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보면, 철학도 맛있어질 수 있다!

[서평[ <철학자의 서재>, 최신 베스트셀러에서 최고의 고전까지

등록 2011.02.11 11:25수정 2011.02.1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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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을 수 있을까?'

 

<철학자의 서재>를 집어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후회가 밀려왔다. 두꺼운 책은 독서 애호가들의 구매욕을 자극하지만 서점을 떠나 서재에 앉은 순간부터는 실행의지를 시험하는 무거운 짐이 되니까.

 

아직 환불할 수 있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트집에 가까운 변명부터 해보았다. 과연 이 책 속에 담긴 내용들이 쓸모가 있을까? 107권이나 되는 책들의 내용을 수박 겉핥기로 다룬 것일지도 모르니까 대충 인터넷으로 찾아 읽어도 되지 않을까? 904쪽이니까 책 하나에 9쪽 남짓한 분량인데…….

 

지금은 이 책을 구매하고 읽기 잘 했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시간 없는 이들, 지식의 깊이나 인문학을 '강요'받는 요즘 직장인들이나 학생들에게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양한 분야에다 책이 출간된 시대도 고대에서 최근까지 수천 년을 아우르지만, 우리 시대를 건강하게 살아내기 위한 문제의식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나 켄 올레타의 <Googled!> 같은 최신 베스트셀러에서부터 제목부터 생소한 메이지 시대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을 권함>까지, 미국의 과학스타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에서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까지 우리가 읽고 소화하고 교양으로 남겨야 할 지식 덩어리들이 차곡차곡 잘 정리돼 있다.

 

107권의 책을 읽어내는 '시선의 품질'은 어떨까? 얼핏 봐서는 들쭉날쭉 해 보인다.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에 대한 꼭지를 보면, 책에서 다루는 현대 물리학의 흐름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뭉툭하다. 최첨단 물리학이라고 하는 '끈 이론'의 전도사인 저자의 문제의식도 제대로 짚어주지 못한다.

 

반면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 같은 책은 철학자들과 좀 더 가까워서인지 몰라도 가슴이 뜨끔할 정도로 날카롭다.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으로 인해 겪는 고통보다,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전쟁의 폭력과 고통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보다 덜 공감하고 덜 사유하고 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한 인간사의 일이기 때문에 '나도 당할 수 있는 일이구나'라는 경각심이 약화되는 것인지는 몰라도,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여지가 있음에도 현실 인식은 보다 약화되고 책임을 회피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우리가 연민이나 자기 위안을 통해 현실의 폭력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폭력의 이미지에 익숙해져 현실로부터 눈을 닫아버리는 불감증이다."

 

내용상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다 보니 꼭지들의 품질이 불균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철학자의 서재>라는 제목처럼 사유의 보편적 프레임을 추구하고 고민하는 철학자들이 쓴 글이다. 비록 장르 특유의 재미까지 담아내지 못했지만, 철학자가 무엇을 고민하고 철학적 사고방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알기에는 이보다 더 흡족할 수 없지 않을까 한다.

 

가령 다음 문단에 인용한 <우주의 구조>에 대한 꼭지의 일부 내용은 브라이언 그린의 SF에 가까운 시간 개념보다 우리의 삶에 훨씬 가깝고, 그저 즐기는 수준을 넘어 뭔가 생각해볼 계기를 선사해준다.

 

"이와 같은 (서양 철학의 - 필자) 종교·신화적 서술이 철학적 사유의 원천을 이루게 됨으로써 생겨나는 문제는 시간의 질서를 미리부터 규정함으로써 지배적인 도덕의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그리스도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의 시간은 인간이 종교적 지배 질서 하에 종속되도록 하였으며, 신탁에 의해 설명되는 신화적 시간은 인간이란 결코 신들이 만들어 놓은 예정된 시간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간의 의식 속에 강하게 뿌리박아 놓는다. 현대에 이르러 첨예해진 이데올로기는 시간의 질서를 지배적인 정치권력의 질서에 부합하도록 왜곡하는 것에서 만들어진다."

 

철학자가 썼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독서를 한다면 107권이나 되는 책으로 인해 소화불량에 걸리거나 뷔페 가서 메뉴 한 젓가락씩 먹어보는 식의 찜찜함만 남게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책에서는 편집자, 다시 말해 엮은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책을 보다 꼼꼼하고 생산적으로 읽고 싶은 독자라면 장별로 내용을 묶은 기준이나 문제의식, 각 글이나 장마다 붙여놓은 제목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인터넷 신문사에 연재된 기사를 모아서 엮었다. 책을 통해 현대 철학자들의 생생한 고뇌를 접해본다는 기획은 인터넷 매체에겐 훌륭한 선택이다. 하지만 두툼한 한 권짜리 단행본과는 잘 어울릴까? 책은 본질적으로 구체적이고 강한 응집력을 가진 지식의 덩어리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터넷에 널린 글들을 복사-출력해서 묶는 것이나 별 다를 게 없다.

 

편집자의 역할은 이래서 중요하다. 뿔뿔이 흩어지기 쉬운 책들이 끈끈하게 뭉칠 수 있는 감독의 역량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철학자의 서재>는 철학자들의 생생한 문제의식을 맛볼 수 있고, 이른바 필수 교양도서들의 내용도 깔끔하게 정리해볼 수 있다. 하지만 비슷한 콘셉트의 책들이 십 수 년 전부터 논술용 도서 요약집의 형태로도 많이 출간되었다. 이 책의 필진 중에도 그런 책에 관여한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최신의 책까지 포괄했다는 것 이외의 차별점은 무엇일까? 편집자의 세계관과 의도가 책의 '구조'에 얼마나 생생하게 반영되었을까? 필자는 <철학자의 서재> 편집자가 철학자들이 던진 화두를 비교적 잘 이해하고 분류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다만 이는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니 독자들 또한 판단해보시기 바란다. 독서의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11.02.11 11:25 ⓒ 2011 OhmyNews
#철학 #서재 #인문학 #지식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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