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릴 건 사과와 삶은 달걀뿐...고맙습니다

크레인 농성 김진숙씨 지켜주는 한진중 노조원들을 만났습니다

등록 2011.04.23 15:28수정 2011.04.23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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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성장으로 가져간 사과와 달걀.

농성장으로 가져간 사과와 달걀. ⓒ 강정민


떨린다. 방향을 틀어버릴까? 농성장을 향해 걷고 있는 나, 농성장이 처음이다. 가서 뭐라 말해야 하나?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 그럼 사람들이 다 나만  쳐다 볼 텐데 그건 자신 없다.

분당 정자역 3번 출구 앞 인도에 상복을 입은 남자 아홉 명이 스티로폼 깔개 위에 나란히 앉아있다. 이 사람들, 벚꽃이 흩날리는 아름다운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다. 어느새 내 몸은 그들 옆에 와 있다. 아무도 내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신발은 안 벗고 무릎만 깔개 위에 올려놓고 앉아 들고 간 가방을 내려 놓았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가 내뱉은 말은 "이거 좀 드세요"였다.

주섬 주섬 가방에서 수건으로 싼 삶은 달걀 봉지를 꺼냈다. 삶은 달걀, 참 촌스럽다. 사과와 스테인리스쟁반, 과도도 꺼냈다. 그리고 사과를 잘랐다. 멋쩍은데 다행이다. 할 일이 있으니. 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던 남자 분이 "어디서 오셨어요?"하고 묻는다.

"저는 그냥 김진숙님 책을 읽은 팬입니다."

조합원들이 먹을거리 주변으로 모여든다.

"얼마 전에 트위터에 목요일 날 오신다고 올리셨던 그 분이세요?"
"네."
"정말 이렇게 찾아 오실 줄 몰랐는데. 오래간만에 사과 먹으니 맛있네요."

빵집이 어디있냐 물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린다. 사진을 찍으며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 있는 조합원들에게 자랑해야지 하신다. 즐거워 하는 조합원들의 모습을 보내 내 마음도 뿌듯하다.


내가 조합원의 아내였다면 나는 어땠을까?

 김진숙씨 모습이 담긴 투쟁 홍보물

김진숙씨 모습이 담긴 투쟁 홍보물 ⓒ 강정민


 한진중공업 노조원들이 게시해놓은 홍보물을 보는 사람들 모습

한진중공업 노조원들이 게시해놓은 홍보물을 보는 사람들 모습 ⓒ 강정민


한진중공업 해고자 김진숙씨가 크레인에 오른 지 93일째(4월 8일) 되던 날 열린 집회 동영상을 보았다. 동영상 속 김진숙씨가 절규하고 있었다. 26살에 해고되어 27년째 해고자인 김진숙씨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를 막겠다고 크레인에 올라 내려오지도 못하고 소리만 지르고 있다.


"이 크레인을 움직여서라도 떠나는 조합원들의 앞을 가로막고 싶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고, 저는 아직도 이 85호 크레인을 떠나지 못할 김주익씨의 영혼을 안고 내려가겠노라 약속했습니다.

93일이 지났습니다. 93일 동안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했습니다. 주익씨는 여기서 129일을 어떻게 견뎠을까. 그 모진 태풍을 어찌 견뎠을까. 얼마나 집에 가고 싶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 8년 전 김주익·곽재규 두 사람의 장례를 치르면서 우리가 다짐했던 맹세가 옳았다면 더 버텨야 합니다. 8년 전 우리가 쏟았던 피눈물이 진실이었다면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수십 년 정든 동료들을 돈으로 갈라놓은 저 자본을 왜 우린 한번도 못 이깁니까."

그 동영상을 보면서 농성대오를 빠져나간 조합원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크레인에 올라 있는 김진숙씨를 두고 떠나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어? 도대체 김진숙씨가 그곳에 누구를 위해 올라갔는데... 갑자기 화가 났다.

35m 위 크레인에서 떠나가는 조합원의 모습을 지켜보던 김진숙씨는 얼마나 애가 타고 속 상했을까? 내려가 잡고 싶었겠지.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떠나간 조합원은 왜 그랬을까? 집에서 농성장의 조합원들에게 전화를 했겠지. 날아오는 카드명세서가 연체독촉서가 하루 하루 조합원과 가족을 현실에 찬 바닥에 내동냉이 쳤겠지.

내가 조합원의 아내였다면 나는 어땠을까? 그 약속을 굳게 지키라고 남편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 김진숙씨가 쓴 <소금꽃나무>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내가 넉 달째 돈을 가져오지 않는 남편에게 뭐라 말했을까? 아이가 없었다면 약속을 지키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있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어리다면 나는 자신이 없다. 남편을 향해 돈문제 가지고 날카롭게 말하지 않았으리라 장담할 자신이 없다.

사람이 나쁜 게 아니다. 의리를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통장 잔고가 달랑 달랑 하는 엄마가 어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정말 서러운 일이다. 정말 잔인한 일이다. 아픈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엄마가 아이 걱정보다 지갑에 돈이 얼마 있나 걱정 한다면 잘 먹는 아기를 둔 엄마가 분유 값 걱정에 한숨을 쉰다면 이보다 더 잔인한 일이 있을까? 김진숙씨에게 미안하지만 크레인을 뒤로 하고 떠나는 조합원의 처지가 서글프게도 나는 이해가 되었다.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한진중 농성장으로 향했다

그들이 이해 될수록 남아 있는 조합원들과 가족들이 고마웠다. 그 서러움의 그 벼랑 끝에 서 있으며 서로의 처지를 다독이고 약속을 지키고 있는 그들이 경이로웠다. 김진숙씨를 지켜주는 그들이 고마웠다.

크레인에서 300km 떨어진 곳에 살면서도 김진숙씨를 걱정하는 내가 실은 100일이 되는 동안 단 하루, 단 한 밤, 단 한 시간도 김진숙씨를 지킨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 몸을 내어 크레인을 지켰던 것은 김진숙씨가 사랑했던 조합원들이었다. 그건 조합원들의 몫이었다. 한진중공업의 조합원들은 벌써 몇 번인가 서울로 올라와서 며칠씩 길거리에서 잠을 자며 홍보전을 하고 있다. 조합원들이 분당과 여의도에 있단다. 분당이면 우리집에서 가 볼 만한 거리다.

목요일(21일) 아침, 남편과 아이들 아침을 차려주고 달걀을 삶았다. 그리고 8시 30분에 집에서 나왔다. 일원동이 일터인 아는 분의 출근 차를 5살 막내와 함께 얻어 탔다. 다시 일원역에서 전철을 타고 성남으로 가 친정에 막내를 맡겼다. 혼자 사과와 삶은 달걀을 들고 분당 정자역으로 갔다. 정자역에는 4월 27일 보궐선거에 나선 한나라당 후보 강재섭씨의 선거사무실이 있다. 그곳에서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이 정리해고의 부당성을 알리면서 정부 여당의 행동을 촉구하는 홍보전을 하고 있었다.

한 조합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내와 돈 때문에 싸우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작년 11월 12월은 부분파업으로 월 30만 원 정도의 급여를 받았고 올해 들어서는 전면파업으로 월급을 한 푼도 못 받고 있다고 한다. 아내가 1월부터 취업해 받는 월급과 그간 모아 둔 돈으로 생활을 하고 있단다. 돈 문제 때문이 아니라 다른 문제 때문에 싸운다고 했다. 농성장에서 2주 생활하다가 토요일 하루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해 주는 집 밥이 먹고 싶지만 직장일과 가정일로 힘들었던 아내는 외식을 하자고 해 싸운단다.

김진숙씨의 시계는, 26살에 멈춰버렸다

 분당 정자역 옆에서 유세를 벌이고 있는 강재섭 한나라당 분당을 후보 유세차량

분당 정자역 옆에서 유세를 벌이고 있는 강재섭 한나라당 분당을 후보 유세차량 ⓒ 강정민


 한진중노조원 뒤편에 한나라당 선거운동원이 보인다

한진중노조원 뒤편에 한나라당 선거운동원이 보인다 ⓒ 강정민


농성장 주변이 시끄럽다. 한나라당 강재섭 후보의 유세가 있는 날이란다. 파란색 띠를 두른 아줌마들이 점점 늘어난다. 남자들도 노인들도 삼삼오오 짝을 이뤄 공원에 자리를 잡는다. 한진중 노조원들도 바빠진다. 전철역 주변과 공원에 홍보 판넬을 들고 서 있는다. 점심시간에 나온 사람들이 지나며 줄에 걸린 홍보물을 유심히 본다. 12시가 다 되었다. 돌아갈 시간이다. 친정엄마는 1시쯤 외출을 하신다고 했다. 조합원들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진숙이란 사람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해직된 26살에 멈춰있는 사람. 27년간 새해 소원이 같은 사람. 고1이었던 내가 20살 대학생이 되고, 남자 만나 연애도 하고, 취업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며 살아 온 27년 기간 동안 김진숙씨는 오매불망 복직만 바라고 살아왔다.

해직과 함께 김진숙씨의 시계는 멈췄다. 시간이 멈춘 김진숙씨가 동료들의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서 지금 스스로 한 평 좁은 공간에 자신의 몸마저 가두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김진숙씨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힘들다. 그래서 차마 왜 고마운지 그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그냥 고맙습니다. 그 말만 아홉 번 하고 돌아왔다.
#한진중공업 #김진숙 #상경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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