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국회 예산안 처리 파동 현장의 화제 중의 하나는 한나라당 보좌진들의 '전투력 상승'이었다. 여당 내에서조차 "한나라당 맞나, 어쩌면 그리 잘 싸웠냐?"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다. '날치기 예산 통과'라는 민심과는 배치되는 반응이다.
한나라당과 야당(민주당+민주노동당+창조한국당+진보신당) 의원 비율이 약 2대 1이기 때문에 의사당 내에서 싸움이 붙으면 야당 의원들은 중과부적이었다. '야당 연합군'이 7일 밤 본회의장으로 통하는 로텐더홀을 선점한 이유도 여당 의원들을 임시국회 마지막 날(9일)까지 본회의장에 들여보내지 않으면 '승산'이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야당 보좌진들의 입에서는 "13일도 버텼는데 3일이 대수냐"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왔다. 2008년 크리스마스부터 이듬해 1월 6일까지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처리 시도에 맞서 국회 경위와 한나라당 보좌진 연합군을 물리치며 로텐더홀 농성을 승리로 이끈 경험을 이른 말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예측은 한나라당 측의 심야 기습에 여지없이 허물어졌다. 야당 보좌진들이 '전방 경계'에 신경을 쏟는 사이에 한나라당 보좌진들은 뒤편의 국회 부의장실 통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부의장실에서 본회의장으로 통하는 입구로 소속 의원들을 들여보냈다. 뒤늦게 첩보를 들은 야당 보좌진들이 '부의장실 루트'를 탈환했지만 이미 여당의원 100여 명이 장내로 진입한 상태였다.
한나라당 측은 8일 '결전'에서 정공법을 주저하지 않았다. 200여 명 안팎의 한나라당 보좌진들이 여당 의원들을 둘러싼 채 야당 보좌진들을 수차례 몸으로 돌파하며 본회의장 출입구로 '구겨 넣는' 작전이 주효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을 누릴 겨를도 없이 한나라당 보좌진들은 야당 측과 함께 '폭력국회의 돌격대'라는 멍에를 뒤집어쓰게 됐다. 똑같이 '싸움패'라고 야단맞으면서도 여당 보좌진에게 '의원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다', '밥줄 안 끊기려고 오버한다'는 식의 원색적 비난이 더 많이 쏟아졌다.
현행 법령상 국회의원 한 명이 둘 수 있는 보좌진의 수는 9명(인턴 2명 포함). 원래 8명이었지만, 3월 22일 국회의원 수당법이 개정되며 5급 대우의 비서관이 1명 늘어났다. 9급 비서의 월 급여는 200만원 선이지만, 4급 보좌관 2명은 월 500만원 이상이다.
모시는 의원이 낙선하거나 의원의 눈 밖에 나는 일만 없으면 비교적 안정된 직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들은 "국회의원이 시켜서 몸싸움했다"는 지적에 펄쩍 뛰는 모습이다.
영남 지역 여당 재선의원의 한 보좌관은 "7~8일 충돌 와중에 원내대표실로부터 '의원실 별로 보좌진 2명씩만 와 달라'는 문자 메시지가 여러 차례 왔지만, 나는 지역구에 돌릴 의정보고서를 다듬느라 정신이 없었다"며 "의원도 '알아서들 하라'며 특별한 말이 없었다"고 전했다.
"여당 보좌진들이 야당에 비해 몸싸움에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라는 인식은 2000년 총선 즈음부터 정치권에 퍼지기 시작했다. 1980~1990년대 학생운동·재야운동 세력이 2000년 총선에서 국회에 대거 진출하면서 운동권 경력자들도 야당의원 보좌진으로 많이 채용됐는데, 이때부터 "야당 보좌진은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터라 매사에 전투적이고, 여당 보좌진은 '범생'들이 많아 몸싸움이 뭔지도 모른다"는 고정관념이 생겨났다는 얘기다.
그러나 12월 예산국회에서는 기존의 통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한나라당 보좌진들이 특별한 지시 없이도 뭉쳐서 힘으로 밀어붙이는 통에 민주당 보좌진의 방어막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동안 야당의 기세에 눌려왔던 한나라당 보좌진들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평가다.
학생운동 퇴조기부터 대학을 다녔던 보좌진들이 국회에 유입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한나라당과 동일시하는 '새로운 세대'가 출현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이 기세대로라면 한미FTA 비준 표결을 밀어붙여도 밀리지 않을 것같다"고 말했다.
양측의 감정이 격화되며 "보좌진은 상대당 의원들과 '맞짱'을 뜨지 않는다"는 불문율도 깨졌다. 여야 의원 양쪽으로부터 "(상대당으로 추정되는) 익명의 보좌진들로부터 반말과 욕설을 들었다"는 항의가 나왔다.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는 야당 보좌진들로부터 '보온병'이라는 놀림을 당했고, 한나라당 보좌진들은 민주당 손학규 대표의 면전에 '좌빨'이라는 야유를 퍼부었다.
소속당파의 이해 앞에서는 학연도 소용없었다.
지난 3일 저녁 국회 인근에서 고려대 출신 보좌진들의 송년회가 열렸는데, 당시 참석자의 절반 가량이 6~7일 난투극 현장에서 다시 만났다는 후문이다. 당시 참석자들의 입에서는 "송년회 날짜를 예산국회 이후로 늦춰 잡았면 참으로 어색한 자리가 될 뻔 했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 대학 출신의 한 보좌관은 "한나라당 보좌진들은 야당 시절에만 해도 민주당 출신들에게 기를 못 폈다"며 "양당 보좌진들이 자꾸 부딪히면서 감정이 쌓이는 것 같다"고 근심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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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생' 소리 듣던 여당 보좌관들, 무섭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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