는 갈아타야 하는 플랫폼을 찾지 못해 기차를 놓쳤다. 전명운은 이때도 날쌔게 어떤 폴란드 귀족에게 접근해서 그의 친절로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었다. 독일을 통과해서 홀란드로 갔고 여객선을 타고 해협을 건너 영국에 도착했다. 영국의 사우스햄턴 항에서 마침내 네 젊은이는 미국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뉴욕에 도착한 건 1909년 늦은 봄. 송진헌은 뉴욕에 남겠다고 하고 세 사람은 대륙횡단 열차에 몸을 실었다. 덴버의 박용만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박용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덴버라는 정거장 이름과 박용만이라는 사람 이름만을 달랑 들고 무작정 눈 먼 여행을 계속했다.
세 사람의 여비는 아주 바닥이 난 상태였다. 첫날은 뉴욕의 동포가 싸준 음식을 먹었다. 시카고에서 동포가 싸준 음식을 받아 또 하루를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사흘 동안은 음식 살 돈이 없어 굶지 않으면 안 됐다. 덴버에 도착해서 박용만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네브래스카 주로 떠난 뒤였다. 그들은 체부에게 한인 유학생의 주소를 물었다. 다행히 그들의 숙소를 가르쳐줘 찾아갔으나 집에 없었다.
그들은 중국인 가게를 하나 찾아냈다. 중국인 주인 말로는 한인들이 더 이상 자기 가게로 물건을 사러 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 말은 그 전 해 애국동지대표회가 열렸을 때만 해도 한인들이 많았으나 공부 때문에 다른 주로 많이 빠져 나갔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들은 허기가 져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선반에 진열된 식품들을 보았지만 움직이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세 사람의 주머니를 다 털어봐야 겨우 16전이 달랑 남아 있었다. 선반에 '중추명월'이라는 상표를 단 통조림이 보였다. 그게 월병(찹쌀떡)인 줄 알고 15전을 내고 샀다. 열어보니 배를 포함해서 중국 과일 몇 조각이 들어 있었다.
그들의 비참한 상태를 눈치 챈 가게 주인이 부랴부랴 빵과 버터를 내왔다. 그걸로 빈 속을 채우자 곧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셋은 그리 멀지 않은 역으로 걸어가 대합실에서 정오까지 잠에 빠졌다.
한낮이 지나 유학생의 거처로 가던 중 한인 유학생을 거리에서 만났다. 그들이 세들어 사는 방은 형편없이 작았다. 모두 학자금이 없어 학교를 중단하고 돈벌이에 나서려는 참이었다고 한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그들을 위해 근처에 셋방을 얻어줬다.
박용만이 네브래스카로 떠나면서 운영하던 직업소개소 겸 여관의 운영을 맡긴 사람이 윤병구였다. 그의 주선으로 홍승국과 김현구는 가사도우미로 일자리를 얻고 전명운은 철도 노동일을 찾아 와이오밍으로 떠났다. 가사 도우미 일은 쉬운 게 아니었다. 너무 힘들어 때려치우고 두 사람은 박용만을 찾아 네브래스카 주로 떠났다.
김현구는 그 해 가을학기를 네브래스카 주의 링컨 시에 있는 한 초등학교의 5학년으로 들어가 공부했다. 박용만 곁에서 실로 오래간만에 안심하고 첫발을 뗀 것이다. 네브래스카 주 헤이스팅스 시에는 박용만이 설립한 '소년병학교'가 여름방학 마다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김현구와 홍승국은 헤이스팅스 공립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여름방학이면 '소년병학교'의 생도로 훈련을 받았다. 생도이면서 교사 역할도 했는데 3년 후인 1912년 제2회 졸업생들이 됐다. 두 사람은 훈련생들에게 한글과 문법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