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희용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대표.
신용철
- 시민 모임이 2009년에 결성되었는데 어떻게 결성되었으며 2004년 교회 개척이후 시민모임 결성 전까지 무엇을 하셨는지요. "교회 개척을 한 이유가 교회 하나를 크게 키워보자 이런 것이 아니고 내가 고백하는 하나님 즉 사랑과 공의,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온전히 고백되어 지고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의 신앙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었던 거죠. 그러다보니까 교회 밖의 일 우리 조국의 일은 자연스럽게 내 신앙고백 안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광주의 시민단체와 교류를 하게 되었고 결국 광주 시민센터 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광주 시민센터는 광주 지역에 있는 회원들로 구성된 500명이 넘는 시민단체입니다. 이런 시민단체와 교류를 하면서 지역의 일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또 건강한 정치 후보들을 육성하고 정치현장에 나아가서 활동할 수 있는 정치운동들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죠. 그런 과정에서 시민센터 회원으로 있던 이국언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 시민모임 사무국장을 말입니다. 이때 이 사무국장의 고백이 참 독특했는데요.
그분이 당시 <오마이뉴스> 기자였습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취재하던 중에 할머니들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1년에 살아있다는 것을 생각을 딱 두 번 하는데, 하루는 삼일절이고 하루는 광복절이요"라고요. 할머니들은 기자들이 삼일절이 되면 찾아와 "할머니, 삼일절이 되었는데 어떤 생각이 드세요 물어보고는 그 외에는 사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죠. 이 기자가 그 말을 듣고 그것이 굉장히 가슴에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나라도 그런 기자가 돼서는 안 되겠다. 뭔가 이 문제는 지역의 의제로 삼고 운동을 해야 겠다. 그렇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거 아니에요. 당시 광주 시민센터 대표로 내가 있었고 개인의 사적인 일이나 진로 상담을 해 오는 관계에 있었어요. 그러면서 지역에 이런 문제가 있는데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일본 같이 다녀오자. 지역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그러면서 준비위원회가 꾸려지고 그 준비위원회가 꾸려지면서 1차 서명운동으로 28174명 동참하고 그런 서명 운동 한 것을 일본에 가서 미쓰비시에 전달하고 그리고 돌아와서 계속해서 근로정신대에 관한 강연회, 연구모임,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 이런 것들을 해 가면서 회원들을 단합 규합하게 되면서 2009년 3월 12일 결성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 이후 시민모임이 해 왔던 일들도 말씀해 주십시오. "시민모임 면면을 보면 모두들 다 직장인입니다. 그리고 주부들이구요. 아주 순수한 시민들입니다. 최근에 어떤 운동권 당에 있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시민모임 활동을 보면서 벤치마칭을 해야겠다. 왜냐하면 요즘 운동권이나 진보진영에서도 굉장히 서열화 되어 있고 공무원 세계처럼 딱딱하고 그렇다. 그런데 이 시민모임은 굉장히 활성화 되어 있고 사람냄새가 폴폴난다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광주라는 곳이 민주인권 평화의 도시이고 또 변혁운동의 삶을 살든 않든 간에 정의로와야 된다는 것이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근로정신대 이야기가 됐을 때, 그분들도 놀랐던 거죠. 사실 위안부는 알고 있었지만 근로정신대는 모르고 있었고 이 문제가 광주의 아픔 속에 있다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굉장히 사람들의 맘을 하나로 모아지게 했던 것 같습니다. 이후 모임체를 구성하고 나서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서명운동하고 일인시위였습니다. 먼저 서명운동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 10만운동을 하게 되었냐면 거기에는 분명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미쓰비시가 우리 민족 10만을 끌고 갔고, 두 번째는 이 미쓰비시는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역사의 영원한 미제로 묻혀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판단에 대해서 우리가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죠.
우리 청소년들이 이 사안을 알고 있다 하는 것을 서명을 통해 받아내서 그들에게 반드시 받아야 할 것을 받고 흐지부지하게 끝나지 않게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거리에서 할 때 서명을 2천명 넘게 하루에 받은 적도 있었어요. 보통 우리가 월~금요일까지는 일인시위하고 서명운동 하고 그랬었는데 초장기 때 서명운동을 할 때는 토요일에 500명 정도 됐었거든요. 그런데 제일 많이 받을 때는 날씨 따뜻할 때 증심사라는 곳에서 등산객들 상대로 2천명 가까이 받았어요. 그렇게 해서 13만 5천명을 넘어섰습니다.
그 13만 5천명 서명지를 쌓으면 키높이 정도까지 됩니다. 학생들 가운데 70프로가 광주 학생들이에요. 광주에서 웬만한 사람은 우리 시민모임을 거의 다 알고 있어요. 쉽게 하려고 학교를 택했던 것은 아니에요. 사실 학교를 택했다고 이렇게 서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전국적으로 따지고 보면 안 해준 학교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많은 학교들이 해 주었던 것은 미쓰비시에게 우리의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바람이 있었던 것이죠. 시민모임 회원 가운데 교장 선생님이 계셔서 찾아가기도 했어요. 그 다음에 광주시 교육감이 책임을 져 주셨어요 당시 교장 선생님이셨던 김선호 시 교육의원 서구 쪽을 맡고 장휘국 현 교육감은 동구 쪽을 맡아서 학교를 찾아가서 서명운동을 했죠.
다 다닌 것은 아니구요. 장휘국 교육감은 당선 되고 공백이 있어 일본에도 함께 갔다 왔어요. 청소년들로 하여금 굴절된 뒤틀려진 역사를 알리려는 측면과 미쓰비시에 가서 왜 10만명인지 미쓰비시 분명히 알리는 의미로 너희들 이 할머니들 역사에 묻혀 끝날 일이라고 흐지부지 하지 말아라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은 청소년들 서명을 받았다. 너희들이 끌고 갔던 아이들이 과거에 청소년들이었다. 지금 이 아이들 또래다. 이런 마음으로 작년 6월에 미쓰비시에 전달하고 내각부에 전달했어요. 왜 6월이냐면 주주총회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 결과 7월에 협의의 장을 만들겠다고 미쓰비스측으로부터 발표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가 일인시위인데요. 2009년 9월 25일, 광주 시의회 건너편에 미쓰비시 자동차 판매점이 오픈했었어요. 미쓰비시가 보상도 않고 차 팔겠다고 열었으니 할머니들 표현으로는 내 가슴에 두 번 못을 박는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저희는 10월 5일부터 즉각 일인시위를 했어요. 2010년 7월 31일까지 208일 동안을요. 평균 8~9명이 함께 섰고 모두 합해서 1900여명이 함께 했어요. 월~금까지 12시~1부터 일인시위를요. 말이 일인시위지 일인시위는 이틀정도고 어쩔 때는 30명 정도까지도 왔어요. 그래서 집회신고를 했어요. 피켓을 들고 매일했어요. 주말에는 서명운동을 하고요. 그러니까 미쓰비시도 집회신고를 하고 못하게 한 거예요. 위장 집회신고 규탄 기자 회견을 열기도 했지요. 결국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도 철수하게 됐습니다."
- 시민모임에서 208일간 일인시위하면서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은데요. "일인시위 하는 곳이 관공서 촌이라 주변에 가게가 없었어요. 그것을 알고 베지밀 등 음료수 사 오시는 시민 분들도 많았구요. 차 멈추고 고생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일인 시위 하는 과정에서 김마담이라는 분도 생겼어요. 그분이 바로 당시 효광중학교 교장 선생님이신 김선호 현 시 교육의원이시죠. 매일 일인시위를 할 때 그분은 추울 때는 따뜻한 차로 더울 때는 시원한 차를 가지고 오셨어요. 그래서 붙여준 이름이 김마담이에요. 회원들이 전국에 있는데 서울에 있는 한 회원은 할머니에게 추우실 것 같다며 목도리를 보내오시고 장갑을 소포로 보내준 분도 계시고 제가 보낸 커피를 타서 드십시오 라고 하면서 커피를 보낸 준 회원도 있으시고 편지 100여통이 왔는데요 편지에는 단풍잎을 말려서 보내 온 분들도 있고 원근각지 남녀노소 구분 없이 많이들 계셨어요. 이 일을 하며 YTN, MBC 방송 등을 몇 번 탄 적이 있어요. 2010년 1월에는 무려 다섯 번이나 기자회견을 했었구요. 서울을 두 번이나 세 번을 올라갔거든요. 외교통상부에 한번 일본 대사관에 한번요. 서울 삼성역 부근에 서울 미쓰비시 본사가 있어 일제 피해자들이 중심이 되어 매주 금요일에 몇 차례 갔었어요. 미쓰비시 본사가 묘하게도 포스코 맞은 편에 있어요. 포스코가 한일협정 그돈으로 세워진 곳 아닙니까. 외교통상부나 일본대사관 강남에 있는 미쓰비시 본사. 계속 해서 이렇게 투쟁활동들을 했던 것이 전국적으로 알려 지게 된 거죠. 저희들은 얼굴도 몰라요. 카페 회원들이 서명을 받아와 편지도 쓰고 꽃잎도 넣고 할머니 쓰시라고 목도리도 넣고 어떻게 보면 기획 연출이 아니고 자발적인 마음들이 모아지고 모아진 것이 시민모임의 큰 힘인 것 같습니다."
- 시민행동 활동과 관련해 세분화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 하실 것도 있는지요."일본에 갔다 온 얘기 좀 더 해 볼게요. 2010년 6월 미쓰비시 주주총회에 우리의 입장을 전하기 위해 시민모임 회원들이 8~9명, 당시 교육감 당선자, 시 교육의원, 변호사, 신부, 신문 방송 기자들 이렇게 약 30명가량 갑니다. 나고야 지원회 분들과 함께 미쓰비시 앞에서 선전전도 하고 시위도 했지요. 가지고 간 서명도 전달하고요. 이때 액션으로 삼보일배를 했습니다. 우리가 삼보일배에 대해 나고야 지원회에 알리자 그분들이 왜 피해국인 당신들이 미쓰비시 앞에서 절을 하느냐. 우리는 이해가 안 된다. 근데 우리는 해야되겠다. 왜 해야 하느냐? 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한 것을 모르는 것이 우리의 사죄다.
그런 것이 우리에게 있다. 미쓰비시가 밉지만 당신들의 미운 마음을 용서하려는 심정으로 한다. 우리의 눈물과 땀방울을 뿌리기 위해 한다. 그런 마음을 읽고 그분들이 거기에 박수를 치고 우리도 울고 그들도 울고 다들 울었어요.(이 부분에서 김 목사는 '아따 울컥해지네'라고 혼잣말로 전라도 사투리를 내뱉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거기 시나가에 역이 수많은 일본인들이 우리들을 보고서 놀랐어요. 처음 보는 광경이니까요. 이들도 왜 저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고 이런 것들이 진짜 일본의 잠자고 있는 양심들을 깨우고 있었던 것이었으리라 생각해요. 또 이미 깨어있는 양심들에게는 큰 힘을 준 것이죠. 이미 나고야 지원회는 24~5년 전부터 이 일을 했는데 이제야 물길을 파게 된 것이죠. 거기에 한국에서 결성된 시민모임이 결정적인 역할을 끼친 것에 그분들은 고마워하고 이런 활동들을 하고 저들도 알고 우리도 알고 하면서 연대가 아닌 동지가 된 것이죠.
그분들이 동지라고 고백하는 것 가운데는 이런 경우도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나고야 지원회 가운데 우리로 치자면 전교조 성향의 선생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자기 지역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가려는 가운데 조선여자근로정신대라는 것을 발견하게 됐던 겁니다. 그 나고야 지원회 분들 24년 전 사진을 보면은요 40대 아저씨인데 지금은 백발이에요. 그렇게 한국에서 메아리로 온 것도 없이 해오던 어느날 시민모임이 이런 굵직한 일을 보면서 해내니까 우리를 보면 반가워서 울고 기분 좋아서 팔딱팔딱 뛰고 합니다. 그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만 3년 동안 금요행동을 하는데 한번도 안 빠진 분도 있어요. 심지어 어떤 분은 자기 재킷에다 유서를 써 놓고 금요행동을 하는 분들도 있어요. 심장병을 앓고 있었거든요. 나는 누구다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써 놓고 시나가에 역에 있는 미쓰비시 본사에 오는 이들도 있었어요. 또 어떤 분은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니시는 분도 있었는데 그 분도 한 시간 동안 전단지를 나눠주고 시위를 했었어요. 그분들을 보면 숭고하신 분들이다 이렇게 밖에 표현이 안 됩니다. 그분들이 삼보일배 할 때 다들 울고 불고 함께 쩌렁쩌렁 구호도 외치고 언론사들도 와서 찍고 그랬지요."
- 미쓰비시와 협의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후원 문화의 밤을 하게 된 배경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본 협의를 시작했습니다. 이게 일본에서 최근 보내온 내용입니다. '나고야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할머니 지원단' 이것이 협상단 공식 명칭입니다. 시민모임 2명, 지원회 3명, 미쓰비시 5명, 통역 2명. 이렇게 해서 총 12명이 비공식적으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합당한 처우를 위해 협의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후원 문화의 밤을 하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예요. 시민모임 회원 분들을 다 한번 모아보는 자리가 뜻 깊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알아보니까 여기에 계신 분들이 상황극, 노래, 춤, 시 낭송 등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분들의 장기들을 한번 모아서 보여줄 수 있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있었고 두 번째로 지금 저희들이 협상을 진행하는 중에 자금이 필요합니다.
그동안에 이제 자금은 회비로 했지만 협상을 물질적으로 뒷바라지하기 위해서 후원 문화 행사를 하게 됐구요. 후원 문화 행사 때 10만 희망릴레이 선포하고 했던 것이죠. 10만 희망릴레이를 단적으로 말하자면 한 사람이 천원 후원하는 것을 오는 5월까지 10만명 조직하겠다. 왜 그것을 하느냐 우리가 이 운동을 집중적으로 해 내고 6월달 승리의 소식을 나고야 지원회 분들과 나누든 아니면 다시 미쓰비시를 향해서 투쟁의 열기를 높이든 이 후원금으로 계속 가야겠다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이 싸움 뿐만 아니라 후지꼬시 싸움 다른 풀리지 않는 과거사 싸움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대표로서 가지고 있는 저의 생각인데, 베트남에 우리가 가해자입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그 빚을 청산해야 되지 않겠나 거기까지 전망해 보는 거죠. 우리 시민모임 안에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기성세대가 됐을 때, 우리 시민모임이 우리 과거사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길게 보면서 지금은 협상 되지 않았지만 장차 이것은 아시아의 평화와 생명 평화의 세상을 일궈나가기 위한 것이죠. 저희들의 10만명 서명과 천원 후원금은 차원이 다를 거예요. 천원 후원에 대한 어려움이 있기에 여기에는 다양한 방식이 필요합니다. 개인이나 가정, 계모임, 술자리, 기관이나 단체 조직이 결합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겠다. 그래서 우리가 언론들을 통해서 이렇게 접촉하는 것도 우리들의 운동은 게을리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언론들의 기사를 통해 널리 알림으로서 많은 분들이 천원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들을 더 확장시켜 나가는 거죠.
광주에서 진보 기독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몰상식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집단이 지금 한국교회의 수준입니다. 나는 그 사람들 입장에 동의할 수 밖에 없어요. 그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목사님들도 있으니까 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그렇지 않은 목사도 있다는 그 말을 들을 때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기독교 진보 신문 <에큐메니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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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해방되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해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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