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125회)

궤보요(?步搖) <1>

등록 2011.04.05 08:54수정 2011.04.05 08:54
0
원고료로 응원

불가의 스님은 팔천(八賤)의 하나로 천대받았으나 중인(中人)은 도사나 스님보다 천시 당했다. 저마다 팔천과 중인에 대한 기준을 정하는 게 차이나지만 팔천의 하나인 스님보다 낮은 중인은 여성이나 역적보단 조금 나은 잡놈이란 점에서 마냥 즐거워 할 일만은 아니다.

 

인동 장씨라면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었기에 한때는 역관(譯官)의 위세가 적지 않았다. 겉으론 드러나지 않았지만 '역관'은 조정에서 중국에 사신으로 따라 갈 때 공식적인 여비를 지불받지 않고, 한 사람이 80근의 인삼을 가져가 쓰게 한 탓에 역관은 중국의 골동품이나 사치품을 사다 국내에서 팔면 몇 배의 장사가 되었다.

 

그렇다보니 역관들은 무역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게 되었고 알게 모르게 그들은 한양의 돈줄이 되었다. 지난 7월 스무 이튿날, 조회가 열리자 마자 송명하가 자신의 벼슬을 바꿔달라 전하께 아뢴 일이 있었다.

 

"전하, 대사간 송명하 아뢰옵나이다. 신이 압록강 강안(江岸)에서 불법무역을 감시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었던 바 내패(內牌)가 꽂힌 봉물을 번연히 보면서도 조사하지 못한 허물이 크옵니다. 그 당시 역관 장인수가 사신을 수행하는 동료들 이름을 끌어내 사신 행차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 하여 봉물짐을 수색해야 하는 형관(刑官)이 막아서는 바람에 제 직분을 수행치 못했으니 어찌 신이 관직을 수행할 수 있겠나이까. 하오니 전하, 소임을 감당하지 못한 신의 관직을 바꾸어 주십시오."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널 때 화물 50여 바리에 내패가 꽂힌 걸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는 복명이었다. 불법무역을 심문당할 위기에 처한 역관 장인수가 동료들 이름을 끌어내 일을 엉뚱한 쪽으로 끌고 가는 바람에 형관이 급히 말려 조사를 못한 게 그 원인이었다.

 

내패는 내수사의 짐이란 꼬리표다. 그러나 그게 역관 김주서(金周緖)의 것이란 걸 알았지만 섣불리 손댈 수 없었다. 그가 대비전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걸 수행 행차에 나선 자라면 모르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궐내의 업무공간 대청에 몸을 풀 때, 조회 시간에 전하께선 역관 김주서를 감싸고 나섰다.

 

"중신들은 들으라. 과인이 조사해 보니 역관 김주서가 대비전 일을 거들고 있다 하나 지금까진 그런 정황이 나타나지 않았다. 김주서가 강을 건널 때 50바리였다면 왜 그때 조사하지 않고 지금에야 시끄럽게 구는가. 다시 한 번 내패에 대해 시끄럽게 한다면 그 소란스러움을 엄히 따지리라."

 

물론 이 날의 일에 사관은 김주서 이름이 나타내지 않았지만 기록 끝에 '성명을 끌어낸 자는 역관 김주서로 그는 대비전 사람이다'라고 단서를 붙였다. 소식을 전해들은 김주서는 자신의 집 사랑채에서 손님을 맞이하며 껄껄거렸다.

 

"아하하하, 괜히 그러는 게야. 내가 대비마마의 총애를 받다 보니 공연히 시새움이 생겨 날 흔들어 보지 뭔가. 나의 조부는 종계변무(宗系辨誣)로 공을 세운 홍순언과 함께 역관 일을 했었네. 홍순언이 광국공신의 봉함을 받았지만 평생 역관이란 딱지는 떼지 못했어. 눈앞의 이익보단 항상 나랏일이 먼저였어도 말이네. 그러니 내가 어찌 대비전의 자금줄이겠는가. 할 일 없는 자들이 공연히 그러는 게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지만 김주서의 능청엔 얄미운 거드름이 피어 있었다. 그 옛날 홍순언은 나라에 공을 세워 광릉공신에 2등 당릉부원군이 되었다. 그러나 50바리 봉물짐을 거뜬히 처리한 김주서는 대비전에서 '궤보요(簂步搖)'를 받았다. 겉으로 보면 별일 아닌 것 같지만 김주서에게는 대단한 영광이었다.

 

역관이 비록 천시 받았지만 나라의 사절단이 되면 다르다. 문관인 정사(正使)는 정식적인 국서를 받은 것으로 끝나지만, 역관은 배후에서 절충하는 게 한둘이 아니다.

 

사신들이야 한두 번 오가므로 인맥을 쌓을 기회가 없었지만 배후에서 일을 하는 역관은 인맥이 중요한데다 때로는 금품이 오가는 일이 벌어진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종계변무' 때문에 열대여섯 명의 사신이 중국을 다녀왔지만 소득이 없었다.

 

'종계변무'가 뭔가? 이것은 왕실의 계보가 잘못된 걸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이 일이 지지부진하자 선조 임금이 노해 교지를 내렸었다.

 

"종계변무가 지지부진한 것은 역관의 죄가 크다. 이번에 가서도 허락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수석 역관 한 사람은 반드시 목을  베겠다."

 

서슬이 시퍼런 명이 떨어졌으니 누가 중국에 건너가려 하겠는가. 모두 눈치만 살피며 꽁지를 말아감을 궁리뿐이었다. 그렇다면 '종계변무'의 문제는 뭣 때문에 생긴 것인가. 이것은 고려말의 정치사항과 관계 깊은 일이다.

 

공민왕이 피살되자 재상 이인임이 나이 어린 우왕을 세웠는데 명나라 사신 채빈이 본국에 돌아가 공민왕 피살 사건을 보고하면 그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올까 염려하여 중도에 사신을 살해하고 정도전 등의 친명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누렸다.

 

그 후 이성계가 최영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이인임을 유배 보내자 이성계의 정적 윤이와 이초가 명나라로 망명해 '이성계가 친원파 권신 이인임의 후사'라고 모함했다. 명나라에선 이 말을 그대로 믿고 그들의 실록과 역사서에 그대로 기록했다.

 

이것은 조선왕실로 봤을 때 큰 모욕이었다. 태조뿐 아니라 대대로 사신을 보내 바로잡으려 했으나 명나라에선 여러 이유를 들어 수정해 주지 않았으므로 이 일은 가장 큰 외교 현안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선조는 '종계변무'의 일이 해결되지 않는 건 역관이 사실을 그대로 알리지 못한 허물 탓이라 하여 이번에 보낸 사신 행렬의 수석 역관 하나를 목베겠다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이렇게 되자 역관들은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감옥에 갇힌 홍순언을 밖으로 풀어낸 일이었다.

 

"그래, 홍순언이 살아서 옥문 밖으로 나올 희망은 없다. 그가 빚진 돈을 우리가 갚아주고 나오게 해 중국으로 보낸다면, 비록 죽는다 해도 한이 남을 리는 없겠지."

 

모임을 가진 역관들은 뜻을 결정해 감옥에 갇힌 홍순언에게 알리자 그 역시 허락하여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홍순언, 이 사람은 젊을 때 뜻이 크고 의기가 있었다. 역관 일을 하면서도 대범한 행동은 자주 눈에 띄었다.

 

한번은 북경으로 가는 길에 퉁주에 이르러 청루에서 지낼 때그곳 청루에 있는 여인 중에 유난히 하얀 옷을 입을 여인을 발견하고 가까이 불러 까닭을 묻자 여인이 말했다.

 

"첩은 본래 절강 사람인데 아버님이 북경에서 벼슬살이 하다 불행히 염병으로 어머니까지 돌아가셨습니다. 나의 처지가 나그네 길이어서 관(棺)이 여관집에 있지만 첩이 한 몸뿐이라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낼 돈이 없어 부득이 몸을 팔게 됐습니다."

 

말을 마친 여인은 목이 메어 울며 서럽게 울었다. 홍순언은 필요한 비용이 얼마인지를 물었다. 장사 지낼 비용이 삼백금이란 말에 돈자루를 털어 주었지만 여인은 가까이 하지 않았다.

 

여인이 몇 차례나 이름을 물었으나 말해주지 않자 여인은 슬픈 목소리로 울먹였다.

"대인께서 성명을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첩 또한 주시는 걸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홍씨'라고만 말해주고 방을 나섰다. 동행들은 물정 모르는 짓이라고 손가락질 하며 비웃었다. 홍순언은 조선에 돌아와 공금을 횡령하고 갚지 못한 것 때문에 여러 해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반면에 그 여인은 예부시랑 석성(石星)의 후처가 되어 우리나라 사신을 볼 때마다 홍역관이 왔는지를 묻고 또 물었다.

 

선조 17년인, 갑신년(甲申年) 5월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홍순언은 정사 황정욱을 따라 북경에 도착했다. 조양문 밖에 이르니 비단 장막이 구름처럼 펼쳐 있어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한 기병이 쏜살같이 달려 나와 정중히 묻는다.

 

"홍역관이 누구십니까? 공께서 먼 길 오신다는 말을 듣고 예부의 석시랑이 부인과 함께 나오십니다."

 

잠시 후에 보니 계집종 여나믄 명에 에워싸인 부인이 장막 안에서 나오자 홍순언이 크게 놀랐다. 석성이 말한다.

 

"이 사람은 저의 아냅니다. 당신이 통주에서 은혜 베푼 것을 아십니까. 아내의 말을 들으니 당신은 참으로 의로운 선빕니다. 부인께서 절을 하는 건 보은의 절이니 당신이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는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연회의 중간에 홍역관이 무슨 일로 왔는지를 석성이 묻는다. 홍순언이 사실대로 말하자 석성은 그가 객사에 머무는 한 달 동안 조선 정부가 청한 대로 모든 기록을 수정해 주었다.

 

홍순언이 돌아올 때 석성의 부인은 자개상자 열 개에 각각 비단 열 필을 담아줬으나 받지를 않자 깃대를 든 자가 압록강까지 와서 비단을 놓고 갔다. 비단 끝에는 모두 '보은(報恩)'이란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이것은 역관 홍순언 개인의 일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일의 형편에 따라 운수를 불러들일 수 있는 계기란 게 따로 있었다. 홍순언과 동행했던 다른 역관들은 그들이 북경 가는 길에 청루에 들르면 '책 읽어주는 남자'를 만나고 게 하나의 버릇이었다.

 

그들이 비교적 나이가 지긋하였기에 전기수(傳奇叟)라고도 하고 독사인(讀史人)이라 불렀다. 전기수라 한 것은 그들이 전기소설을 잘 읽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고, 독사인은 역사의 깊은 곳에 숨어 잠들어 있는 기록들을 찾아 읽어댄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주서의 조부는 홍순언과는 달리 얘기께나 좋아했던 것으로 보이는 역관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의 후손 김주서 역시 조부가 남긴 젊은 남녀가 경계해야 할 '삼고육파(三姑六婆)'에 관심이 많았다.

 

"에헤헤, 조부님이 남기신 이 책은 '사람의 집에 이것 하나라도 있으면 간도(姦盜)를 불러들인다'는 <철경록(輟經錄)>에서 나온 말이지. 삼고육파가 뭔가? 삼고는 여승을 나타내는 니고, 여도사를 가리키는 도고, 점쟁이 여자인 괘고지. 그런가 하면 육파는 방물장수인 아파, 중매장이인 매파, 무당인 사파, 뚜쟁이 여편네인 건파, 여의사인 약파, 산파인 온파 등이야. <철경록>의 저자는 이러한 아홉 부류를 '분란의 싹'으로 규정지었어."

 

아무래도 이들은 세상의 단맛 쓴맛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주서는 한 수 더 떴다. 그 자신 50바리의 봉물짐을 해결한 공으로 대비전에서 궤보요(簂步搖)를 받은 뒤로 출입하는 곳도 예전과는 다른 곳이었다.

 

[주]

∎전기수(傳奇叟) ; 책 읽어주는 남자

∎철경록(輟耕錄) ; 명나라 초기에 간행된 경계해야할 사람의 기록

∎궤보요(簂步搖) ; 몸에 두른 장신구

 

2011.04.05 08:54 ⓒ 2011 OhmyNews
#추리,명탐정,정약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국가 수도 옮기고 1300명 이주... 이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2. 2 딸이 바꿔 놓은 우리 가족의 운명... 이보다 좋을 수 없다
  3. 3 '100개 눈 은둔자' 표범장지뱀, 사는 곳에서 쫓겨난다
  4. 4 전화, 지시, 위증, 그리고 진급... 해병 죽음에 엘리트 장군이 한 일
  5. 5 '헌법 84조' 띄운 한동훈, 오판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