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목사
독립기념관
소년병학교가 강조한 정신교육은 독립군 장교로서 무엇 보다 '인내심'을 기르는 것이었다. 박용만이 말하는 '인내심'은 꾸준히 준비해 조국이 부를 때 독립군 장교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절제하고 고학의 어려움을 견디며 학업을 마쳐 조국의 독립과 근대화의 버팀목이 돼야 한다는 거였다.
1911년 5월 10일자 <신한민보>에 실린 '소년병학교 학생들의 생활'이라는 글에서 박용만은 학생들의 일과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소년병학교 학생은 고생하며 공부하는 학생이라 일찍이 모아둔 돈도 없고, 남의 도움도 없이 3년 동안을 자기들이 벌어먹고 자기들이 공부하는 학생이니 대개 그 정형을 말하면 아침 6시에 기상나팔이 불면 일제히 일어나 5분 후에 검사를 치르고 또 연하여 세수하고 아침을 먹은 후 각각 시간 일을 농장에 나가 한 시간에 20전이나 25전을 받고 일하되 만일 시간 일이 학생의 수대로 다 되지 못하면 그 남은 학생들은 학교농장에 들어가 일을 하여 누구든지 12시 15분에 회식나팔을 불면 일제히 대열을 지어가지고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으며, 점심 후 한 시간은 운동을 하거나 놀이를 하거나 자기의 마음대로 하고 그 후에는 공부를 시작하여 두 시간을 허비하고, 또 그 후에는 취군나팔에 응하여 군복 차려 입고 군기 가지고 조련장에 들어가 각양 조련을 연습하며, 6시에 다시 식당에 들어가며, 그 후에는 공치기, 달리기, 씨름, 총쏘기와 풍류치기와 나팔 불기와 여러 가지로 각각 소창하고 밤에 또 공부시키는 과정이 있어 각각 정한 시간대로 교과실에 들어오며, 만일 자기의 공부 시간이 아니면 방에 앉아 공부를 복습하다가 저녁 검사를 치르고 소등나팔을 불면 일제히 취침하더라.위에 말한 바는 병학생들이 여름을 지내는 정형이며 8월 그믐이 되면 또 각각 자기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 흔히 스쿨보이로 들어가 한 주일에 2원이나 혹은 3원씩 받고 일하여 이것으로 지필(紙筆)도 사고 의복도 마련하니 그 구차한 것이 자못 많으나 그 자격은 장차 독립전쟁의 지휘관이라.이렇게 지내는 것은 소년병학도의 생활이요, 이렇게 견디는 것은 소년병학도의 참는 힘이요, 또 이렇게 살고 참는 것은 소년병학도의 풍속이라...(하략) "소년병학교의 영어이름은 'Young Koreans' Military School'이었다. 다시 번역하면 '한인청년 군사학교'가 된다. 소년병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들은 다양했다. 과목수가 무려 10개나 됐다. 한글은 물론 영어, 중국어, 일어까지 가르쳤다.
한글은 김현구와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같이 탔던 홍승국이 담당했다. 문법과 작문을 가르쳤으며 어린 나이에 건너 온 생도들이 부모에게 편지 쓰는 법까지 배우게 했다.
중국어 시간에는 한문을 가르쳤는데 슈피리어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던 한학자 박장순이 와서 가르쳤다. 그는 중국 고전인 사서(四書)를 번역한 실력가였다. 역사시간에는 구한말 군인이었던 이종철이 교사로 조선역사, 미국역사, 그리고 열국혁명전사(列國革命戰史)를 가르쳤다. 조선역사를 가르침으로 조선의 얼을 찾게 하고 미국역사를 가르침으로 조국의 미래상을 그려보게 하며 또 열국의 혁명전사를 배움으로서 독립전사의 갈 길을 가늠케 했다.
지리(地理)는 정희원이 맡아 만국지리, 조선지리, 군용지리를 세분해서 가르쳤고 과학은 이용규가 교사로 식물, 동물, 물리, 화학을 가르쳤다. 수학은 한때 <신한민보>의 주필이었고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지낸 백일규가 대수와 기하를 교수했다. 성경도 과목의 하나였는데 로이스 목사가 구약과 신약을 가르쳤다.
군사학은 이종철과 정희원이 담당했다. 훈련과 학술로 구분해서 가르쳤다. 훈련에는 도수훈련, 집총훈련, 소·중대 전투훈련, 야전실습, 사격연습이 있었다. 학술에는 보병훈련, 군대내무수칙, 군대예절, 군인위생, 군법, 명장전법(名將戰法)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