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바라크 떠난 자리, 국민의 단합 원치않는 존재들

[카이로 통신] 믿을 수 없는 경찰, 꿈을 이루려는 젊은이들

등록 2011.03.02 11:53수정 2011.03.02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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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testers ⓒ 서주


지난 2월 25일, 26일 양일간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이집트 국내는 여간 흉흉하지 않았다. 곳곳에 여전히 약탈자들이 있고 군이 시위대를 무력으로 해산시켰다는 따위의 얘기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동에서는 유일하게 두 개의 종교를 자신들의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이집트에서 어쩌면 가장 민감한 문제일 수도 있었다.

무슬림과 콥틱교도들은 그들 자신이 일찍이 밝혔듯이 '하나의 이집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집트에서 콥틱사제가 살해당하고 콥틱수도원으로 군용차량이 밀고들어갔다는 사실과, 이에 대한 보복으로 무슬림들이 공격받은 사태가 벌어진 것은 매우 민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과 같은 '이제 마악 국민의 마음을 민주주의 하나로 모으려고 하는' 시기에 말이다.

이집트의 민주주의를 바라지 않는 누군가 이 모든 사태의 뒤에 있을 것이라는 나의 짐작은 천만다행스럽게도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드디어 머리를 맞대고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한 무슬림과 콥틱교 양측의 리더들은 '이 일을 종교적인 분쟁으로 몰고가지 말것'을 천명했다.

또한 지난 콥틱교도의 크리스마스에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에 폭탄이 터진 사건마저도 그들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전에 일어났던 사건들도, 그 훨씬 전의 일들도. '국민들이 언제까지 어리석을 것이라고 판단하지 말라' 무슬림과 콥틱교의 리더들은 보이지 않는 그 누군가를 향해 이렇게 경고한 것이었다.

"마담 리, 당신 말이 맞았어요. 우리도 이제 그 모든 것들을 의심해요."

신문을 읽던 하이디가 말했다. 원래 숲 속에 서 있는 사람은 산을 볼 수 없다. 나는 내가 똑똑해서 판단했던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한편 같은 날인 26일 오랜동안 조국을 떠나있던 유럽의 무슬림형제단의 대변인인 이브라임 무니르가 자신을 비롯하여 약 1000여 명의 단원들이 '안전하게 이집트로 돌아올 수 있도록' 국민들의 용서를 구하고 있노라고 알 마스리 알 윰 신문을 통해 밝혔다. 그는 이집트를 떠난 지 25년이나 되었다고 했다. 그들은 암흑 속에 동포들을 남겨두고 몸을 피한 사실에 대하여 진심으로 부끄러워했다.


종교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탄압을 받던 사람들이 이렇게 이집트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집트 국민들은 뭉칠 것이고 더 단단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대로 이집트의 통치체제 위에 군림해온 군과 동일한 선상에서 힘을 겨루려고 할 것이다. 나는 무바라크가 치워진 저 위에 여전히 남아있는 '보이지 않는 힘의 존재들'이 여간 신경 쓰이지가 않았다. 그들은 틀림없이 국민들의 성장을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단합을 원치않는 존재들이 있다


in front museum ⓒ 서주


27일 일요일 이집트 내 모든 초등학교가 2학기를 시작했다. 종교에 따라서 하루 앞인 토요일에 개학한 학교도 적지 않았다. 중고등부와 대학은 일주일 뒤로 더 연기가 되었다. 이른 아침 그래도 학기 첫날이라 나는 아이를 직접 데리고 학교에 갔다. 나 외에도 많은 부모들이 스쿨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나타났다.

전국의 교사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시위했다는 뉴스도 있었던지라 우리 부모들은 등굣길과 학교의 분위기를 파악하고자했다. 하지만 다행히 학기 중의 여느 날과 다름이 없었다. 이제 아이들은 모두 스쿨버스를 타고 하교하게 될 것이다. 박봉의 교사들이 그래도 어린 제자들의 교육을 포기하지 않아주어서 나는 몹시 고마웠다.

28일에는 시나이반도에 있다가 얼마전 공격을 받았던 이스라엘로 이어진 천연가스관이 늦어도 오는 금요일까지는 공급재개될 것이라는 뉴스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원인 모르게 카이로 사내의 정부종합청사인 모감마 건물 9층이 불에 탔다. 그 치열했던 지난 1월말의 시민항쟁 동안에도 끄떡없던 건물이었기에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이즈음 알렉산드리아의 시장이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구타를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알렉산드리아 시장은 자신의 지위에 혐오를 느껴 자진 사퇴했다. 우리는 모감마에 방화사건이 난 것보다도 알렉산드리아에서 벌어진 일에 더욱 충격을 받았다.

이날 나는 카이로 고고학박물관의 현재 상황을 알아보고자 찾아갔다. 무려 일곱 대의 탱크가 박물관 앞에 있었고 군경이 함께 바리게이트를 치고 일반시민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들은 외국인인 나를 관광객으로 여겨 흔쾌히 바리케이드를 지나게 해주었다. 박물관 게이트 안으로 매우 적었지만 그래도 관광객들이 눈에 띄었다. 모두 유럽인들이었다. 그렇게 인적이 드문 박물관의 모습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낯설었다.

shop in museum ⓒ 서주


나는 지난 1월 말 박물관 약탈사건으로 무려 17점의 유물을 잃었다는 발표를 기억해내며 그 넓은 박물관을 마구 쏘다녔다. 일층에서는 아름다운 네파르티티의 조각상을 약탈당했다고 했고, 이층에서는 미라를 훔쳐가다가 실패해서 훼손이 되었다고 했는데 실제로 비닐커버로 둘둘 싸놓은 미라 한 구를 볼 수 있었다. 박물관 출구쪽의 서점은 박물관측에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서책만큼이나 보석과 장식품류도 많이 취급하고 있었다. 그곳의 보석이 몽땅 털렸다는 점원아가씨의 하소연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진열대는 텅 비어있었다.

역시 같은 날인 2월 28일  기자의 피라밋지구 근처에 있는 셀림 하산 공예물 저장고에 무려 60여 명의 도둑이 침입했다는 뉴스는 국영TV가 아닌 민주신문 알 아스리 알윰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 이집트 고고학유물위원회장인 닥터 하와스는 지난 군이 떠나고 경찰이 대신 경비를 맡았지만 경찰들은 전혀 유물을 보호하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아직 무엇이 얼마나 약탈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도둑들은 땅을 파고 저장고 안으로 침투한 것으로 드러났다. 여전히 경찰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불명예를 다시 한 번 훈장처럼 달게 되었다.

바위같은 국민들, 깨어지지 않을것

imams ⓒ 서주


군당국의 하는 일들이 영 마땅찮은 이집트 법률가협회의 한 관계자는 '무바라크 대통령과 그의 일가는 모두 출국을 금지하며, 국가는 그들의 모든 재산을 압류한다'는 알쏭달쏭하지만 결국은 무바라크를 지켜주겠다는 뉘앙스의 발표에 이렇게 응수했다.

"출국금지도 당하고 재산도 동결되었으니 이제 무바라크는 종신구금상태에 처한 것이나 같다."

3월 1일 아침에도 나는 시내로 나아갔다. 벌써 며칠째 타흐리르광장에는 예전의 소형텐트 대신 커다락 장막들이 들어섰고 청년들은 사휘크 총리의 사퇴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군당국의 고위직인사가 아무리 '해산하지 않으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험한 경고를 주어도 시위대는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나는 모스크에서 기도를 집도하는 이맘(이슬람교 교단 조직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하나의 직명)들이 시위를 한다는 말을 듣고 얼른 장소를 이동했다. 타흐리르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각 도시에서 이맘과 전도자들 200여 명이 밥 엘 루크 앞에 몰려와있었다. 말하자면 종교주관관청인 곳이다.

시위대들은 자신들의 일에 대한 비밀경찰의 간섭을 중단하고, 근무환경을 개선해주고, 이슬람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대학인 알 아즈하라대의 독립적인 운영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벌써 이틀째의 농성이라고 했다. 그들은 머리에 흰 테두리가 있는 빨간 모자를 쓰고 있어 구분이 쉽게 하였다. 알 아즈하라를 이슬람에서 가장 중요한 순니파 교육센터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종교인들다웠다. 모스크에도 비밀경찰들의 감시가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란 순간이기도 했다.

"돈 받고 하는 일이 아니에요, 유토피아를 이루기 위한 것일 뿐"

아야 ⓒ 서주


하룻동안 정치적인 시위와 종교적인 시위의 현장을 모두 겪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나는 메트로를 탔다. 어제까지만해도 보이지 않던 낯선 존재들이 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왼쪽 가슴에는 작은 명찰을 그리고 등판에는 조금 큰 프린트를 단 대학생들이었다.

카이로의 메트로는 일일 약 200만 명을 수송하기 때문에 승하차시 크고 작은 사고가 매우 자주 일어난다. 언제부터인가 시당국은 메트로의 문마다 '타는 곳'과 '내리는 곳'을 표시하기 시작했지만 이를 지키는 시민은 한 명도 없었다. 그저 문이 열리니 우르르 몰려가 타고 내릴 뿐이었다. 오늘 만난 그 대학생들은 바로 이 메트로의 승하차질서를 바로 잡으려고 스스로 모인 친구들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아야'라고 소개한 여대생은 올해 스무 살이며 카이로대학 공대에 재학 중이라고 했다. 나는 사진촬영을 양해받고나서 그녀에게 물었다. 이 일이 파트타임잡인지 아니면 자원봉사인지. 그러자 아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는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봉사를 하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들의 유토피아를 이루기 위해서 나섰을뿐이에요."

다음 역에도 그다음 역에도 다른 '아야'들이 있었다. 얼마나 오래 질서정리를 했는지 하나같이 목이 쉬어있었지만 초롱초롱한 그들의 눈빛만큼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보다 나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이 청년들의 꿈이 권력의 맛을 너무나도 잘 아는 위정자들의 탐욕에 행여 부숴질까 나는 지레 염려가 되었다. 부디 무사히 꿈을 이루기를 기도하며 그들 이집트의 젊은이들을 응원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네이버의 <마담 아미라의 이집트여행>에도 실립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네이버의 <마담 아미라의 이집트여행>에도 실립니다
#이집트민주화 #서주선생 #무슬림 #콥틱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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