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인쇄회로기판을 검사하는 모습 (자료사진)
강성관
지금부터는 대만 정부가 중소기업을 키우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대만의 IT·반도체 산업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대만의 IT·반도체 산업은 1980년대 이후 대만 경제를 이끌고 있는 핵심 산업이자 대만 정부가 그동안의 이른바 '온화한 산업 정책'을 벗어던지고 과감하게 개입에 나선 분야로 손꼽힌다.
대만이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만 정부는 1973년 공업기술조사연구원(ITRI, Industrial Technology Research Institute)을 설립해 전자통신 부문에 대한 연구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곧 이어 반도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ITRI 산하에 EROS(Electronics Research Service Organization)를 설립한다. 한국에서는 삼성전자라는 민간 대기업이 한국반도체를 인수(1974)하며 반도체 산업에 발을 담그기 시작하던 때였다.
미국에 기술 인력을 파견하는 등 몇 년 간의 노력 끝에 EROS가 반도체의 재료가 되는 얇은 원판인 웨이퍼(wafer) 시험생산에 성공하자 대만 정부는 민간 기업을 키우기 위해 두 가지 정책을 편다.
첨단산업단지를 건설해 조세 감면, 수출보조금 및 연구개발비 지원책 등을 내놓으며 민간 기업의 참여를 유도하는 한편, ITRI가 44%를 투자하고 민간의 투자를 끌어들여 UMC라는 회사를 창업한 것이다. EROS는 UMC에 180명의 기술인력과 4K DRAM 기술은 물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파일럿 설비까지를 모두 이전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10여 년 뒤인 1987년 대만 정부는 다시 메모리 부문에 진출하기 위해 필립스를 비롯한 민간 기업들을 모아 TSMC를 설립했다. 현재 UMC와 TSMC는 모두 반도체 파운드리(제조) 분야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는 업체로 성장했다.
이처럼 대만 정부는 후발 주자이자, 대규모 자본력을 가진 민간 기업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R&D 투자에 나서 상품 개발에 필요한 기술과 인력을 확보한 뒤 이를 민간에 넘겨주는 방식을 택했다. 물론 첨단산업단지와 같은 인프라를 조성하는 것 역시 정부의 몫이었다. 대만 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창립한 지 37년이 된 ITRI는 현재 1만 개의 특허를 보유했으며 매년 700여 개의 특허를 민간에게 제공하며 새로운 상품 개발과 창업을 돕고 있다.
또한 대만 정부는 2002~2006년에 '이조쌍성' 프로젝트를 추진했는데,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2006년까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을 1조 대만달러(한화 30조 원) 규모로 키우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관련 기업으로 지정된 업체에 대해 R&D 예산의 50%를 지원하는가 하면, 5년간 법인세를 면제하는 등 파격적 조건을 내세웠다.
2001년에는 섬 전체를 'Green Silicon Island', 즉 거대한 '실리콘 밸리'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담긴 '비전 2008 : 국가발전중점계획'을 발표했다. 실제로 대만 정부는 이미 1980년대부터 타이완 최대의 첨단 공업단지인 '신주공업단지'를 비롯해 북부·중부·남부에 대규모 산업과학단지를 조성하고 반도체, 항공, 정밀기계, 광전자 등의 분야에 대한 연구와 기술 개발에 힘쓰고 있다.
대만 중소기업의 독특한 분업·
협력 구조대만의 IT·반도체 산업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또 있다. 바로 중소기업들 사이의 분업과 협력 구조다. 반도체 공정은 보통 설계 → 제조 → 패키징 → 테스트 등의 네 단계를 밟게 되는데, 대만에서는 이 네 분야를 서로 다른 기업들이 맡아서 처리한다. 가령, 설계 공정을 가리키는 팹리스(fabless, 공장이 없다는 뜻) 업체의 대표 주자는 MediaTek으로, 세계 최고의 팹리스 업체 25개 가운데 6개가 대만 기업이다. 제조 공정을 가리키는 파운드리(foundry) 분야는 앞서 소개했듯 세계 1, 2위가 모두 대만 업체다. 특히 TSMC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무려 68%에 달한다. 패키징과 테스트 공정 역시 대만이 세계 시장정유율 47%와 68%로 모두 세계 1위다.
각 공정을 담당하고 있는 업체 간의 철저한 분업 구조는 어떤 의미에서는 단단한 협력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세계 최대의 패키징 업체로 꼽히는 ASE는 제조 분야에서 먼저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TSMC 등과 전략적 협력 관계를 통해 성장했다. 이에 대해 산은경제연구소의 보고서 <대만 반도체 산업 현황>(2008)은 "대만은 종합반도체 업체보다는 팹리스·파운드리 업체가 발달하면서 전문적인 패키징·테스트 업체가 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고 분석하고 있다. 대기업-중소기업 간 힘의 논리에 따른 하청 관계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대만 기업들 사이의 이러한 협력 구조가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만, 이는 대만의 기업 생태계를 떠받치는 중요한 '공존의 법칙'이다.
대만의 기업 생태계가 힘의 논리보다는 공존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앞서 소개한 세계적인 두 회사인 UMC와 MediaTek은 하나의 회사였다가 1997년에 설계 분야를 담당하던 MediaTek이 떨어져 나와 독립한 경우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UMC가 가진 MediaTek의 지분이 1.5%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만의 기업들은 서로 협력할 뿐 지배하지 않는다"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투자, 분업, 협력'... 대만의 성공 신화가 주는 시사점최근 대만에도 '기업집단'이라 불리는 계열화된 기업군들이 늘면서 중소기업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기는 하다. 대만의 경제 구조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과 대만 두 나라가 산업화라는 여의주를 입에 물고 날아오르기까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인 1998년, 한국의 10대 대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3.5%에 달하던 시절, 대만은 그 1/3에도 못 미치는 19.6%였다는 통계가 이를 보여준다.
대-중소기업의 상생이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지도 벌써 몇 달이 흘렀다. 따지고 보면 이미 수십 년도 더 된 화두이기도 하다. 적어도 박정희 정부 이후에는 중소기업에 관심을 두지 않은 정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중소기업들의 설자리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중소기업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통령 한 사람의 젊은 시절 무용담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인식의 한계,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해줄 대안 모델이다.
정리하면, 대만 중소기업의 성공 신화 뒤에는 중소기업들이 마음껏 뜻을 펼칠 수 있는 공정한 경쟁 구도, R&D와 인력·인프라에 대한 정부의 아낌없는 투자, 그리고 기업들 간의 수평적 분업·협력 구조 등의 세 가지 요소가 버티고 있었다. 여전히 중소기업들을 향해 혁신과 글로벌화를 주문하며 더한 경쟁력을 갖추기만을 다그치는 한국의 현실에서 다시 한 번 새겨야 할 대목이다. 정부는 좋은 중소기업이 좋은 기업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기업 생태계가 좋은 중소기업을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참고>- 국민호, 「한국, 대만, 일본의 산업정책과 경제발전에 대한 연구」- 김준, 「대만 경제의 특성과 장개석ㆍ장경국」- 오동윤(2001), 「대만 경제 침체와 시사점」- 윤상우(2003), 「대만 경제성장모델의 신화」- 이윤찬, '세계 휩쓰는 대만 IT의 경쟁력은'(이코노미스트, 2010.6.22)- 임성학, 「한국, 대만의 경제발전과 전통사상」- 윤상우(2004), 「중국ㆍ대만의 경제통합과 대만 성장모델」- 정명기(2002.4), 「대만 산업 정책에 관한 연구」- 홍지승(2003), 「대만의 신산업정책과 시사점」 덧붙이는 글 | 새사연http://saesayon.org에 원문 보고서가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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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정부, '중소기업 천국' 대만 잘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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