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열식에 도열해 있는 국민군단원들
독립기념관
무엇보다 일본의 압력 때문이었다. 당시는 1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미국과 일본은 동맹관계였다. 1915년 여름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은 미 국무부에 항의했다. 한인들의 군사훈련을 허용하는 것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적대감의 표시라는 거였다.
국무부는 내무부에 통고했다. 내무부 장관 로버트 랜싱은 핑크햄 하와이 주지사에게 조치를 취하라고 했고 그 결과 국민군단은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이런저런 외부 여건들도 나빴다. 파인애플 농장의 불경기와 흉작으로 수입이 크게 준 것도 군단 유지에 어려움이 됐다. 1915년 초부터 벌어진 이승만 추종자들에 의한 동포사회의 분열은 국민군단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점점 갉아 내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국민회 하와이 총회 대의원이었던 29세의 정두옥씨는 후에 쓴 '재미한족독립운동실기(實記)'에 이렇게 적었다.
"국민군 사관학교도 시기에 피해가 되어서 더 진보할 수 없이 되었다. 당시에 학도들이 헤어질 때에 서로 붙들고 대성통곡으로 이산되었다. 그러고도 남아 있는 학생이 수십 명이라 정두옥씨의 교섭으로 외이엘루아 사탕농장에 옮겨 두었다가 다시 태병선씨가 카후쿠 농장에 교섭하여 그곳으로 가서 있다가 차차 파산되고 말았다."1916년 박용만은 그들 중 상당수를 하와이 군사령부와 교섭하여 미군의 각종 사업에 취역시켰다. 그 동안 파인애플 경작과 특연으로 얻은 재정수입은 78,642 달러나 됐다. 2년 동안의 군단경비로 지출한 금액은 5만 8442달러, 잔금은 2만 200달러였다. 이 잔금은 만주와 러시아에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으로 적립했다.
국민군단이 폐쇄된 다음에도 노백린은 박용만과 행동을 같이 했다. 무엇보다 둘 다 '무력항쟁'이라는 노선이 같았기 때문이다.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두 사람은 독립운동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3월 3일 '대조선독립단'을 조직했다. 350명이 단원으로 참가했다. 기관지로 <태평양시사> 주간지를 발간했다. 이 신문은 박용만의 주도로 3개월 전부터 발간되고 있었으며 노백린이 사장과 주필을 맡았다.
1919년 9월 상해임시 정부가 이승만을 대통령, 노백린을 군무총장, 박용만을 외무총장으로 임명하자 노백린은 당시 워싱턴의 구미위원부에 가 있는 이승만을 만나기 위해 워싱턴으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