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3세인 평화인권운동가 서승 교수(일본 리쓰메이칸대학)는 서울대학교 유학 당시인 지난 1971년 '재일교포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이라는 조작사건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서 교수는 당시 보안당국의 모진 고문에 항거하며 분신을 시도한 바람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당시 겪은 고통과 상처가 뒤엉켜 그의 얼굴에 남긴 흉터는 훗날 제3세계 평화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30일 저녁, 서 교수가 해군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주민과 활동가들이 사활을 걸고 지키고 있는 강정마을 해안을 찾았다. 지난 2007년 이래로 생업을 뒤로 한 채 해군기지 건설을 저지하려고 싸우는 주민들을 위로하고, 그가 전 삶을 거쳐 체득한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역설하기 위함이다. 그의 삶과 강정마을 주민들이 처한 현실에 걸맞게 강연의 제목도 '동아시아 평화와 강정'이다.
서 교수는 군사기지를 저지하기 위해 애쓰는 주민들을 격려하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특히 30일 낮에 주민들이 쳐놓은 천막을 철거하려는 해군 측과 주민들 간에 벌어진 몸싸움을 목격한 서 교수는 "자신의 땅을 지키고자 하는 자세야말로 오랫동안 동아시아에서 보지 못한 현대적 인간의 모습"이라고 치켜세웠다.
1945년에 태어난 '해방둥이'인 서 교수는, 자신이 일본에서 태어났을 때 일본군의 수탈로 인해 어머니는 젖이 안 나오고 자신은 "꼬챙이처럼 말라 있었다"고 했다. 이후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자신이 죽지 않고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 후에 조선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일본에 남아 있는 재일조선인들은 분단의 설움과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멸시와 차별을 동시에 겪어야했다. 서 교수는 이미 어린 시절에 "재일동포가 잘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나라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는 "한국말을 잘 못해서 한국인이 되기 위해 서울대에 유학하던 중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감옥에서 많이 만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석방되면서 그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평화와 인권. 그는 지금까지도 이 두 가지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믿고 살고 있다. 서 교수는 평화를 "곡식에 땅에 떨어져 자랄 때까지 방해를 받지 않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즉 "사람이 저마다의 자질을 개화할 때까지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이 평화라고 했다.
군사기지가 지역경제를 발전시킨다는 경제논리에 대해서 서 교수는 오키나와 사례를 들어 반박했다.
"오키나와는 술집이 많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오키나와는 일본 전 영토의 0.3퍼센트 안에 일본 내 미군기지의 75퍼센트가 밀집된 곳이에요.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술, 마약, 도박으로 인생을 탕진하고 있어요. 원주민들은 제대로 생활을 할 수 없는 곳이어서 실업률도 일본에서 가장 높아요.
그밖에 군사기지에서 파생된 범죄와 소음과 환경파괴와 같은 것들이 오키나와 주민들의 삶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군사기지가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건 근본적으로 잘못된 얘기입니다."
평화를 위해서라도 군사기지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아프카니스탄에서 미국의 겪은 사례를 들며 반박했다.
서 교수는 미국이 아프카니스탄 전쟁을 치르면서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었지만 미국인들 중 행복해진 사람은 무기를 생산하는 군수업자들뿐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무력과 무기에 의해 평화가 지켜질 것 같으면 무력이 가장 강한 미국이 가장 평화로운 나라가 돼야 하는 데 사실은 가장 불안한 나라"라고 주장했다. 무력으로는 평화를 얻을 수 없고, 신뢰로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서 교수는 오키나와 기지가 이미 오래전에 이전하기로 약속했지만 그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예로 들면서, "군사기지는 한번 들어서면 다시 옮기기는 정말 어렵다"고 역설했다. 지난 반 세기동안 미군기지 이전을 위해 싸워온 오키나와 주민들처럼 "앞으로 지치지 않을 정도로 긴 호흡을 갖고 생명과 땅을 지켜주라"고 당부했다.
서승 교수 주요 이력 |
1945년 4월 3일, 일본 쿄토 인근 슈잔에서 출생
1964년 됴쿄교대 1학년 시절 재일한국인 학생 조국방문단 일원으로 한국 방문
1968년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 유학
1971년 '재일교포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이라는 조작사건으로 체포되어 투옥됨. 당시 보안사의
고문에 항거하며 온몸에 경유를 뿌리고 분신을 시도
1974년 국제엠네스티로부터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됨
1990년 석방, 이후 1992년까지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생활
1993년 리쓰메이칸대학 법학부에서 강의
1994년 <옥중 19년- 한국정치범의 투쟁>(아와나미 신서) 출간
(한국에서는 1999년에 역사비평사에서 번역판 출판)
1998년 리쓰메이칸대학 법학부 교수로 임용
2011년 교수직 정년퇴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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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군사기지 주민들, 터전 잃고 인생 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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