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처의 화장품을 사 주었습니다

등록 2011.02.08 19:05수정 2011.02.08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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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만으로도 족하다

 

저는 샴푸나 린스를 사용치 않습니다. 아마 지금 저의 머리숱을 보신 분들은 '그 머리에 샴푸 사용할 일이 어디 있을까'싶겠지만 제가 치렁치렁한 흑발일 때도 비누만으로 족했습니다.

 

비누 한 가지만으로도 청결을 유지하는데 아무 불편이나 이상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샴푸나 린스가 환경에 부담을 준다는 점도 비누만을 사용하는 좋은 위안이 됩니다.

 

로션이나 크림을 사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피부에 보습을 준다고 딱히 제 인생에 더 좋아질 것이 무엇인가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의 처가 화장품을 사용치 않는 것에 한 번도 주목을 하지 못했습니다. 25년 전, 결혼식 이후에 저의 처가 언제 화장을 했었는지도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아마 결혼식 때 신부화장이라는 것을 했었고 신혼여행에서 화장을 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신혼 초 특별한 날에 잠깐 화장을 했던 일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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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를 낳은 22년 전쯤의 처 ⓒ 이안수

둘째를 낳은 22년 전쯤의 처 ⓒ 이안수
 

넉넉하게 20만 원을 보냈습니다

 

유난히 추운 올겨울 들어 처는 두어 번 얼굴이 당긴다는 소리를 혼잣말처럼 했었습니다. 저는 나이가 드니 당연한 것으로 치부했습니다.

 

명절 연휴에 큰동서댁에 다녀온 처가 말했습니다.

 

"조카딸이 기초화장품이라도 바르지 않으면 안 된데요. 몇 가지를 알려주었는데... 15만 원쯤 한다네요."

 

저는 그 소리도 흘려들었습니다.

 

출근을 위해 서울로 간 처로부터 오늘 전화가 왔습니다.

 

"조카가 알려준 그 스키로션과 수분크림만 사면 안 될까요?"

 

오늘 생각해보니 처가 로션조차 바르지 않은 것이 몇 년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처에게 로션을 바르지 말라는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아마 하지 않던 일을 하려니 겸연쩍어 한 전화라고 추측이 됩니다.

 

기초화장품을 바르지 않는다고 생명에 지장이 없을 것은 확실하지만 로션이라도 바르고 싶은 마음이 생긴 처에게 그것조차 무심하게 넘기는 것은 처에게나 저에게 너무 '비참한' 처사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리고 넉넉하게(?) 20만 원을 처의 통장으로 넣었습니다.

 

생전 처음 이런 일을 하고 보니 남편으로서 자존감이 훨씬 높아진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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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돌아온 저녁에 갑자기 선물받은 마사이족이 만든 양털 모자를 쓰고 제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처의 사진을 즐겨 찍곤했지만 스스로 먼저 사진을 찍어달라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얼굴은 웃고있지만 좀더 주의깊게 보면 눈에 눈물이 살짝 고여있습니다. 갱년기 탓이려니 합니다. ⓒ 이안수

직장에서 돌아온 저녁에 갑자기 선물받은 마사이족이 만든 양털 모자를 쓰고 제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처의 사진을 즐겨 찍곤했지만 스스로 먼저 사진을 찍어달라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얼굴은 웃고있지만 좀더 주의깊게 보면 눈에 눈물이 살짝 고여있습니다. 갱년기 탓이려니 합니다. ⓒ 이안수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포스팅됩니다.
#화장품 #비누 #샴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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