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 출도를 준비하고 있는 천둥(천정명 분).
MBC
만약 대통령이 시·군·구 청사의 비밀서류를 조사할 목적으로, 암행감사관과 전경부대를 파견해서 "암행감사관 등장이요!"라고 확성기로 고함치며 공무원들을 두들겨 패도록 한다면, 어떨까?
물론 악질 단체장이 자료조사를 막기 위해 무장 병력을 동원한다면, 이런 조치가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할 경우는 현실적으로 별로 없을 것이다.
별다른 저항이 예상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자료 조사를 목적으로 엄청난 공권력을 투입한다면, 국민들은 분명히 대통령의 공권력 행사가 과도하다고 인식할 것이다.
목표와 수단 사이의 균형이 현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암행감사관이 수사관 몇 명을 데리고 가서 신분증만 제시해도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자료조사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치를 생각하면, 소설이나 드라마 속의 천편일률적인 암행어사 출도 장면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기본적으로 <춘향전>에 근거한 것이다.
어사 이몽룡이 전라도 남원군청 입구에서 부채를 들어 신호를 보내자, 육모 방망이와 채찍을 든 병졸들이 마패를 번쩍 쳐들고는 "암행어사 출도요!"라며 청사에 난입하여 동헌(수령 집무실)을 뒤엎고 일대 수라장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국장급 간부들인 이방·호방·예방·공방이 자빠지고 넘어진다. 이렇게 군청을 한번 휩쓴 다음에 이몽룡은 악질 군수 변학도의 죄상을 묻는다.
최근 MBC 드라마 <짝패>에서 방영된 암행어사 출도 장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패한 전라도 고창현감을 응징하기 위해 가짜어사로 둔갑한 천둥(천정명 분) 역시 이몽룡과 유사한 방식으로 관청을 급습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은 역사적 실제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에 관한 우리의 오해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2가지다.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암행어사 출도(出道)'를 '암행어사 출두(出頭)'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소설·드라마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국어사전에서조차 출두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암행어사 '출두요~'가 아니라 '출도요~'가 맞다
하지만, 사료에서 사용되는 표현은 분명히 '출도'다. 예컨대, 정조 19년 4월 28일자(1795.6.14) <정조실록>에는 정조가 호남암행어사 이희갑에게 "오늘 중으로 (임지로) 다시 내려가 나주에서 출도(出道)한 뒤 따로 조사관을 정해서 자초지종을 상세히 조사하라"라고 명령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실록뿐만 아니라 <비변사등록> 같은 사료에서도 마찬가지다. <비변사등록>이란 요즘 말로 하면 국가안전보장회의 업무일지 같은 것이다.
그럼, 출도란 무슨 뜻일까? 이 분야 학자들의 일반적인 정의를 종합하면, 출도는 '암행어사가 신분을 밝히고 공개적으로 직무집행을 개시하는 것'이다. 어사의 직무집행이 비밀 상태에서 공개 상태로 전환되는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위의 <정조실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런 개념 정의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정조가 이희갑에게 나주에 다시 내려가라고 한 것은, 그가 풍문을 근거로 나주목사의 공금횡령 사실을 조사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좀더 명확한 진상규명을 위해 공개조사를 실시하라는 의미에서 '출도'란 표현을 사용했다.
이런 의미로 사용된 '출도'가 오늘날 '출두'로 불리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에서 내는 '부조금'이 '부주금'으로 발음되기 쉬운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은 잘 쓰이지 않지만, 중국어의 '출도'에는 '활동을 개시한다'란 의미가 있다. 일본에서는 프랑스어 데뷔(debut)의 영향을 받아 '등장'을 의미하는 '출도'란 단어가 생긴 적이 있다. 이런 용례가 암행어사의 '출도'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어사의 임무가 전라도·경상도·충청도 같은 도별로 부여되다 보니. '어사가 도(道)에 공개적으로 출현한다'는 의미에서 '출도'란 표현을 썼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