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의 뿌리를 찾아서 (2)

고베(神戶)에 남아있는 최용신 선생의 그림자

등록 2011.02.11 11:18수정 2011.02.1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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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월, 부관연락선을 타고 홀로 시모노세키로 향하였던 최용신 선생의 길을 따라 선편으로 현해탄을 건너간 <은빛미디어 답사대> 일행 7명이 고베여자신학교 (현 간사이대학교)에 들어선 것은 1월 28일 오후 2시였다.


현 성화(聖和)단기대학 교수이며 성화사(聖和史)편찬위원회 위원장인 하라(原) 교수와 약속한 시간에 닿기 위하여, 오전 11시에야 오사카에 도착한 일행은 하선하자 말자 점심도 거르고 준비하였던 전용차로 고베여자신학교로 달려갔다.   

1880년에 설립된 최용신의 고베여자신학교는 이제 없다. 1941년 성화여자학원으로 개명되고, 1981년 남녀공학의 성화대학으로 바뀌고, 2009년 관서대학과 합병하였고, 현재의 재학생이 졸업하면 성화마저 폐교가 된다.

이때를 놓치면 최용신이 수학한 고베여자신학교는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고 최용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유학시절의 자료를 얻을 길은 없어지고 마는 안타가운 지경이었다.

최용신의 발자취가 남겨진 교정에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서는 일행을 하라(原) 교수는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이미 많은 정보를 상당기간 주고받은 사이라 교정에 선채로 명함을 나누고 마치 옛 친구와 같이 격의 없이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들의 방문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하라(原) 교수는 우리의 답사를 위하여 사전에 정보를 많이 준비하였을 뿐 아니라, 고베여자신학교(성화) 동창회 사무국장 중도(中島) 선생도 소개하였다. 같이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의 방문목적을 익히 아는 하라(原) 교수는 교정에 아직도 남아있는 1932년에 주춧돌(定礎)을 놓은 선교사관과 당시 중심건물이었던 4호관부터 소개하였다. 건설기간이 1년 이상 걸렸다 하더라도 최용신 선생이 입학하였던 1934년에는 이미 완공된 신축 건물로 최용신 선생의 기억 속에는 기존의 건물로 각인되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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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1_Gain House 1930년대 미국선교사들이 사용하였던 선교사관 (Gain House) ⓒ 라영수


먼저 안내된 선교사관은 교내 부설 유치원 앞에 있고 미국선교사들이 사택으로 쓰던 서양식 건물로 고베여자신학대학을 이루는 4개동의 건물 중 하나로서, 이제는 낡아서 사용은 하지 않으나 보존용 건물로 관리하고 있다.

건물은 40평 가량의 2층으로 <Gain House>라고 정문 좌측 벽에 건물명이 붙어있다. 건물 안은 넓고 깨끗하였으며 당시 쓰던 가구가 그대로 있는 응접실과 주방 침실 등이 구획되어 아직도 사용이 가능할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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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2_map 관서대학 성화 캠퍼스에 남아있는 고건물 위치도 ⓒ 라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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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3 4호관의 정초(1932년도가 명기되어 있다) ⓒ 라영수


하라(原)교수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계단을 내려와 다음 건물로 안내하였다. 역시 1932년에 정초한 4호관이다.

4호관 1층 중앙에는 아담한 예배당(Chapel)이 있고 예배당 안은 고풍스러운 의자와 풍금이 있어 반가웠다. 예배당 안에서 최용신 선생님은 긴 나무의자 어디엔가 앉아 기도를 하였을 것이다.

예배당 양옆과 2층은 모두 교실이었으나 이제는 회의실로 바뀌었다. 당시의 사용용도가 출입문 유리창에 작은 네모 종이로 붙어있다. 옛날 교실에 칸막이를 하여 회의실로 사용함으로 모두 교실이 몇 개였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모두 10개 정도가 되지 않을까 추측된다. 최용신 선생님은 복도로 이어진 교실을 드나들며 이 과목 저 과목을 공부하였을 것이다.

고풍스러운 복도 끝에 타원형 거울이 얌전히 탁자 위에 남아 있는데, 당시 여학생들이 오가며 교실에 들어가기 전 또는 나오면서 얼굴을 고치던 곳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여 진다. 최용신 선생도 77년 전 다른 여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잠간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매만지고 계단을 내려갔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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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4_4호관 1932년 정초 4호관 앞에서 기념촬영 (왼쪽에서 4번째가 하라교수) ⓒ 라영수


30년 만에 한파가 몰아닥친 1월의 고베도 역시 추웠다. 복도 마지막 끝 왼쪽에는 교실이었던 넓은 공간이 회의실로 개조되어 따스하게 느껴지는 햇살이 두면 모두에 난 창을 통하여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를 위하여 하라(原) 교수는 미리 난방까지 하여두어 방은 아늑하고 따뜻했다.

하라(原) 교수는 자신의 소개로부터 시작하여 미리 준비한 자료들을 제시하며 고베여자신학교 설립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변천사를 설명하였고, 이 기회에 비로소 알게 된 최용신 선생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말로 매듭을 짓는데 1시간 가량 걸렸다.

설명을 마친 하라(原) 교수는 성화사(聖和史)편찬자료 중에서 발견한 최용신의 학적부와 최용신이 참가한 관내 성서학교 참가자 명단 복사본을 우리에게 주었다. 또한 작고하신 죽중(竹中正夫) 선생이 2000년에 발간한 <神戶女子神學校 物語> 1권과 우리에게 소개하였던 1930년 대 고건물사진 CD를 함께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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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5_학적부 최용신 선생이 들어있는 성서학교 참가자 명단과 학적적부 ⓒ 라영수


1934년 봄 학기 학적부에는 최용신 선생의 성 최(崔)를 일본어로 읽고 로마자로 표기한 <SAI>가 15명의 동급생 명단에 분명히 표기되어 있었다. 또 관내 성서학교 참가자 명단 (Attendance Inter-Bible School, Kitanomiya June, 1934)에도 분명히 <SAI>가 있었다. 깨끗이 복사가 되지 못한 서류였으나 우리 최용신 (Sai Yoshin)이 거기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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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5_1_유품 고풍스러운 실내 (1)풍금/(2)거울/(3)계단/(4)복도 ⓒ 라영수


후덥지근한 고베의 여름, 땀에 젖어 강의와 교외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최용신을 우리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각기병은 심각해져 장단지가 퉁퉁 부어 손가락으로 찌르면 한 치나 들어가 나오지 않는 손가락 자국을 보며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심각한 고민에 쌓인 최용신 생각에 이르자 크게 울고 싶었다.

학교 측에서 받은 자료는 귀중한 것이나, 앞으로 최용신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상호 간에 더욱 찾아 보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은 큰 성과였다. 하라(原) 교수에게 우리가 가져간 최용신 자료를 드리니 또한 고마워하였다. 앞으로 공식적인 교류를 약속하고 하라(原) 교수와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일본의 밤은 한국보다 일찍 와서 우리는 서둘러 고베에 아직도 남아있는 최용신 시대의 거리를 답사하기로 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이진칸(異人館)으로 오늘날 코베의 관광명소 중 하나이다. 

산륵에 자리한 이진칸 마루에 서면 한눈에 고베항이 내려다보인다. 틈을 내어 최용신 선생은 필히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고베는 일본에서 가장 먼저 개항을 한 곳이어서 일본으로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창구였으며, 이진칸은  코베에서도 외국인들만이 촌락을 이루고 사는 특수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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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6_청국영사관 이진칸에 남아있는 당시 청국영사관 ⓒ 라영수


고베는 일본에서도 지진 피해를 많이 본 곳이다.  최용신 선생이 고베여자신학대학을 입학하던 한해 전에도 큰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최근에는 우리가 기억하는 1993년 <칸사이 대지진>에 진원지가 고베 중심가로 모두가 폐허가 되었고, 재건설을 통하여 산노미야 중심가는 현대적인 국제도시로 탈 바꿈 되었다.

보기는 좋으나 최용신 선생이 걷건 길은 아니므로 우리는 지나쳐 버리고 다시 방향을 바꾸어 고베여자신학대학가 있었던 키타노미야로 갔다.

어둠이 깔리는 롯고산을 바라보며 키타노미야 민단(民團)을 찾아 김정수 사무장 선생을 만났다. 민단은 칸사이대학 성화캠퍼스와 가까워  김정수 선생은  고베여자신학대학이 성화로 바뀌고 다시 칸사이 대학으로 합병되었다는 정보를 주어 이번 답사의 문을 열어준 분이다.

같이 저녁을 들며 감사의 말과 함께, 최용신을 모르는 김정수 선생에게 <상록수>를 길게 설명하니 감격하였다. 이튼 날 우리는 최용신 선생이 필히 가보았을 오사카 성을 들렀고, 나라(奈良)를 찾아 방목하는 사슴들을 보았다. 최용신 선생님은 인자한 손으로 필히 사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것이다.

다음 날, 가까운 교토(京都)도 들러야 하였으나 우리의 일정이 허락하지 않아 오사카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각기병을 운명이라 체념한 최용신 선생은 코베에서 학업을 중단한다. 당시 고베에 있었던 약혼자 김학준에게 신앙심을 돈독히 하도록 권유하며 자신이 못다 한 세계를 향한 공부를 마쳐 조국에 봉사해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고베에 있었던 동생 용경이와 오빠에게도 한 맺힌 이별을 하고 최용신 선생은 부관연락선에 올랐다. 

다시 샘골로 온 선생은 다음해 1월 23일 조선농민의 모든 아픔을 가슴에 안은 채 하늘나라로 가셨다. 모든 환경이 절벽처럼 둘러싸인 속에서도 희망과 열정을 버리지 않고 싸워온 최용신 선생의 땀과 눈물을 우리는 찾고자 하였다. 희망을 향한 창구 고베에서 최용신 선생은 무엇을 생각하였으며 어떤 고민을 하였을까를 추적하여 작은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사람 최용신의 자취를 계속 추적하기 위하여 태어나 자란 원산을 갈 것이며, 최초의 농촌 활동을 하였으나 실패했던 황해도도 답사한다. 더구나 북한에서도 최용신 연구는 이루어지고 있어 자료의 공유와 공동연구도 제안할 계획이다.

우리는 최용신을 땀 내나는 우리의 생활 속으로 모시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힘들 때 항상 옆에서 추슬러 우리의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용기를 주시는 후덕한 할머니로 모시고자 하는 것이다.

현해탄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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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7_현해탄의 해돋이 현해탄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 ⓒ 라영수

덧붙이는 글 | 직접취재


덧붙이는 글 직접취재
#상록수 #최용신 #은빛미디어 #은빛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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