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나루터 '시대의 횃불', 또 하나의 보루될 터

가톨릭신자 500만 명 시대의 허허실실

등록 2011.05.13 11:21수정 2011.05.1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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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라는 이름의 지팡이


사사로운 얘기부터 한마디 하자면, 오래 전부터 몸을 움직일 때는 늘 묵주를 지닌다. 묵주를 항시 차 열쇠 두는 곳에 놓는다. 어디를 가건, 운전을 하건 버스나 지하철을 타건 묵주를 쥐는 버릇이 있다. 

'4'와 '40'이라는 수를 좋아하는 탓에 오래 전부터 묵주기도를 하루 40단으로 설정해놓고 있는데, 대개는 훨씬 더 많이 한다. 매일 오후에 걷기운동을 하는 덕이다. 베트남 전쟁 고엽제 후유증에 의한 '성인병 백화점' 신세라서 매일의 걷기운동은 필수 사항이 되었다. 대개 두 시간 정도를 걷는다. 한 시간을 걸으면 시오리를 걸으니 왕복 30리(12Km)를 걷는 셈이다. 또 한 시간에 묵주기도 4꿰미를 하니 왕복 40단을 하게 된다.

내가 하루 두 시간을 걸을 수 있는 건 묵주기도 덕분이라는 생각을 한다. 묵주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지루하고 힘들어서 두 시간이나 걷기는 어려울 터이다. 또 묵주기도를 하지 않고 그냥 걷기만 한다면 '무미건조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묵주기도를 하며 걷기운동을 하는 것은 일석이조가 된다. 여기에다 여러 가지 좋은 생각들을 얻을 수도 있으니, 그것까지 합하면 일석삼조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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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만 들길 황금물결이 넘실대는 가을 한철에는 천수만 B지구 간척지 들판길을 걷기도 한다. 어디를 걷거나 묵주는 내 걸음을 돕는 지팡이다. ⓒ 지요하


일찍부터 묵주를 내 삶의 '지팡이'로 생각해 왔다. '묵주를 지팡이 삼고'라는 시를 지은 적도 있다. 지팡이는 사람의 걸음을 돕는 사물이다. 묵주기도는 언뜻 보면 성모 마리아님께 드리는 기도 같지만 사실은 '성모 마리아님과 함께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이므로, 묵주는 완벽한 지팡이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삶속에서 내가 직접 하느님께 기도하는 일 이외에 예수 그리스도님의 어머니이시면서 인류의 어머니이신 분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은총인가.

이런 '생각의 꽃'을 소중히 가슴에 안고 또 가꾸며 살기에 매일 걷기운동을 할 때도, 또 어디를 가건 움직일 때마다 묵주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리라.
   
매주 여의도로 안내해 주는 지팡이


지난해 11월 이후부터는 일주일에 하루씩 오후 걷기운동을 하지 않는 날이 생겼다. 한 주간의 첫 날인 월요일이다. 매주 월요일 오후에는 만사제폐하고 서울을 간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천주교 시국기도회 - 거리미사'가 거행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서울 가는 일로 매주 월요일 오후에는 걷기운동을 못하지만, 묵주기도는 오히려 더 많이 한다. 차를 가지고 가건 대중교통을 이용하건 서울을 왕복하는 시간은 걷기운동 두 시간의 곱이 넘는다. 운전을 할 때도 한 손에는 늘 묵주가 쥐어져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버스 안에서도, 지하철 안에서도, 지하도와 지하철 승강장을 걸으면서도 묵주기도를 하니, 월요일에는 묵주기도 100단을 훌렁 넘기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한 주간의 생활 속에서 월요일의 생활이 내게는 가장 절절하다. 또 월요일 오후의 묵주기도가 어느 때의 기도보다도 뜨겁고 애절하다. 여의도 '거리미사' 자체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여의도 거리미사의 세 가지 지향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또 여의도 거리미사에 오시는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모든 형제자매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경기도 양평군 '두물머리'에서 2010년 2월 17일 첫 미사가 봉헌된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오후 3시에 비닐천막 안에서 거행되는 '생명평화미사'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4대강 공사 '속도전' 속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12명 노동자들의 영혼을 위해서도, 또 여주 남한강 도하 훈련도중 바뀐 물살에 치여 숨진 장병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4대강에서 졸지에 무참히 사라져 버린 절경들, 갖가지 어종들의 산란장이며 보금자리였던 강바닥의 모래들, 생명의 소리를 발하던 수많은 여울들, 햇살과 바람이 어울려 노닐던 강변 모래톱과 조약돌과 갈대밭들을 떠올리며 참회의 기도를 한다.

인간의 오만과 탐욕, 무지와 어리석음과 분별없음과 자아도취가 빚어낸 엄청난 자연 파괴의 참상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기도뿐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뼈아프고 절망적이지만, 바로 그 절망 때문에 더욱 열심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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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거리미사' 2010년 11월 이후 매주 월요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거행되는 천주교 시국기도회 - '거리미사'는 오늘의 나를 살게 하는 희망의 등불이다. ⓒ 지요하


많은 사람들의 시선도 접하게 되는 지하철 안에서는 공연히 '천주교 신자 500만 명 시대'를 떠올리기도 한다. 천주교 신자가 500만 명이라면, 전체 국민의 10%가 천주교 신자라는 얘기다. 열 명 중에 한 명은 천주교 신자이니, 지하철 안에서 내 묵주에 눈길을 주는 사람들 중에도 천주교 신자는 있으리라.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묵주를 앞에 내놓고 기도를 하면서 나는 또 한 가지 소망을 가슴에 안는다. 내 묵주를 보고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이 생길지도 몰라. 내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고, 그가 하느님을 모르거나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면 좋은 대화 자리가 마련될 수도 있을 텐데…. 열 명당 한 명 꼴로 천주교 신자들이 있을 테니, 천주교 신자들 중에 내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생겨날지 몰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여의도 '거리미사'를 알려주고 참례를 권유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나 아직 그런 경험은 없다. 다섯 달이 지나도록 또 한 가지 내 소망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현상 속에서도 나는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 때로는 '천주교 신자 500만 명 시대'를 떠올리는 일에서 야릇한 불안과 공포감을 안기도 한다. 지하철 같은 데서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내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기가 쉽지 않은(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현실 속에서 묘한 외로움 같은 것을 느끼기도 한다.

시대의 횃불이 타오르는 여의도 나루터

언젠가 인터넷 매체에서 읽은 글의 특수한 풍경이 떠올라서 괜히 몸이 곱송그려지기도 한다. 어느 성당에서 주일 교중미사 강론 시간에 주례사제가 4대강 사업과 관련하여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관한 말씀을 할 때 한 신자가 벌떡 일어나 항의를 했다는 얘기. 주변의 몇몇 신자들이 그 '용감한' 신자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격려를 하더라는 얘기.

교육수준이 높고 부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 성당일수록 사제가 사회정의에 관한 내용의 강론을 하기가 어렵다는 얘기. 신자가 많이 늘어나면서 교회의 중산층화 현상도 심해지고, 보수화되는 경향도 농후해진다는 얘기. 예수님의 눈과 마음을 닮고 지니기보다는 신앙을 장식화한 신자도 많다는 얘기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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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 4월 4일의 제18차 시국기도회 때는 자작시 <오늘도 여의도에는 바람이 분다>를 낭송하기도 했다. ⓒ 지요하


몇 년 전에 수원교구의 한 사제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는 신자가 되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는 준자(遵者)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 이른바 '준자론'도 떠오르고, "오늘날의 교회 풍경을 보노라면 '외화내빈'의 표상을 보는 것 같다"고 고백했던 한 분 사제의 술회도 떠오른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이상한 위축감도 감내하게 된다. 과연 나는 얼마나 예수님의 눈과 마음을 지니고 사는지, 예수님의 눈과 마음을 지니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나 자신에 대한 회의 때문에 생겨나는 위축감이기도 하고, 혹여 내가 본당공동체 안에서 이질적인 존재는 아닌지 하는 우려 때문에 생겨나는 위축감이기도 하다.

4대강 사업이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야만적 파괴행위임을 직시한 사제들이 암담한 현실을 좌시할 수 없어 '민주화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명동성당 구내에서 철야기도를 할 때, 같은 옷을 입은 사제가 교구청 직원들과 명동성당 사목위원들을 동원하여 패악을 부린 사건이 떠오르면 예의 그 이상한 위축감은 더욱 심해진다. 하지만 그런 위축감 속에서도 나는 쉬지 않고 기도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그 이상한 위축감을 여의도 '거리미사'에서 위안 받고 해소하곤 한다. 물론 거리미사 장소에서도 쓸쓸함 같은 것을 느낀다. '시대의 횃불' 같은 미사임에도 참례하는 신자들이 너무 적은 데서 오는 쓸쓸함이다. 이삼십 명씩 오시는 사제들 중에 여의도가 속한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들이 언제나 가장 적은 현실에서 오는 쓸쓸함이기도 하고, 이삼십 명씩 오시는 사제들과 100명 안팎 신자들 사이에 얼비치는 불균형 속에서 느끼게 되는 쓸쓸함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쓸쓸함도 미사를 지내다 보면 말끔히 해소된다. 이상한 위축감도 쓸쓸함도 여의도 거리미사를 통해 치유된다. 여러 교구와 수도회에서 오신 사제들과 또 여러 지역에서 오신 신자들 사이에 뜨거운 일체감이 꽃 피어난다. 형제자매라는 말이 하느님 성령 안에서 뜨겁게 현실성과 생명력을 자아내는 현장이다.

한국교회는 오늘 신자 수 500만 명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500만 명이 이루고 있는 장대한 신앙의 바다에서 여의도 '거리미사' 공동체는 아주 작은 섬에 불과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100여 명 정도가 잠시 모이는 나루터일 뿐이다.

그러나 그 여의도 나루터에는 '시대의 횃불'이 꺼지지 않고 타오른다. 한국교회 500만 명 시대의 심장임을 자부한다. 끝내 한국교회를 명예롭게 만드는 또 하나의 보루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인터넷 매체 '가톨릭뉴스/지금여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 독자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도 많을 터이기에 여기에도 올립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인터넷 매체 '가톨릭뉴스/지금여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 독자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도 많을 터이기에 여기에도 올립니다.
#4대강사업 #여의도 거리미사 #생명평화미사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묵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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