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의 대북정책은 이른바 '전략적 인내'로 불리는 소극적 대북봉쇄다. 출범 전부터 협상을 통한 적극적 해결의지를 보였으나 한차례도 실현되지 않았다. 금융위기와 국내 개혁과제들에 우선순위를 내주면서 대북정책의 변화 동력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북한이 핵실험 도발을 통해 문제의 시급성을 시위했지만, 미국의 태도 변화를 가져오기보다는 오히려 강경책 연장에 빌미를 제공했다.
오바마는 부시 정권 8년 중에 협상을 시도했던 마지막 2년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부시가 줄곧 북한을 악의 축으로 부르며 협상을 거부한 채 정권교체를 언급하며 압박했지만, 집권 후반에 협상모드로 전환했던 것을 상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레임덕에 비롯된 작전상 후퇴였으며 근본적 변화는 아니었다. 더욱이 어렵게 시작한 협상은 네오콘의 내부반발로 깨진다. 그들은 협상에 나섰던 크리스토퍼 힐을 김정'힐'이라고 냉소하며 북한의 대변자 역할을 한다고 비난했다.
오바마 대북정책에 '변화'는 없었다
여기서 미국의 대북정책 결정의 메커니즘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큰 오해 중 하나가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한반도 문제의 우선순위가 매우 높다고 생각하는 점인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북핵문제라도 마찬가지다. 상황에 따라 시급한 사안으로 떠오르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유럽이나 중동 등보다 상대적 중요성이 떨어진다.
이는 대외정책을 결정하는 최고위층에 한반도 전문가가 등용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과 함께 문제의 정치적 타결을 어렵게 만든다. 강경책이든 온건책이든 대통령이나 국무장관 선에서 정책의 큰 방향을 잡아주지 않을 경우 실무급에서 정책의 투입(input)과 결과(output) 및 실행까지 전부 담당하게 되는 구조인 것이다. 게다가 실무급에서는 북핵을 비핵화의 차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정치적 타결보다는 원칙에 입각한 강경책을 고수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 때문에 부시 정책의 발전적 계승이라는 시도가 협상모드로의 '변화'가 될 가능성은 애초부터 매우 낮았다. 다시 말해서 오바마가 과감한 변화를 암시하기는 했지만, 정책변화의 방향을 확실하게 실무관료들에게 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는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부시 정권과 달리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자제했고, 일방주의보다는 다자주의 입장을 견지했지만 그것은 부시에 비해 소극적인 봉쇄라는 표면적 차이에 불과하다. 그 결과 오바마의 확고한 변화의지 없이 북한을 봉쇄한 채 자발적인 비핵화 또는 북한정권의 급변사태만 기다리는 국면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취임 후 변화의 첫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2009년 여름 전임 대통령 클린턴의 방북이었다. 그가 1994년 직접 협상을 통해 제네바협정을 이끌었던 당사자였기에 협상국면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갖게 했다. 하지만 결과는 여기자 석방 외에는 어떤 진전도 없었는데, 이 역시 앞에서 지적했던 행정부 내의 역학관계와 관련이 깊다. 당시 클린턴은 자기가 오바마의 부담을 덜어주고 협상의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염두에 두었지만, 행정부 내에서는 클린턴의 방북이 여기자 석방의 범위를 넘지 못하게 하려는 사전 견제가 상당했었다고 전해진다.
북 도발과 한미 봉쇄정책의 악순환
이후 상황은 점점 돌아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북한은 자신의 방식대로 도발을 통해 위기를 조성했고, 이는 다시 한미 양국의 강경정책을 정당화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대북정책의 운전석을 한국에 내준 미국은 북한의 선 핵폐기와 도발 사과를 대화 재개의 요건으로 삼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갇혀버린 형국이 된 것이다. 올해초 미중 정상이 6자회담 재개에 동의하고, 대북 인도적 쌀 지원 등의 카드를 들고 나오는 등 움직임이 없지 않지만 여전히 변화의 동력이 되기에는 미약하다.
이런 상황에서 또다른 전임 대통령 카터의 방북이 지난주에 있었는데, 여러모로 1994년의 역사적 방북을 연상시켰다. 전쟁 직전의 긴박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제네바합의를 이끌어냈던 것을 상기하며 극적으로 대화의 물꼬를 틀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당시처럼 카터가 북한의 획기적 제안을 가져왔을 경우 한미 양국정부가 곤란한 처지에 빠질 것이라는 섣부른 예상까지 나왔다.
이를 의식한 미국정부는 클린턴 방북 때 그랬던 것처럼 순전히 개인 자격의 방문이라고 여러차례 선을 그었다. 사실 1994년 클린턴 정부는 카터가 북으로부터 가져온 대화 보따리에 적잖이 당황했으며 내부적으로 거부의 목소리가 거셌었다. 전임 대통령이 가져온 합의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결국 대화에 나섰지만, 그 대가로 카터는 정부와의 연결고리를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기도 했다.
일부의 기대와 달리 한미 양국정부를 곤란하게 만들 극적 드라마가 이번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카터는 김정일을 직접 만나지 못했으며, 가져온 메시지에도 획기적 제안은 없었다. 줄곧 북한과의 대화를 촉구하며 강경책을 비판해온 카터가 빈손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 한국정부는 물론이고 미국내 강경파도 내심 안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바마는 반대로 아쉬워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어려운 교착상황을 카터가 모두 짊어지고 뚫어주기를 원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설사 오바마가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현상황에서 꼭 필요했던 시나리오였다. 그것은 지난 2년 남짓 이어온 전략적 인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
강경책이 북한의 비핵화는커녕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했다고 공격하는 진보진영은 물론이고, 보수진영조차 대북봉쇄가 한계에 이르렀다고 비판한다. 즉 중국과의 협력으로 구멍이 나버린 경제봉쇄와 우라늄농축 본격화로 인한 시리아, 이란, 미얀마와의 관련설을 들이대며 이미 핵확산의 길로 들어섰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번 카터의 방북이 보여준 것은 전임 대통령들의 역할마저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이제는 그야말로 오바마 자신의 과감한 결단 외에는 대부분의 옵션이 소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효과가 반감된 강경책을 계속 고집하다가는 북한의 새로운 도발을 초래할 수 있다. 북한은 무시될 때 도발로 반응해왔음을 상기해야 한다. 북한이 작년말 우라늄농축시설을 극적으로 공개한 이후 조건 없는 대화를 요구하고 있다. 북미대화의 선행조건으로 남북대화를 내세우며 남한정부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오바마가 출범 전 공언했던 과감한 변화의 이니셔티브를 행사해야 할 시점이다.
2011.5.11 ⓒ 창비주간논평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준형씨는 한동대 교수(국제정치학) 입니다.
2011.05.18 13:53 | ⓒ 2011 OhmyNews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