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애가 선물한, 아빠만을 위한 '맞춤 세트'

아빠한테 꼭 필요한 것을 선물한 딸... 다 컸구나

등록 2011.04.12 11:32수정 2011.04.12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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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끝나는 시간이 늦어졌다며 딸 윤경이가 들어온 시간이 밤 11시쯤이었습니다. 중간고사 대비 공부를 하느라고 늦게 끝난 것 같습니다.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전등이 꺼졌습니다. 앙증스럽게 보이는 초콜릿 케이크 위에 촛불이 켜졌습니다. 그리고 윤경이가 아내와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아빠(당신)의 생일 축하합니다."

 

요란한 손뼉 뒤에 윤경이가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아빠, 마음에 들지 모르겠어요. 아빠가 좋아하시는 걸로 준비했어요."

 

저는 언뜻 윤경이가 요 며칠 새 좀 무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께는 엄마의 생일이라며 케이크와 선크림 등 화장품을 생일 선물로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또 이틀 뒤인 어제 아빠의 생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은 것입니다. 뻔한 용돈에 지나친 출혈이지 싶습니다. 그래도 윤경이의 마음만은 언제나 넉넉합니다.

 

윤경이가 아빠에게 준 생일 선물이 뭔지 궁금하시지요? 차례대로 적어 보겠습니다. 케이크, 설교용 공책, 흑청홍 삼색 볼펜, 커터(사무용 칼)입니다. 즉석에서 풀어보라는 성화에 못 이겨 선물을 열어본 저는 윤경이가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선물로 준비한 것이 기뻤습니다.

 

때 지난 수첩용 다이어리를 설교용 노트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수명이 다 되어 갑니다. 몇 장 남지 않았습니다. 조밀하지 못한 성격이라고 지적당하는 윤경이가 어떻게 이런 사정을 알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사무용 칼도 저에게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칼 쓸 일이 있을 때마다 부엌으로 가서 주방용 가위를 가지고 와 칼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거든요. 아마 이것을 윤경이가 눈여겨보아두었던 듯합니다.

 

흑청홍 삼색의 볼펜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 붙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필기도구에 민감한 편입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글씨를 개성 있게 잘 썼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당시 주민등록증을 빼닮은 유사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어른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중학교 때는 학교 행사에 상장이 미처 준비되지 않아 제가 붓글씨로 상장을 급히 만들어 사용한 적도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제 글씨 자랑을 스스로 하느냐 하면 필기도구에 관계된 징크스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주위 사람들로부터 핀잔을 듣는 일이 있습니다. 민족주의자연하는 사람이 필기도구는 어김없이 일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니볼 0.5mm', '하이테크0.3mm'가 제가 애용하는 필기구입니다. 다른 것으로 글을 쓰려고 하면 비틀비틀 기준을 잡을 수 없어 애를 먹습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윤경이가 필기구로 일제를 택해 주었군요.

 

다른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고 그에 맞는 선물을 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선물은 마음의 표현이라고 하는데, 주고도 별로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선물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가끔 주위의 지인들에게 선물할 일이 있으면 주로 책을 골라 우편으로 발송합니다. 선물의 종류가 책으로 결정되어도 어떤 책이 상대방에게 꼭 필요할까를 가늠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 사람의 살아온 모습이며 지향하는 세계관 그리고 그의 인간 됨됨이에다 갖고 있는 마음까지 헤아려야 하니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달한 선물은 고마운 인사로 되돌아옵니다.

 

윤경이의 선물도 아빠에 대해 많은 생각 끝에 준비된 것입니다. 목회자인 아빠, 공부하는 아빠, 책을 읽을 때 늘 색색 밑줄을 긋는 습관, 그리고 읽는 데 시일이 좀 걸리는 책은 꼭 표지를 싸는데, 그 일에 필요한 사무용 칼. 이렇게 보면 윤경이가 선물한 것은 따로따로 구입한 것이지만 저에게는 한 세트가 되는 셈입니다.

 

코흘리개 윤경이가 훌쩍 커서 벌써 아가씨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몸만 큰 것이 아니라 생각까지 부쩍 성장했습니다. 아빠의 현재 상황을 읽고 생일 선물로 준비한 내용물들을 볼 때 그렇습니다.

 

'고가의 선물은 아닐지라도, 외모를 장식하고 형식을 강조하는 선물은 아닐지라도 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선물한 윤경이에게 나는 어떤 것을 선물할까?' 이것이 몇 달 뒤 있을 윤경이 생일 때까지 제가 연구해야 할 과제입니다.

2011.04.12 11:32 ⓒ 2011 OhmyNews
#생일선물 #딸 #필기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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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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