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티스 사에서 제작한 복엽비행기(1911년)
저자미상(저작권해제)
학교 운동장에는 말은 들었지만 생전 보지 못했던 비행기 한 대가 군중의 시선을 온통 휘어잡고 있었다. 라이트 형제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바닷가 키티호크 인근 모래사장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난 건 1903년 12월. 그러나 그것은 그들만의 실험이었다.
미 육군과 계약을 맺고 대중 앞에서 공식적인 시범비행을 한 것은 그로부터 5년 후인 1908년 9월. 미처 3년도 안 돼 한적한 시골도시 헤이스팅스에 비행기가 나타난 것이다. 수십 마일 떨어진 농장의 농부들마저 농사고 뭐고 내팽개치고 몰려들었다.
비행기는 위 아래로 날개가 둘 달린 복엽기였다. 뉴욕 주 버펄로에 있는 커티스 사에서 제작됐다. 비행기 주위엔 비행복을 입은 조종사와 작업복을 입은 장정들이 서너 명 서성거리고 있었다. 비행기의 엔진이 폭음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날개 뒤에 붙은 프로펠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작업복을 입은 장정들이 날개 끝을 붙잡고 밀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운동장을 박차고 하늘로 치솟자 사람들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하늘로 치솟은 조종사는 마치 자전거를 탄 자세였다. 날개 앞에 앉아 조종간을 쥔 채 오른쪽 팔을 흔들며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날 모여든 구경꾼들 가운데는 헤이스팅스 시에서 30마일 북쪽에 있는 그랜드 아일랜드(Grand Island)에서 농사를 짓는 일본인 농부들도 있었다.
그들이 놀란 건 커티스 복엽기만이 아니었다. 자신들과 생김새가 비슷한 동양인들이 군복을 입고 총을 메고 군중 앞에서 행진을 벌리고 있지 않은가. 한 50명 가량의 그 군인들이 지휘관의 구령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산병교련 시범을 보이자 구경하던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휘관이 외치는 그 구령은 분명 일본말이 아니었다. 일본인 농부들은 수소문 끝에 그들이 한인들이고 헤이스팅스 대학에서 여름마다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소년병학교'로서는 재앙의 시작이었다.
3년 후 그들은 순회강연 차 그랜드 아일랜드를 들른 일본 영사관 직원에게 그 사실을 고자질했다. 그 영사관 직원 이누이는 곧장 헤이스팅스 대학 학장을 찾아가 항의했다. 그래서 대학 측은 '소년병학교'에 더 이상 학교 시설을 빌려주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등록 학생 수의 감소 원인도 있었지만 '소년병학교'가 1914년 여름방학을 마지막으로 폐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원인이 됐다.
'소년병학교'는 1908년 5월 박용만, 박처후, 정한경, 임동식(당시 36세. 네브래스카 주 커니 시 인근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나중 '소년병학교'에서 훈련받고 제1회 졸업생이 됨) 네 사람의 의견이 일치해서 그것을 문서로 만들어 그 해 7월 덴버에서 열렸던 '애국동지대표회의'에 제출했다.
그러나 제안자는 커니 시 대표 박처후, 링컨 시 대표 이종철, 오마하 시 대표 김사형이 대신 맡았다. 회의에서 의논이 분분했으나 대표 세 사람의 강력한 주장과 박용만, 김장호의 끈질긴 설득으로 통과됐다.
김장호는 구한말 군인 출신이었다. 하와이 이민선을 탄 사람으로 네브래스카 주 커니 시에 있는 유명한 블리스 군사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비록 문구상으로는 "매년 방학에 커니 시로 모여서 운동 체조 조련도 연습하기로"했다는 표현이었지만 실제로 군사훈련 실시를 의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