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현호삭'을 아십니까

이름 부르면 추억이 살아난다

등록 2011.05.06 18:38수정 2011.05.06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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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트래킹 하는데 최적의 도시다. 어디서든 시내버스 대여섯 구간만 타면 피톤치드 가득 찬 소나무 숲속 길에 들어설 수 있다. 삼각산, 군왕봉, 조대 뒷산 깃대봉, 옥녀봉, 제석산, 황새봉, 장원봉--.  높이 이삼백 미터 야트막한 동산들이 도심을 쭉 둘러싸고 있다.


일주일에 한 두 차례 야산 등행을 즐긴다. 오늘은 지산유원지에서 숲으로 들어간다. 약간 가파른 오르막, 20분쯤 오르니 깻재다. 다음부터는 능선 따라 순탄한 소나무터널 길이다, 산보하듯 쉬엄쉬엄 40분, 장원봉에 이른다.

숲속엔 작은 꽃들이 많다. "내려올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시인이 '내려올 때' 본 <그 꽃>은 무슨 꽃이었을까.

인생도 역시 올라갈 때보다는 내려올 때 잘 보인다. 풀꽃들도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나이 들면서 눈에 뜨인다. 자줏빛 나팔을 줄줄이 단 조그만 풀꽃, 그늘진 곳에서 무더기로 바람에 나팔거린다. 또 초록색 받침대위에 진노랑 꽃잎을 다섯 개씩 화사하게 점점 찍어놓은 것도 있다. 

집에 돌아와 <무등산 야생화> 도감을 펼쳐본다. 이름을 알고 싶어서다. 보라색 꽃은 '현호삭玄胡索'이다. 이름이 특이하다. 노랑 꽃잎은 '양지꽃'인 것 같다.  

<야생화> 저자는 자신이 들꽃에 미치게 된 계기를 서문에 썼다. 신문사 사진기자 시절, 그는 시골 농가 돌담을 지나다 눈부시게 노란 꽃을 발견했다. 열심히 그 꽃을 이모저모 찍어서 신문사로 돌아와 그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 흔한 민들레다. 그동안 수없이 민들레를 보았을 터이지만 그냥 무심하게 지나쳤을 거다. 서른이 되어서야 민들레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접했다. 이름도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생태사진가가 되었다.


나는 언제 민들레의 아름다움을 처음 깨달았을까? 쉰이 넘어서였다. 1997년 IMF로 1년간 휴직 처분을 받아 직장을 쉬고 있었다. 걸어서 무등도서관 가는 길에 가로수 밑둥에 '황금빛 꽃'을 보았다. 그건 내가 어릴 적부터 자주 보았던, 물론 이름도 잘 알고 있던 민들레였다. 그 다음 부터는 그 흔한 민들레가 아니었다. '민들레'를 만나면 '황금빛 충격'이 아리하게 가슴속에서 살아난다.

광주시내에서 꽤 유명한 전통찻집에 들렀을 때다. 탁자 위, 가느다란 병에 꽃이 한 송이 꽂혀있다. 방울 같은 자줏빛 초롱을 대여섯 개 가지런히 늘어뜨린 모습이 청초했다. 이름이 알고 싶었다. 여종업원은 "몰라요" 덤덤하게 한 마디 뿐이다.


멀리 서 있는 고참 종업원에게 다시 물었다. 그녀는 "들꽃이에요"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 '굳이 이름을 알려고 하느냐?'는 핀잔 섞인 투로 들렸다.

정말 왜 굳이 이름이 알고 싶어졌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언젠가 그 이름을 부르면 그 꽃이 주던 신선한 느낌이 추억으로 되살아 날 것 같아서였다. '아는 만큼 느끼게 되고, 느낀 만큼 사랑하게 된다'지 않는가.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다가와 꽃이 되었다" 김춘수는 그의 시<꽃>에서 '이름을 불러주면' 사람도 다가와 꽃으로 피어난다l고 말한다.

몇 년 전 일이 생각난다. 담양대덕을 지나다 야생화 농원이 길 옆에 있어 들렀었다. 재미있는 것은 입구에 붙여놓은 알림쪽지이다. "야생화 이름을 10개 외우면 야생화 분 하나를 드립니다"라고 씌어있다. 수 백 종류가 넘는 야생화, 그 중에서 이름 열 개 만 외우라!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다. 꽃 앞에서는 이름이 생각났는데 나오면서 쓰라니 10개를 채우지 못했다.

지금은 그중 몇 개나 기억날까. "현호삭-" 입속으로 한 번 불러본다. 깻재 소나무 숲, 봄바람에 흔들리던 자줏빛 나팔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이슈 투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이슈 투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들꽃 #민들레 #추억 #현호삭 #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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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밥값을 하고 있는가'라는 화두를 풀기 위해 <길이 글인가2>를 발간했습니다. 후반부 인생에게 존재의 의미와 자존감을 높여주는 생에 활기를 주는 칼럼입니다. <글이 길인가 ;2014년>에 이은 두 번째 칼럼집입니다. 기자생활 30년, 광주대학교 겸임교수 16년을 지내고 eBook 만들기와 주역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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