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에 웬 아귀탕?"

하느님 선물인지, 아내 선물인지 헷갈려

등록 2010.12.25 17:11수정 2010.12.25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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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크리스마스' 이브는, 아기예수를 찾아온 동방박사 얘기를 들으려고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 무릎 앞으로 바짝 다가앉던 코흘리개 시절을 여행하면서 조용히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23일 24일 연속 '나이트(밤 근무)'였기 때문이었지요.

 

매일 3교대를 하는 아내는 연속 '나이트'를 하거나 '데이(낮 근무)' 일 때는 전날 집으로 퇴근하지 않고 병원 기숙에서 보냅니다. 집까지 승용차로 40분 거리이니까, 무리를 피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래서 한 달에 보름 남짓은 홀아비 아닌 홀아비로 보내게 됩니다.

 

어제(24일) 오후였습니다. 컴퓨터를 하다가 눈이 피곤하면 잠시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며칠 후 다가올 일들을 준비하고 계획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책을 보다가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손전화가 울리기에 들여다보니까 아내 이름이 떠있더군요.

 

"난디, 어쩐 일여?" (부드럽게)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잖아요. 그래서 함께 저녁이라도 먹으려고 지금 병원에서 출발했으니까 옷 입고 준비하고 있어요."  

 

"교회도 제대로 나가지 않음서 무슨 크리스마스 이브를 찾냐고. 아쉬울 때만 찾는다고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네."

"아이 그러지 말고 준비하세요.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그냥 말순 없잖아요. 날이 무척 추우니까 뜨끈뜨끈한 국물도 마실 수 있는 아귀탕 한 그릇씩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저녁은 내가 살게요."

 

"아니, 크리스마스 이브에 웬 아귀탕여? 하긴, 자기가 얘기하니까 나도 한 그릇 생각나네, 그러면 오랜만에 째보선창 '아복집'에 가서 먹자고."

"그래요. 30분쯤 있으면 집에 도착할 것 같으니까 준비하고 있다가 전화 하면 곧바로 나오세요."

 

a  생미나리가 듬뿍 들어간 아귀탕, 상큼한 미나리향과 구수한 맛이 어우러지는 아귀탕은 보는 것만으로 포만감을 느낍니다.

생미나리가 듬뿍 들어간 아귀탕, 상큼한 미나리향과 구수한 맛이 어우러지는 아귀탕은 보는 것만으로 포만감을 느낍니다. ⓒ 조종안

생미나리가 듬뿍 들어간 아귀탕, 상큼한 미나리향과 구수한 맛이 어우러지는 아귀탕은 보는 것만으로 포만감을 느낍니다. ⓒ 조종안
전화로는 "웬 아귀탕?"이냐고 따지듯 물었지만, 한참 전부터 먹고 싶었던 음식을 챙겨주는 아내가 고마웠습니다. 속으로는 좋으면서도 데퉁스럽게 표현했던 것이지요. 아내도 이해해 줄 것으로 믿습니다.

 

아내와는 지난 9월 30일부터 11월 29일까지 말문이 막혀 있었습니다. 요즘 남북관계처럼 대화가 단절되었던 것이지요. 폭언과 폭력이 동반되지 않았다는 점이 위태위태한 남북관계와 다른 점일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피해가 돌아오는 전쟁, 즉 폭력은 사리를 분별 못 하는 무식쟁이들이나 하는 짓이니까요. 

 

아내가 말실수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으면 마음을 바꾸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언제쯤 한번 놀러 오지 않겠느냐?"고 묻는 장모님과 돌아가신 어머니의 현몽에 힘입어 두 달 만에 말문이 트였고, 지금까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내년 2월 20일이면 아내와 결혼한 지 29년이 됩니다. 몸과 마음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퇴적물들이 놀랍기만 한데요. "우리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시간이 30년이 더 되겠느냐?"는 아내의 물음 아닌 물음을 거울삼아 조금 더 따뜻하고 살갑게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30대 때는 티격태격하기 일쑤였고, 40대 때는 다투면서도 조금은 인내심을 발휘했으며, 지천명을 넘기면서는 다퉈서 이득 될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되도록 양보를 하는데요. 두 달이나 말문이 막혀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결혼해서 가장 길었던 '대화의 단절'이었거든요.

 

조금 있으니까 아내가 도착해서 함께 시내로 나갔는데요. 집에서 째보선창까지는 20분 정도 소요됩니다. 복개공사로 육지가 된 지 30년이 넘었고 뱃사람들의 고함소리와 철공소의 망치 소리는 사라졌지만, 비릿한 갯내음은 지금도 짙게 풍기고 있어서 갈 때마다 50년 지기처럼 반갑게 느껴집니다. 제가 자란 동네거든요.

 

도착하니까 어두워지기 시작했는데요. 식당에 들어서니까 뜨겁게 달아오른 연탄난로가 반갑게 맞아주었고, 주방에서 새어나오는 구수한 탕국 냄새는 코끝을 훔치고 달아났습니다. 출출한데다 날씨까지 추우니까 양념 고추장 냄새가 더욱 진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내와 상의 후 복어탕 한 그릇과 아귀탕 한 그릇을 주문했습니다. 그렇게 따로따로 주문하는 걸 저는 '실속형 주문'이라고 말합니다. 중국집에 가면 자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망설이게 되는데요. 아귀탕과 복어탕도 무엇을 먹을지 망설여질 때가 종종 있거든요. 해서 가까운 두 사람이 갔을 때는 한 그릇씩 주문해서 두 가지 맛을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귀탕, 하느님 선물인지 아내 선물인지 헷갈려

 

a  밥과 함께 차려나온 복어탕, 아내는 복어탕, 저는 아귀탕을 시켜서 사이좋게 나눠먹었습니다.

밥과 함께 차려나온 복어탕, 아내는 복어탕, 저는 아귀탕을 시켜서 사이좋게 나눠먹었습니다. ⓒ 조종안

밥과 함께 차려나온 복어탕, 아내는 복어탕, 저는 아귀탕을 시켜서 사이좋게 나눠먹었습니다. ⓒ 조종안

a  졸깃하면서 고소한 맛이 일품인 삶은 조개.

졸깃하면서 고소한 맛이 일품인 삶은 조개. ⓒ 조종안

졸깃하면서 고소한 맛이 일품인 삶은 조개. ⓒ 조종안

곧바로 상이 차려졌고 주문한 음식이 나왔습니다. 생미나리가 듬뿍 들어간 아귀탕은 보기만 해도 포만감을 느끼는데요. 싱그럽고 상큼한 생미나리 향은 초장에 찍어 먹는 살코기 맛과 함께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생기를 북돋워주었습니다.   

 

아귀탕이나 복어탕 국물은 언제 먹어도 시원하고 깊은 맛이 나면서 개운합니다. 고소하기가 그만이지요. 입에서 살살 녹는 생굴 무침과 고소한 맛이 일품인 삶은 조개가 입맛을 더욱 돋우었는데요. 날씨가 추워서인지 "어, 개운하다!" 소리를 몇 차례나 반복했습니다.

 

아내도 얼큰한 국물을 후룩후룩 들이키면서 그릇을 저보다 먼저 비웠는데요. 평소에도 누님들에게 "저 사람은 먹는 데 복이 들었다니까"소리를 들을 정도로 아내는 음식을 복스럽게 먹습니다. 옆 사람이 식욕을 느낄 정도이니까요.

 

a  아귀탕에서 건져낸 뼈와 살코기, 지느러미. 아귀탕은 고기를 먼저 초장에 찍어먹고, 뼈를 발라먹은 뒤 국물에 밥을 말아먹습니다

아귀탕에서 건져낸 뼈와 살코기, 지느러미. 아귀탕은 고기를 먼저 초장에 찍어먹고, 뼈를 발라먹은 뒤 국물에 밥을 말아먹습니다 ⓒ 조종안

아귀탕에서 건져낸 뼈와 살코기, 지느러미. 아귀탕은 고기를 먼저 초장에 찍어먹고, 뼈를 발라먹은 뒤 국물에 밥을 말아먹습니다 ⓒ 조종안

a  미식가들이 즐겨 찾는 아귀 지느러미(날감지), 껍질과 뼈가 부드럽게 씹히는 느낌은 고소한 맛이 더해지면서 먹는 즐거움을 극에 달하게 합니다.

미식가들이 즐겨 찾는 아귀 지느러미(날감지), 껍질과 뼈가 부드럽게 씹히는 느낌은 고소한 맛이 더해지면서 먹는 즐거움을 극에 달하게 합니다. ⓒ 조종안

미식가들이 즐겨 찾는 아귀 지느러미(날감지), 껍질과 뼈가 부드럽게 씹히는 느낌은 고소한 맛이 더해지면서 먹는 즐거움을 극에 달하게 합니다. ⓒ 조종안

아귀는 초장에 찍어먹는 살코기도 맛있지만,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일품인 지느러미(날감지)와 쫀득쫀득한 내장(암뽕), 흉물스러운 악어 입을 연상시키는 뼈를 발라먹는 재미도 쏠쏠한데요. 먹는 행복을 느끼면서 서비스로 나온 '복껍질무침' 등 밑반찬 그릇까지 모두 비웠습니다. 

 

아귀탕을 맛있게 먹고 식당에서 나오니까 째보선창 특유의 찬바람이 귓불을 때렸습니다. 무척 차갑더군요. 그래도 뜨끈뜨끈한 국물을 마셔서인지 뱃속은 든든했습니다. 밤 11시에 근무 들어가면서 저녁을 사주러 달려온 아내가 고맙더군요. 저녁을 사고도 만족스러워하는 아내에게 "고마워, 잘 먹었네!"라고 인사했는데요. 속말로 해서 듣지는 못했을 겁니다.

 

아내는 집에 들르지도 않고 출근했는데요. 맛있게 먹은 아귀탕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게 있습니다. 아내가 사주긴 했지만, 성탄절을 맞아 하느님이 주신 선물인지, 아내의 선물인지 헷갈리거든요. 아무튼 오늘은 성탄절,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12.25 17:11ⓒ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아내 #크리스마스 #아귀탕 #복어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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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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