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위층과 친분을 쌓는 한인들

박용만과 그의 시대 62

등록 2011.01.21 14:57수정 2011.01.2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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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a  1911년 10월 10일 호북성 무창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 중화민국의 태동이 시작됐다.

1911년 10월 10일 호북성 무창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 중화민국의 태동이 시작됐다. ⓒ 미상(저작권해제)


"쿵 쿵" 대포 소리와 함께 신해혁명의 막이 올랐다. 1911년 10월 10일 밤 호북성 무창에서였다. 혁명군은 총독 관저를 향해 산에서 대포를 발사했다. 벌써부터 손문의 혁명이념에 물든 병사들이었다. 총독은 도망쳤고 청제국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동양 최초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서는, 그야말로 천지개벽의 사변이었다.

그때 박용만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고 있었다. 소식을 접하자마자 가슴의 격동을 참을 수 없었다. 1주일 만에 사설을 썼다. 10월 18일자 '신한민보'의 사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청천백일에 졸연히 벽력이 떨어지며 오천년 늙은 사자가 비로소 잠을 깨여 거대한 머리를 흔들고 웅장한 소리를 지름이 천지가 무너지는 듯 산천이 움직이는 듯 귀신이 놀래고 금수가 겁내어 혹은 꼬리를 깊이 끼고 위엄을 두려워하며 혹은 눈을 넓게 뜨고 정신을 잃으니 이때를 당하여 사람인들 어찌 놀래지 않으며 겁내지 않으며 또한 위엄을 두려워하고 정신이 황홀치 않으리오.

오천년 노대한 중원이 금수의 마당이 된 것을 슬퍼하시고 사만만 신성한 황종이 이적의 어육이 된 것을 상전이 불쌍히 여기사 이에 자유의 바람을 보내고 평등의 조수를 인도하여 오늘날 혁명의 큰 풍파를 일으키매 이는 참 잠자던 사자가 꿈을 깨여 동양 바람과 서양 비에 한번 큰 소리를 치는 것이라.


누가 과연 그 소리를 반갑게 여기며 그 위엄을 꺼리지 아니 하리오. 하물며 쥐 같은 일본은 일찍이 사자머리에 마당을 닦고 사자의 코를 때때로 건드려 거대한 물건의 노기를 돋우었고 또 까마귀와 까치와 독수리 같은 서양 각국들은 만일 사자가 한번 일어나면 혹 자기들에게 화가 돌아올까 하여 때때로 쉬지 않고 지저귀던 끝이라. ---"            

a  오패부(1874-1939)

오패부(1874-1939) ⓒ 미상(저작권해제)

그러나 잠을 깬 사자가 웅장한 소리를 질렀지만 중국 대륙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군벌들 때문이었다. 1912년 2월 청제국이 무너지자 몇 군벌들이 지방별로 통치권을 장악했다. 거대 군벌로는 안휘(安徽)파, 직예(直隸)파, 봉천(奉天)파가 있었는데, 천하를 통째로 차지하기 위해 이따금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봉천파는 만주를 기반으로 한 군벌로서 장작림과 그의 아들 장학량이 이끌었다. 장작림은 북경을 장악한 직예파와 두 번이나 전쟁을 벌였다. 한때 북경을 점령했으나 장개석의 북벌군에 밀려 만주로 밀려났다.

직예파는 북경에 기반을 두었으며 북벌군과의 협상을 선호했다. 직예파를 이끈 인물들로는 풍국장(馮國璋), 조곤(曹琨), 오패부(吳佩孚), 풍옥상(馮玉祥) 등이 있었다.

a  풍옥상(1882-1948)

풍옥상(1882-1948) ⓒ 미상(저작권해제)

봉천파뿐 만 아니라 다른 군벌들도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만주에 진출한 일본군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봉천파와 직예파가 부딪친 1922년 제1차 봉직전쟁 당시 봉천군벌 장작림은 22만의 병력을 동원했다. 2년 후 제2차 봉직전쟁 때는 17만을 동원했고, 직예파는 25만의 병력으로 맞섰다. 이때 한인 비행사 서왈보는 풍옥상의 항공대 대대장으로 소절(蘇浙)전투에서 20여 차례나 출격해 무공을 세웠다.  

서왈보는 1886년 원산에서 태어났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해 1915년 가을까지 독립운동을 했다. 그러나 그 독립운동이 실은 마적단으로 활동하는 거였다.

마적단은 중국인들만이 하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꼭 말을 타고 떼를 지어 노략질하는 것만도 아니었다. 당시 만주에는 일본인이 하는 마적단이 100여 개나 됐다. 그 중 제일 큰 마적단은 졸개들만 3백 명. 유흥업과 매춘업 등을 하면서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마적단이 아니라 아예 조폭집단이 아닌가.

a  한국 최초의 비행기 조종사 서왈보. 중앙은 한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 권기옥

한국 최초의 비행기 조종사 서왈보. 중앙은 한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 권기옥 ⓒ 독립기념관


서왈보는 독립운동가 유동열과 함께 모두 17 명의 마적단을 꾸렸다. 이어 장춘에 있는 일본인 도박장을 기습했다. 마적단이 마적단을 턴 것이다. 막대한 돈을 쓸어 담았다. 그러나 그 짓을 오래 못한 건 일본군이 만주에 밀려들어 왔기 때문이다.

북경으로 돌아온 서왈보는 바오딩(保定) 군관학교에 들어갔다. 6개월 교육의 속성 사관학교였다. 졸업 후 소위로 임관됐고 풍옥상 장군 휘하에 배치됐다. 서왈보는 풍옥상의 눈에 들었다. 단기간에 소령까지 진급됐다.

그는 풍옥상에게 항공대의 창설을 건의했다. 그리고 자신이 남원항공학교에 들어가 1년 만에 졸업했다. 그게 1920년 5월 30일 그의 나이 34세 때였다.  

두 번이나 만주로 쫓겨 간 장작림이 다시 북경을 공격한 건 1926년 5월. 만리장성 일대는 10만 대군으로 휘덮였다. 풍옥상의 항공대는 그때 10대의 비행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료도 부족했고 포탄도 없었다. 서왈보는 단독 출전했다. 술병에 화약을 넣고 심지를 박은 사제 폭탄을 싣고 출격한 것이다. 저공으로 날며 기총소사를 했다. 그러나 적군도 응사했다. 그 총탄을 맞고 추락했다.

a  장작림(1873-1928)

장작림(1873-1928) ⓒ 미상(저작권해제)

장작림은 서왈보를 회유하려 했다. "나는 풍옥상 부대의 대령이외다. 덕장은 적장을 조롱하지 않는 법. 어서 조용히 죽이시오." 서왈보가 굽히지 않자 장작림은 그를 풀어줬다.

북경으로 돌아와 보니 풍옥상 군대는 장가구 지역으로 쫓겨나 있었다. 항공대의 비행기 10대는 버려둔 채였다. 서왈보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장가구의 임시비행장으로 날아갔다. 내려서는 자동차를 타고 다시 와서 두 번째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리고 또 날아갔다. 그런 식으로 그는 비행기 10대를 모두 이동시켰다.

1926년 6월 초 풍옥상이 주문한 이태리제 비행기 10대가 장가구에 도착했다. 당시로는 최신예 단엽기였다. 6월 20일 시험비행을 실시했다. 일대는 구경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서왈보의 가족, 유동열과 그의 가족, 한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 권기옥, 그리고 풍옥상의 부인 리더취안도 구경하러 나왔다.

"2번 기는 제가 탈게요. 서 대령님은 좀 쉬시고요."

권기옥이 자원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다.

"3번 기까지 내가 테스트를 해 봐야지. 4번 기부터 권 소위가 하도록 해."

3번째 비행기를 몰고 올라간 서왈보는 급상승과 급강하를 시험하는 곡예비행을 시작했다. 급강하 차례였다. 지켜보던 권기옥이 아, 아, 하는 순간 비행기의 고도가 여지없이 낮아지는 것 아닌가. 미처 기수를 돌리지 못한 채 그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서왈보의 가족, 풍옥상의 아내 리더취안, 유동열과 그의 아내 그리고 권기옥이 통곡하는 가운데 항공대 대원들은 산산조각이 난 그의 시신을 수습했다.        
 
범재(凡齋) 김규흥 역시 누구보다 일찍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지사였다. 일찌감치 상해로 가 중국인들과 끈끈한 우정을 쌓았다. 그는 충북 옥천 사람으로 1872년생이다. 구한말 민영환과도 교분이 있었고 일본에 가 새로운 문물을 살피고 돌아와 고향에 사재로 학교를 설립했다.

알기 쉽게 그는 김현구의 사촌 형이었다. 김현구는 홍승국, 전명운 등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을 거쳐 대서양을 넘고 다시 미대륙을 횡단하여 덴버로 박용만을 찾아간 청년이었다. 박용만이 주선해서 헤이스팅스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소년병학교에서 훈련을 받았고 졸업 후에는 교관으로 봉사했다. 그는 일관되게 박용만을 지지한 사람이다

김규흥은 1908년 상해로 망명했는데 이것은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했던 신규식보다 3년이나 앞선 것이다.  1936년 천진에서 작고할 때까지 그는 독립운동에 일생 동안 투신했으며 김복(金復)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a  왼쪽부터 김규흥의 조카, 여운형, 김규흥, 진형명(중국인으로 무창봉기의 주역 중 한 사람), 포타프(러시아인)

왼쪽부터 김규흥의 조카, 여운형, 김규흥, 진형명(중국인으로 무창봉기의 주역 중 한 사람), 포타프(러시아인) ⓒ 독립기념관


1911년 1월서부터 약 6개월간 박용만이 네브래스카 대학을 휴학하고 대한인국민회에서 발간하는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아 일할 때였다. 김규흥은 그해 3월 7일 대한인국민회에 편지를 보냄으로써 박용만과 연결이 이뤄졌다.

"(전략) 그 후 다시 하나의 개간공사(開墾公司)를 설립하고 자금을 모집하여 만주에 떠도는 한국 동포를 만주 또는 몽고 등 넓은 땅에 각각 안전하게 정착하도록 하는데 명목은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으로 하나 이는 왜적의 의심을 피하자는 것이요 실제로는 둔전병제도를 시행해서 기회가 오는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후략)"

둔전제를 통해 장기적으로 군사력을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의 포부를 적은 것이었다. 그의 포부는 박용만이 이미 1년 반 전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워 농사와 군사훈련을 겸하게 했던 발상과 일치했다. 또한 같은 시기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에서도 연해주에 농지를 개간하고 독립운동 기지를 일궈내려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아시아 실업주식회사'를 세우고 당시의 북미지방총회장 정재관이 현지로 떠났다.

그때 미주에 와 있던 이상설도 동행했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인 항카호 남쪽 봉밀산에 토지를 구입해 한인 1백여 가구를 이주시켰다.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라고 할 수 있는 한흥동이 건설된 것이다. 그런걸 보면  '둔전제'를 통한 장기적인 무력배양은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공통된 꿈이었던 것이다.*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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