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집에서 두 아들에게 동화책을 들려주는데 원하는 책을 직접 책꽂이에서 고르도록 합니다. 들고 온 책은 따뜻한 방에 등대고 누워 목소리에 한껏 감정을 실어 읽어줍니다. 지난 토요일엔 마침 배알이 하는 첫째 아들 때문에 봄 마실 미루고 실컷 동화책을 읽고, 보기로 했습니다.
그날은 무슨 부지런인지 제가 직접 책을 고르려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데 동화책만 수두룩한 책꽂이 한 편에 <세계도서관 기행>이라는 낯선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언제 구입해 꽂아 두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동화책만 즐비한 곳에 있어 더 눈에 띕니다.
책을 뽑아든 후 겉표지 봅니다. 책이 빽빽이 꽂힌 고풍스런 서가의 모습과 '오래된 서가에 기대 앉아 시대의 지성과 호흡하다'라는 작은 글씨가 보입니다. 일단 머리가 아파옵니다.
다시 제자리에 책을 얌전히 꽂아 놓으려다 말고 손품이 아까워 첫 장을 슬쩍 넘겼습니다. 그 후, 동화책은 애들 엄마에게 넘기고 저는 책 읽느라 뒤통수에 꽂히는 아이들과 엄마의 불평을 온종일 들어야 했습니다.
책은 글쓴이가 국회도서관 관장으로 있으면서 세계 40여 개 도서관을 돌아 본 후 느낀 감동을 글로 묶었습니다. 프롤로그를 읽으며 일단 부러웠습니다. 세계적 지성의 산실인 도서관을 40여 곳이나 둘러봤다는 점도 샘나지만 세계 40여 곳을 돌아다닌 일이 더 부럽습니다.
때문에 글쓴이가 표지에 적은 "도서관은 내게 불멸의 로망이다!"라는 말은 "도서관 기행은 내게 불멸의 로망이다!"라고 읽고 싶습니다. 저도 세계 일주를 할 날이 올까요? 허망한 미래는 접고 일단 책 속 세상이라도 맘껏 즐기고자 한 걸음씩 조심스레 읽었습니다.
글쓴이가 첫 기행지로 꼽은 곳은 요즘 민주화 바람으로 한창 떠들썩한 북아프리카의 이집트입니다. 책은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이 세계 최초의 도서관이며, 그래서 '최고'는 바뀌지만 '최초'는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책은 '최초'의 도서관이 만들어진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1990년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국제사회에 호소하여 유네스코가 나서고 여러 나라가 참여하여 2002년에 재건한 것이다."
또 "2002년 10월 16일 역사적인 개관식에서 무바라크 대통령은 '다가오는 세대에게 희망을 주는 세상, 고대의 영광으로부터 생명을 불어넣은 바로 이 도서관에 구현된 숭고한 가치와 원칙이 되살아나 다시 번성하는 세상을 만들자'라고 말했다."는 내용도 눈에 띕니다.
얄궂은 일은 2011년 현재, 이 도서관을 짓자고 세계에 호소한 분은 숭고한 가치와 원칙을 되살리고 번성하는 이집트를 만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국민들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권력의 무상함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영국인들과 함께 유쾌하게 웃었지만 속마음은 씁쓸했던, 대영도서관 기행
책은 지중해의 아름다운 도서관을 뒤로하고 영국의 도서관을 소개합니다. 이곳에서 글쓴이는 외규장각 의궤 가운데 한 권인 <기사진표리진찬의궤 己巳進表裏進饌儀軌>가 대영도서관에 소장된 사연을 적었는데 글쓴이의 씁쓸한 농담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이 외규장각 의궤는 <기사진표리진찬의궤 己巳進表裏進饌儀軌>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것 중 한 권이 영국으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어떻게 소장하게 되었는지 물어보니 영국의 한 상인이 프랑스인으로부터 10파운드(약 2만원)에 사서 기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가 '열 배로 살 테니 팔아라.'라고 하자 그들은 유쾌하게 웃었다. 나도 함께 웃었지만 속마음은 씁쓸했다."
소름 끼치는 시인의 예지력, 책 태우는 곳에서 결국 인간도 태우게 될 것
이렇게 영국과 이탈리아를 지나 독일에 도착합니다. 글쓴이는 히틀러가 '분서축제'를 벌인 베벨광장 조형물을 본 느낌을 '소름끼치다'고 적었습니다.
"이 지하 서고에서 조금 떨어진 바닥에는 시인 하이네가 1820년에 쓴 작품에서 가져온 문구가 동판에 새겨져 있다. '그것은 단지 전야제에 불과했다. 책을 태우는 곳에서는 결국 인간도 태우게 될 것이다.' 이 구절은 1백여 년 뒤에 벌어질 사건을 예견하고 쓴 것이나 다름없다. 시인의 놀라운 예지력에 소름이 끼친다."
철학, 못 하나 박는 기술도 가르쳐주지 않는 학문
또, 훔볼트대학교에서 글쓴이를 한동안 멍하게 만든 구절도 적어 놓았는데 저도 아련한 옛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글쓴이는 '한동안 멍한 느낌'을 받았다는데 저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난 후 그 이유를 계속 찾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 -마르크스의 논문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의 마지막 단락-
그리고 다음말도 덧붙입니다.
"철학은 못 하나 박는 기술도 가르쳐주지 않는 학문이다. 단지 사물을 뿌리에서 보는 근본적 시각을 갖도록 가르쳐줄 뿐이다. 철학의 궁극적 목적은 사회 변혁에 있다는 마르크스의 일갈에 젊은 가슴은 얼마나 뛰었던가."
책은 프랑스, 러시아, 미국, 중국, 일본을 소개하고 있고 길고 긴 여정의 끄트머리 한국의 다양한 도서관을 소개합니다. 특히, 밀레의 <이삭줍기>라는 그림이 점자화 되어 손으로 읽을 수 있도록 만든 사진을 본 순간 도서관의 진화는 어디까지 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내 고장에 어른 아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도서관 많이 생기면 좋겠다
책을 덮고 내가 사는 이 도시의 여러 도서관을 떠올려봅니다. 굳이 고색창연하고 웅장하지 않더라도, 역사와 전통은 짧더라도 어른 아이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도서관이 곳곳에 있었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오며가며 눈길끄는 동네 작은 도서관들과 할머니들이 동화 읽어주는 한옥도서관, 그리고 환경을 주제로 만들어진 환경도서관이 떠올라 조용히 미소 짓습니다.
화창한 봄날, 봄마실 다닐지 도서관 문턱을 넘을지 고민됩니다. 한 가지 분명한건 <세계도서관 기행>이 일으킨 감흥이 도서관으로 발길을 끌 겁니다. 두 녀석은 아빠의 선택이 고통일까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복지방송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1.03.07 15:21 | ⓒ 2011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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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들 커가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애들 자라는 모습 사진에 담아 기사를 씁니다. 훗날 아이들에게 딴소리 듣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세 아들,아빠와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을 기억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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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읽어줄 동화책 뒤지다 만난 책, <세계 도서관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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