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람이 버린 수박 껍질도 먹었다"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수자-양금덕 할머니 증언... 최미니 창원시의원 발표회 열어

등록 2011.02.28 21:49수정 2011.03.0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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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설움이 얼마나 컸나. 배가 고파서 원통했고, 돈 한 푼 못 받아서 더 원통했다. 이 분을 어디 가서 다 풀면 좋을꼬. 일본 사장 잡아서 모가지 비틀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다." - 김수자

"눈물을 거두지 못하고 죽는 줄 알았는데, 시민모임이 만들어져 절반 정도는 풀었다. 이제는 밥도 더 먹고 건강해서 일본의 사죄를 꼭 받아내겠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 한도 풀어야 한다." - 양금덕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수자(가명·82·마산), 양금덕(83·광주) 할머니의 증언이다. 두 할머니는 28일 오후 경남 창원대에서 열린 '근로정신대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사례 발표회'에서 눈물을 보이며 증언했다.

 최미니 창원시의원은 28일 오후 창원에서 '근로정신대 사례 발표회'를 열고 발제했다.

최미니 창원시의원은 28일 오후 창원에서 '근로정신대 사례 발표회'를 열고 발제했다. ⓒ 윤성효


근로정신대는 1944~1945년 사이 벌어졌다. 2008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 실태조사 때 183명(신고당시 생존자수 161명)으로 파악되었다. 그런데 구술조사와 당시 신문 기사 등의 자료를 보면 1700여 명에 이른다. 후지코시 도야마공장 1089명, 미쓰비시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300여 명, 도쿄아사이토 누마즈공장 300여 명 등이다.

이날 사례발표회는 민주노동당 최미니 창원시의원과 창원여성회가 공동주최했다. 두 할머니의 증언에 이어 토론회가 열렸다.

김수자 할머니 "중학교는 보내 주지 않고 일만 시켜"

김수자 할머니는 1944년 마산 '성호초등학교' 재학중 후지코시 군수업체에 동원됐다. 할머니는 2년 가까이 근로정신대로 있었지만 임금을 받지 못했다. 할머니는 12년째 일본 정부와 기업을 대상으로 법정 소송을 진행 중이다. 김 할머니는 창원지역의 유일한 근로정신대 신고자다.


할머니는 마이크를 잡고 66년 전 아픈 기억을 더듬었다. "군복을 입은 남자 2명이 학교에 와서 교장과 담임을 만났고, 그 뒤 담임이 교실에 오더니 교당에 모여라고 하더라, 활동사진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담임은 '너희들은 상급 학교에 못 가니까 일본 가면 공부할 수 있다, 집에 가서 부모들을 설득해 달라'고 하더라. 아버지께는 말씀을 못 드리고 어머니께 일본에 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허락하지 않으셨다. 며칠을 굶은 끝에 어머니의 승낙을 받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끼로 갔다."


김 할머니가 일했던 곳은 후지코시 군수업체로,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공장 기숙사 2층에서 지냈다. 눈이 많이 오면 2층까지 쌓이는 지역이었다. 다다미방이었는데 굉장히 추웠지만 작은 담요 1장을 덮고 잤다. 추워서 잠이 오지 않았고 고향 생각이 나서 많이 울었다."

김 할머니는 기숙사에 들어간 지 3일째 되던 날부터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일본 중학교는 보내주지 않고 공장에서 일만 했다는 것.

"하루 비행기 부품인 베어링 200개를 만들어야 했다. 우리는 일본놈한테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일해 하루 300개 정도를 만들었다. 나중에 일본 반장은 나이도 어린데 일을 잘한다고 했다. 그곳에서 1년3개월을 일하다 공장이 황해도 청진으로 옮긴다고 해서 배를 타고 갔다. 배는 사람이 도저히 탈 수 없을 정도로 녹이 슬어 있었다."

청진에서 일하다 휴가를 받았다는 것. 김 할머니는 "월급을 달라고 했더니 주지 않았고, 고향에 가려면 차비가 있어야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일본 반장은 사인한 종이를 내밀며 그것을 역무원한테 보여주면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다고 했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해방 뒤 여러차례 일본 공장 정문 앞에 가서 임금을 달라고 했지만 못 받았다"면서 "일본 사장은 만나 볼 수 없었다, 싸우다가 그냥 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양금덕 할머니 "여학교 보내준다고 하더니"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광주) 할머니.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광주) 할머니. ⓒ 윤성효

양금덕 할머니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일본 미쓰비시 군수업체에 동원됐다. 양 할머니는 현재 일본을 오가며 미쓰비시기업과 협상을 진행 중이다. 양 할머니는 전남 나주에서 당시 38명과 함께 여수에서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끼를 거쳐 나고야로 갔다.

"우리는 일본 여학교에 보내준다는 말에 속았다. 처음에는 며칠 동안 일본의 좋은 곳만 보여주었다. 20일 정도 지나니 강당에 가둬놓고 미쓰비시 공장에서 일하도록 했다. 일본 사람들은 공장에서 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학교에 갈 수 있다고 했다."

양 할머니는 1년8개월 가량 일했다.

"66년 전 일을 생각하면 가슴에 대못이 박힌 것과 같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화장실에도 마음대로 못 갔다. 화장실에 가려면 순번 대기표를 주었는데, 기다리다 옷에 실례를 하기도 했다. 그 뒤 반장에게 가서 따지기도 했는데, 반장은 '놀러고 그런다'며 뺨을 때리기도 했다.

배가 고팠다. 식당에서 '다깡'(단무지)을 먹었고, 일본 사람이 먹고 버린 수박 껍질을 먹기도 했다. 지금은 광주며 고창에서 맛있는 수박이 많이 나오지만, 그땐 빨간색 수박이 조금 붙어 있는 껍질을 먹었을 때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하겠다."

양 할머니는 1945년 19월 20일 부산에 도착해 하루만에 전남 광주에 도착했다. 그때 기억을 더듬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22명이 나왔다. 어머니는 집에서 광주역까지 마중을 나왔는데, 고무신을 신고 오다 다 찢어질 정도였다. 어머니를 만났더니 맨발로 벗고 가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고 하셨다. 집에 있는데 어머니께서 며칠 뒤 돈을 얼마 가져 왔느냐고 물으셨다. 돈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 드리려고 하니 마음이 아팠다."

양 할머니는 결혼도 쉽게 할 수 없었다.

"근로정신대를 '위안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결혼하려고 맞선을 보았는데, 상대방에서는 '다 좋은데 일본 갔다 온 여자'라며 돌아섰다. 오랜 세월이 지나 광주에서 멀리 떨어진 화순에 시집을 갔다. 10년 동안 모르고 생활했는데, 시댁에서 일본 갔다 왔다는 사실을 뒤에 알았다. 당시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사람 셋만 모이면 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고, 시장에도 낮에는 갈 수 없어 저녁 때 갔다. 누구한테 말 못하고 65년을 지내 왔다."

a  2009년 12월 24일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 당시 근로정신대에 끌려가 노동을 강요당한 한국의 할머니들에게 1인당 99엔(약 1300원)씩을 후생연금 청구액으로 지급한 가운데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근로정신대 출신 양금덕 할머니(81세)가 일본 사회보험청의 조치에 항의하며 오열하고 있다.

2009년 12월 24일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 당시 근로정신대에 끌려가 노동을 강요당한 한국의 할머니들에게 1인당 99엔(약 1300원)씩을 후생연금 청구액으로 지급한 가운데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근로정신대 출신 양금덕 할머니(81세)가 일본 사회보험청의 조치에 항의하며 오열하고 있다. ⓒ 유성호


토론회 "해방 65년 지났는데 사죄도 배상도 받아내지 못해"

토론회는 남재우 창원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최미니 의원은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은 해방을 맞을 때까지 굶주림과 감시 속에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으나, 해방 65년이 되도록 임금은 물론 그 어떠한 사죄나 배상도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왔지만 '군 위안부' '몸 버린 여자'라는 사회적 편견과 오인으로 인해 파혼의 아픔을 경험하거나 아직도 주위에 차가운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등, 이중의 고통을 겼어 왔다"면서 "근로정신대 피해자에 대해서는 사회적 관심은커녕 그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산업 기반은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몫을 빼앗아 구축했다고 볼 수 있고, 우리 모두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근로정신대의 역사를 바로 알고 기억하는 일은 단순히 도의적 차원을 벗어나 우리의 의미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미니 창원시의원과 창원여성회는 28일 오후 창원대에서 "근로정신대 사례 발표회"를 가졌다.

최미니 창원시의원과 창원여성회는 28일 오후 창원대에서 "근로정신대 사례 발표회"를 가졌다. ⓒ 윤성효


이경희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창원마산진해시민모임 대표는 "여성들은 일제 시기 후반에 더욱 열악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희생과 고통을 강요 당했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근로정신대 문제는 민족의 문제와 함께 성과 계급의 문제가 중첩된 문제"라며 "억울한 수많은 근로정신대 피해 여성들이 당당하게 그 피해를 주장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전쟁에 동원된 여성을 성적으로 이용한 역사와 결부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들은)노동력 착취와 함께 여성에게만 강요한 일방적인 정절, 순결이데올로기의 이중피해자인 셈이다"고 밝혔다.

김희용 광주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대표는 "광주지역 근로정신대 시민활동의 과정과 성과"에 대해 소개했다.

이날 사례발표회에는 손석형 경남도의원과 문순규·김태웅·송태화·김석규·강영희 창원시의원, 문성현 민주노동당 창원시위원장, 김인영 경남여성단체연합 대표 등이 참석했다.
#근로정신대 #양금덕 할머니 #최미니 창원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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