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에게 성폭행 당한 막순이....현종때문?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짝패>, 세 번째 이야기

등록 2011.04.11 12:38수정 2011.04.11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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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짝패>의 막순(윤유선 분). ⓒ MBC

19세기 중엽을 배경으로 하는 MBC 드라마 <짝패>는 노비와 주인의 관계에서부터 이야기를 꺼냈다. 노비 막순(윤유선 분)이 남자 주인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아이를 임신했고, 여자 주인의 보복이 두려워서 뱃속 아이와 함께 먼 곳으로 도주했다는 것이 스토리의 출발점이다.

드라마 <짝패>를 포함해서 각종 사극에 나오는 노비와 주인을 보면서, '옛날 사람들은 현대인들에 비해 인권 관념이 현저히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낳는 후손까지도 대대로 주인을 위해 '복무'해야 했다니!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복무(服務, 푸우)라는 말. 중국 여행 중에 흔히 듣는 말이다. 한국인들은 식당에서 "여기요!", "이모!" 등을 외치지만, 중국인들은 주로 "복무원(푸우웬)!"을 외친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왠지 신분적 열등감을 느끼는 식당 직원들이 많다. 푸우웬의 처지나 전망이 일반인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당 직원의 감정을 고려해 "푸우웬!" 대신 그냥 "니하오!"라고 부르는 사려 깊은 중국인들도 있다.

그런 '푸우웬' 소리를, 똑같은 식당에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후손까지 대대로 들어야 한다면, 이 얼마나 기운 빠지는 일일까? 옛날 노비들은 그런 데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종신계약이나 신체포기각서 같은 것에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현대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놀라지 말아야 한다. 고대인들 역시 현대인들 못지않게 인간의 존엄성을 깊이 존중했다. 아니, 고대 동아시아들은 현대 서양인들보다 이 문제에 있어서 훨씬 더 고차원적인 사람들이었다. 동아시아의 정치 매뉴얼이자 국민 필독서였던 <예기>에는 각각의 절기마다 군주가 해야 할 임무를 정리한 '월령' 편이 있다. 이 부분을 읽다 보면, 인간과 동식물과 우주 전체를 일체로 파악한 동아시아인들의 인식세계를 엿볼 수 있다. 

초목이 싹을 피우는 입춘에는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 음력 2월에는 식물의 싹을 보호하고 동물의 새끼를 기르며 고아들을 양육하라 등등.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까지 백성처럼 생각하고 보호하라는 <예기>의 사상은, 사고의 틀을 '인간'에 한정하는 서양의 인권개념보다 훨씬 더 철학적이고 훨씬 더 절절하다. 이런 사상을 가진 지역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래도 한·중·일 3국에서 사농공상을 차별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 그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격의 차별'이 아니라 '직분의 차별'이었다. 어떤 계층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 어떤 계층은 어떤 집에서 살아야 하는가, 서로 다른 계층끼리 만나면 어떤 예법을 취해야 하는가 등이 차별의 내용이었다. 이런 외형적 차별을 통해 직분을 구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질서와 분업을 구현해야 한다는 게 동아시아인들의 관념이었다.


하늘이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만들고 임금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통치한다는 천명사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하늘이 어떤 인간은 귀하게 만들고 어떤 인간은 천하게 만든다'는 관념이 생겨날 여지는 없었다. 사농공상의 차별은 그저 직분의 차별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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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가 재산으로 취급된 분재기(分財記). 분재기는 상속재산의 처분에 관한 문서로서, 가옥·토지·노비 등의 처분에 관한 사항을 담고 있다. 사진은 율곡 이이 가문의 분재기(分財記). 출처는 고등학교 <국사>. ⓒ 교육인적자원부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이 노비제도를 승인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특수한 경우에 특정 부류의 인격을 깎아내리는 것을 정당화하는 그 시대 나름의 명분이 작용했다. '이런 경우에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종속돼도 괜찮다'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 중에 대표적인 것은 채무불이행, 중대범죄, 반역, 패전 등이다.

고대인들은 채무를 갚지 못하거나 나라를 배반하거나 중대 범죄를 저지른 사람 혹은 패전국의 백성에 대해서는 일반인보다 못한 대우를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로 남에게 신분적으로 종속되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중국 춘추시대를 배경으로 한 와신상담(臥薪嘗膽) 고사에서, 월나라왕 구천은 오나라왕 부차와의 전쟁에서 패해 평화를 구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기> '월왕 구천' 편에 따르면, 구천은 부차에게 사신을 보내 자기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들까지 오왕의 노복이 되겠노라고 말했다. 

이 사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고대인들은 채무불이행·중대범죄·반역·패전 등으로 도덕적 결함을 갖게 된 사람은 존엄성을 제한당해도 괜찮다고 인식했다. 특수한 경우에는 인간의 존엄성이 제한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국가가 노비제도를 공인하게 된 '주요 요인'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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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 송광사의 노비문서. 고려 충렬왕 때 수선사(훗날의 송광사) 주지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노비를 절에 바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는 고등학교 <국사>. ⓒ 교육인적자원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요 요인'일 뿐이다. 국가가 반드시 그런 이유만으로 노비제도를 공인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도덕적 결함이 없는 사람들을 노비로 만드는 것까지 공인해 주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국민복지 차원에서 노비제도를 지지한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유기아(遺棄兒) 즉 버려진 아이들에 관한 조선 후기의 국가정책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인조 15년 2월 12일 자(1637.3.8) <인조실록>에 언급된 바와 같이, 조선시대에는 유기아를 보호하는 사람이 그를 자기 자식처럼 양육하도록 했다. 그것은 일종의 법률상 의무였다. 이불에 싸인 신생아를 남의 집 대문 앞에 남몰래 버려두고 달아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법률적 강제가 도리어 유기아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규모 기근이 자주 발생하자 유기아를 기피하는 백성들이 많아졌던 것이다. 자기 입에도 풀칠하기 힘든 판국에 유기아를 자식처럼 거두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대문 앞이나 길가에 버려진 신생아가 그대로 죽어버리는 사례가 많았다.

복지 재원이 부족해서 민간의 자발적 구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유기아를 기피할 경우 정부로서는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안해낸 방법이 '유기아를 거두는 사람은 그 유기아를 노비로 삼을 수 있다'는 유인책이었다. 현종 11년 8월 17일 자(1670.9.30) <현종실록>에 이런 기록이 있다.

'백성들을 모집해서, 그들에게 유기아를 거두어 노비로 삼도록 했다. 그때 떠도는 걸인들이 길에 가득했다. 황망하여 살 곳을 잃고 영아를 유기하는 일이 길에 이어졌다.'

이런 법령은 이후에도 자주 공포됐다. 대기근이 발생하고 유기아가 속출될 때마다 이런 법령이 발포된 것을 보면,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노비를 만들 욕심에 유기아를 거두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이런 법령을 지방에서만 시행했지만, 경제난이 가중되고 유기아가 속출하자 나중에는 수도 한성에서까지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영조 8년 10월 6일자(1732.11.23) <영조실록>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한성에 있는 유기아들마저 일반 백성들에게 떠넘겼으니, 중앙정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채무불이행·중대범죄·반역·패전뿐만 아니라 복지정책으로 인해 노비가 대거 양산되는 경우도 있었다. 사회복지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국가가 의도적으로 노비제도를 부추긴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국가가 노비제도를 공인한 데는 이처럼 여러 측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어떤 명분으로 노비제도를 공인했든 간에, 그 모든 명분을 관통하는 본질적 동기가 하나 있다. 그것은 생산을 담당하는 주력계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원하든 않든 간에 노비제도를 공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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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축제에 참가한 러시아 농노들의 모습. 출처는 고등학교 <세계사>. ⓒ 금성출판사


현대 사회에서는, 기업에 근무하는 '노동자'가 GNP의 대부분을 담당한다. 서양 중세에는 농노가 그 역할을 맡았고, 조선시대에는 '노비'나 '소작인'이 그런 역할을 담당했다. 부유층의 수중에 들어가는 노비의 숫자가 증대되는 것은 국가로서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주계층에게 예속된 그들이 GNP의 상당부분을 담당하는 것이 현실이었기에, 국가는 농지소유자들로부터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라도 노비제도를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늘날처럼 임금을 지급하고 일꾼을 고용하는 방식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당시로써는, 노비제도를 막아버리면 생산현장에서 일꾼을 확보할 길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국가의 조세수입까지 막힐 수밖에 없었다. 국가가 노비의 지위를 법으로 인정하고 그들에 대한 차별을 승인한 것은 그 같은 경제적 동기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이라고 해서 노비제도의 불합리성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드라마 <짝패>의 시대적 배경인 철종 이후 시기에는 노비제도의 불합리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일정 정도 형성되어 있었다.

1801년에 공노비 일부가 해방되고 1894년에 노비제도 전체가 혁파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중간 시기인 철종 시대에는 인간을 다른 인간의 지배 하에 두는 노비제도에 대한 거부감이 사회적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
#노비 #유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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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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