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의 대표인물 길재와 박정희, 그 아이러니

길재 유적과 박정희 생가가 공존하는 구미 여행

등록 2011.03.27 14:36수정 2011.03.27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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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생가 복원된 초가 건물이다. ⓒ 정만진


경상북도 구미시를 대표하는 관광지는 아마 박정희 생가와 금오산일 것이다. 과연 구미 시내로 들어서면 '박정희 생가'와 '금오산'으로 가는 방향을 말해 주는 이정표들이 도로 위 허공마다 줄줄이 걸려 있다.

그러나 금오산은 등산을 하기 위해 찾아온 외지인만을 반기는 그런 곳이 아니다. 금오산에는 고려말 삼은의 한 사람인 길재 선생의 유적이 있다. 조선 영조 때 금오산 입구에 건립된 채미정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산을 절반 이상 오른 다음 정말 천길 낭떠러지를 오른편에 둔 채 콩알만큼 작아진 가슴을 애써 달래며 절벽에 붙은 가느다란 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면 '길재 굴'이 불쑥 나타난다. 길재 선생이 숨어 살았다는 동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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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굴 가는 길 엄청나게 가파른 절벽에 비스듬히 붙은 철책을 붙잡고 살금살금 걸아야 한다. ⓒ 정만진


굴로 나아가는 절벽의 길을 걸어보면, 어찌 이런 곳에 이토록 큰 굴이 있으며, 또 사람들은 어떻게 이 굴을 발견하였을까 싶은 찬탄이 저절로 일어난다. 요즘 같으면 헬기를 타고 산 일대를 탐색한 끝에 이곳에서 커다란 굴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아무런 장비도 없는 아득한 옛날에 무슨 재주로 '길재 굴'의 존재를 알아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또 어찌 굴까지 다달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보아도 굴에 이르는 절벽 길은 천연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정을 들고 쪼아서 만들어낸 인조의 산물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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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의 '길재굴' 야은 길재 선생이 숨어 지냈다는 굴. 금오산 중턱 가파른 절벽 사이에 있다. ⓒ 정만진


굴에서 내다보는 구미 일대의 경치는 정말 장관이다. 찾아온 사람들은 카메라를 들고 진중하게, 또 어떤 이는 휴대폰으로라도 풍치를 담느라 여념이 없다. 시내 쪽을 바라보면 시가지와 너른 선산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고, 금오산 정상 방면을 쳐다보면 대혜폭포와 악산의 정상이 눈을 찌른다. 그뿐인가. 굴 왼쪽은 깎아지른 듯한 수십 길 낭떠러지가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이런 풍치를 두고 사람들은 흔히 '장관'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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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대혜폭포 이 물줄기가 흘러 구미 일대 평야의 들판을 기름지게 한다. 그래서 이 폭포에는 '큰 은혜를 주는 폭포'라는 뜻의 '대혜폭포'라는 이름이 붙었다. ⓒ 정만진


굴 들머리에 있는 대혜폭포도 1000m가 채 안 되는 산에 있는 것으로는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위용을 자랑한다. 방문한 날이 겨울 끄트머리라 꽁꽁 얼어붙은 빙벽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삼단 같은 낙수를 보여주지도 못해 사뭇 아쉬움이 남지만, 한 여름 물이 많을 때나 눈 내린 겨울날에 찾아오면 차마 말로는 그 아름다움을 두루 나타낼 수 없는 눈부신 경관을 감상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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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정 조선 영조 때 건물이다. 금오산 입구에 있다. ⓒ 정만진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길재 선생이 남긴 이른바 '회고가'이다. 나라는 망하고, 그러나 산천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그 많던 충신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인걸은 간 데 없다'는 탄식이다. 새로운 권력 앞에 납작 엎드린 인간 군상들의 얄팍한 처세술을 지켜보며, 쓸쓸히 숨어지낼 곳을 찾아떠난 길재 선생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고시조의 절창이다. 그 후 선생은 나물을 뜯어먹으며 숨어지낼 곳을 찾아 금오산으로 들어왔으니 그가 은거한 곳에 세워진 정자의 이름은 당연히 '채미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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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의 회고가 채미정 입구에 있다. ⓒ 정만진


구미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금오산 길재 선생 유적과 박정희 생가라는 사실이 자못 흥미롭다. 한 사람은 새로운 권력에 맞서 타협을 거부하고 산으로 들어간 야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권력을 잡기 위해 서울로 진격한 군인이다. 두 사람의 이력은 정말 완벽하게 모순 관계를 보여준다. 하루에 두 사람의 유적을 한꺼번에 둘러보는 이 마음, 어쩐지 쓸쓸하고 애잔하다. 정녕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의 길일까. 하지만 길재 굴을 찾은 아이의 얼굴과 박정희 생가를 방문한 노인의 표정에는 아무런 해답도 쓰여있지 않았다.
#길재 #금오산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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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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