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오빠는 영웅이야기에 홀려버렸어"

[리뷰] 미야베 미유키 <영웅의 서>

등록 2010.12.26 11:20수정 2010.12.26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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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서> 겉표지 ⓒ 김준희

▲ <영웅의 서> 겉표지 ⓒ 김준희

'영웅'이 있기 이전에 '영웅에 관한 이야기'가 먼저 있었다. 그후에 세상에서 훌륭한 일, 위대한 일을 해낸 사람이 영웅이라 불리며 다시 그에 관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영웅이 많을수록 그에 관한 이야기도 늘어난다. 인간의 역사가 오랫동안 이어지며 수많은, 갖가지 종류의 영웅이 탄생했고 그 위대한 업적이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그런 이야기들이 전승되면서 원본인 '영웅에 관한 이야기'는 점점 더 힘을 키워갈 수 있다.

 

문제는 영웅의 이야기가 항상 밝고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름답고 존귀한 이야기가 빛을 발하면, 거기에는 마찬가지로 짙은 그림자도 생긴다.

 

한 사물의 앞과 뒤다. 정의와 불의, 빛과 그림자는 항상 짝을 지어 존재한다. 누구도 그것을 나눌 수 없다. 빛이 강해지면 그것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도 그만큼 짙어지는 법이니까.

 

영웅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이 사람에게 악영향을 미치면 얌전하던 사람이 살인마로 돌변할지 모른다. 미야베 미유키의 2009년 작품 <영웅의 서>에 등장하는 학생이 그렇게 변해버린다.

 

모범생에서 살인자로 돌변한 소년

 

초등학교 5학년인 유리코는 어느날 학교에서 수업을 받던 도중에 집에서 연락이 와서 일찍 귀가한다. 집에서 유리코를 기다리고 있던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다. 유리코의 오빠인, 중학교 2학년인 히로키가 학교에서 동급생 두 명을 칼로 찌르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피해학생 중에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다른 한 명은 중태다.

 

이날 이후로 유리코 가정의 생활은 지옥으로 변해 버린다. 도망친 히로키의 행방은 어디에서도 알 수 없고, 경찰과 매스컴 관계자들은 끊임없이 집으로 찾아와서 이것저것 캐묻는다. 살인자의 동생이라는 사실 때문에 유리코는 학교에서 '왕따'처럼 돼 버린다. 결국 유리코는 등교를 포기한 채 집에서 지내는 신세가 된다.

 

사라진 오빠에 대한 단서를 찾고자 오빠의 방을 들락거리던 유리코에게, 한 권의 책이 말을 걸어온다. 책이 말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겁이 나고 혼란스럽지만, 유리코는 그 책으로부터 오빠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히로키는 영웅에게 홀려서 잔인한 짓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을 조종해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 영웅의 본성이니까, 히로키도 그 희생물이 되었다고 책은 말한다.

 

유리코는 점점 더 혼란스럽기만 하다. 자신이 아는 영웅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존재가 아닌데. 오히려 세상의 분란을 끝내는 것이 영웅이 해야 할 일 아닌가. 책은 여기에 대해서도 대답해 준다. 시작과 끝은 같은 법이야, 머리와 꼬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는 둘째치고, 유리코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오빠를 구하는 것이다. 살인죄로 법정에 서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튼 오빠를 찾아야 한다. 책은 히로키가 영웅에게 홀려서 다른 세계인 '이름 없는 땅'으로 넘어갔다고 말한다. 유리코가 그곳으로 갈 수는 있지만 영웅에게 홀린 오빠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때부터 유리코의 모험이 시작된다. 유리코는 '이름 없는 땅'과 현실의 세계를 오가면서 오빠의 흔적을 추적한다. 오빠를 만나더라도 그리고 다시 현실세계로 데리고 돌아오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히로키가 살인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유리코의 여행은 어떻게 결말이 날까?

 

이야기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모험

 

유리코가 떠나는 '이름 없는 땅'은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곳이다. 러브스토리이건 추리소설이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이야기는 그곳에서 태어난다. 영웅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다면 영웅의 이야기는 스스로 에너지를 얻어서 점점 더 커져간다는 점이다. 유리코의 오빠는 그렇게 뻗어나간 이야기의 영향을 받아서 변해 버린 것이다.

 

'이름 없는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끊임 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들은 뭔가 죄를 짓고 이 땅에 유배된 채로 이야기를 만들고 수명이 다 된 이야기를 회수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야기는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죄악이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작가는 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인 셈이다.

 

그래서 이들은 죄를 씻기 위해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내보내는 이야기가 많은 행복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주기를 바라고, 회수되는 이야기가 역할을 다한 채로 안녕을 얻기를 바란다. 이야기가 아무리 거짓말이더라도, 그런 거짓말이 없으면 인간은 살지 못한다. 이야기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거짓말이다.

 

선한 학생이 살인자로 돌변한다는 설정이 다소 극단적이지만, 모든 이야기는 그것을 접하는 사람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좋은 쪽으로건 나쁜 쪽으로건. 그것이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덧붙이는 글 | <영웅의 서> 1, 2. 미야베 미유키 지음 / 김은모 옮김. 문학동네 펴냄.

2010.12.26 11:20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영웅의 서> 1, 2. 미야베 미유키 지음 / 김은모 옮김. 문학동네 펴냄.

영웅의 서 1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문학동네, 2010


#영웅의 서 #미야베 미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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