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로 이어진 '3·13 반일운동'

'2011 겨울 만주기행'을 다녀와서(29)

등록 2011.05.31 13:43수정 2011.05.3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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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유적과 함께하는 '2011 겨울 만주기행' 여섯째 날(1월 15일). 아침에 눈을 뜨니 창밖이 캄캄했다. 시계는 새벽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행과 약속도 있고 해서 일찍 일어났다. 여섯 시쯤 연길(옌지) '수상시장'에 다녀오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약속 시각이 한 시간이나 남았으니 게으름을 피워도 되었다. 그러나 마음뿐. 황소바람이 담요 틈으로 파고들어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옆방 전화벨 소리가 들릴 정도이니 추울 수밖에. 호텔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뜨거운 물로 샤워하니까 온기가 돌았다.

 

자료집을 뒤적이다 시간이 되어 방을 나섰다. 부지런한 일행들은 호텔 로비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두 팀으로 나눠 택시를 타고 수상시장으로 향했다. 택시도 춥기는 마찬가지, 일행들은 연신 손바닥을 비벼댔다. 택시도 감기 걸렸는지 속도를 내지 못했다.

 

수상시장은 취급하는 물건이 다양해서 '만물시장'으로도 불리며 아침 8시까지만 열리는 깜짝 시장이다. 인구 40만이 넘는 연길에는 수상시장 외에 동시장, 북시장, 중고시장 등이 있는데, 시민 대부분은 값이 저렴하고 볼거리가 풍성한 재래시장을 선호한단다.

 

 여명을 준비하는 연길 수상시장(오른쪽)과 꽁꽁 얼어붙은 개천.
여명을 준비하는 연길 수상시장(오른쪽)과 꽁꽁 얼어붙은 개천. 조종안
여명을 준비하는 연길 수상시장(오른쪽)과 꽁꽁 얼어붙은 개천. ⓒ 조종안

 도깨비 뿔이 연상되어 무섭게 느껴졌던 고드름. 만주의 추위를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도깨비 뿔이 연상되어 무섭게 느껴졌던 고드름. 만주의 추위를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조종안
도깨비 뿔이 연상되어 무섭게 느껴졌던 고드름. 만주의 추위를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 조종안

 

택시는 관중이 빠져나간 운동장 트랙처럼 썰렁한 도로를 한참 달려 시장 입구에 내려주었다. 아직도 어둠이 깔린 거리는 으스스한 바람 소리만 들렸다. 겨울에는 장을 철시하는 모양이었다. 새벽 안개 자욱한 거리를 반바지 차림으로 오가면서 수박이랑 사 먹던 작년 여름(8월)이 생각났다.

 

혹시나 하고 강변으로 내려가니 상인들 목소리는커녕 무서움을 느낄 정도로 적막이 감돌았다. 건물 내부는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어두웠다. 여기도 저기도 고드름. 개천은 차가 다녀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꽁꽁 얼어 있었다. 일행들은 쓴 입맛을 다셨다. 실망이 큰 모양이었다. 어쩌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날 아침에도 사고가 터졌다. 우리가 탄 택시는 요금이 9위안(1600원) 나왔는데, 다른 팀은 13위안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요금을 치렀으니 어쩔 수 없었다. 만주에서는 택시를 타기 전 기본요금을 확인해야 낭패당하지 않는다는 말이 격언처럼 떠올랐다.

 

열무김치 비빔밥 같은 연길의 간판들

 

호텔로 돌아와 로비에서 잠시 담소를 나누다가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전날처럼 뷔페식이었는데 새로운 메뉴는 없는 것 같았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면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곧바로 방으로 올라가 짐을 챙겨 체크아웃하고 밖으로 나와 버스에 올랐다.

 

몸이 굼뜬 일행을 기다리는 사이에 거리 풍경 몇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부근에 기차역이 있어서 그런지 칼바람이 부는 이른 아침임에도 사람들이 바쁘게 오갔다. 하나같이 두꺼운 방한복 차림으로.

 

 연길 기차역 부근 거리 풍경(2011.01.15). 어느 도시든 빨간색 간판이 많은 게 특징이었습니다.
연길 기차역 부근 거리 풍경(2011.01.15). 어느 도시든 빨간색 간판이 많은 게 특징이었습니다. 조종안
연길 기차역 부근 거리 풍경(2011.01.15). 어느 도시든 빨간색 간판이 많은 게 특징이었습니다. ⓒ 조종안

 

자전거를 개조한 손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눈길을 조심조심 걸어가는 아저씨와 간판 하나가 눈길을 멈추게 했다. 한자로 '족료'(足疗)를 써놓았는데 '족질'로도 읽혀 헷갈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疗'는 '병을 치료한다'라는 뜻 료(療)의 간자체로 '발마사지' 전문 업소였다.

 

만주의 안마 업소들은 한국에서 사용하는 번체와 중국의 간체를 함께 사용했다. 전신안마는 보건(保健), 배 안마는 복료(腹疗), 다리 안마는 송퇴(松腿), 손 안마는 수료(手疗), 머리 안마는 두료(头疗)라 적었다. 그 외에도 정형외과는 '골과', 치과는 '구강 의원'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만주는 농촌만 한국의 50~60년대를 닮은 게 아니었다. 시내 간판들도 지금은 아슴푸레하게 그려지는 옛날 고향동네 거리를 회상하게 했다. 고향에도 원장이 '임'씨 성을 가진 정형외과가 있었는데 간판이 '임정골원'이었고, 사람들도 '뼈 병원'이라 불렀기 때문이었다.

 

연길을 처음 방문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풍경은 거리의 간판이었다. 외국에서 우리 말글을 만나는 반가움과 뿌듯함, '조선어'와 '한국어' 사이에서 느끼는 이질감과 동포애 등이 뒤섞여 맛깔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된장과 열무김치가 들어간 꽁보리 비빔밥에 국산 참기를 두어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항일 시인 윤동주 묘소 가는 길

 

셔터를 누를 때마다 손을 호호 불며 촬영을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그러나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온도계 바늘은 영하 6도에 멈춰 있었다. 영하 10도일 때도 있었으니 그만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얼음덩이가 된 페트병 생수가 녹지 않을 정도로 호텔도, 버스도 추웠다.

 

오전 8시 35분. 인솔자가 인원을 확인하자, 기사는 전날 다녀온 용정(龍井) 명동촌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기행 여섯째 날 첫 방문지는 윤동주 시인 묘소와 3·13 반일운동(1919년) 때 희생당한 의사(義士)들 묘역이었다. 

 

따스한 햇살이 버스 창을 뚫고 들어왔다. 생수도 마실 수 있도록 녹여주고, 차내 온도도 섭씨 15도로 올려주어 고마웠다. 차내 온도를 승객의 체온으로 유지하는 불쌍한(?) 버스는 빙판길을 힘겹게 달려 오전 9시 10분쯤 윤동주 묘소 가는 길 입구에 내려주었다.

 

 버스에서 내려 윤동주 시인 묘소로 향하는 일행들. 길에서 100m 정도 거리 오른편에 3·13 항일의사 묘역이 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윤동주 시인 묘소로 향하는 일행들. 길에서 100m 정도 거리 오른편에 3·13 항일의사 묘역이 있습니다. 조종안
버스에서 내려 윤동주 시인 묘소로 향하는 일행들. 길에서 100m 정도 거리 오른편에 3·13 항일의사 묘역이 있습니다. ⓒ 조종안

 추위와 싸우며 산을 오르는 일행들. 우거진 옥수수밭과 퀴퀴한 분뇨냄새가 그리웠습니다.
추위와 싸우며 산을 오르는 일행들. 우거진 옥수수밭과 퀴퀴한 분뇨냄새가 그리웠습니다. 조종안
추위와 싸우며 산을 오르는 일행들. 우거진 옥수수밭과 퀴퀴한 분뇨냄새가 그리웠습니다. ⓒ 조종안

 

버스에서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마스크를 쓴 얼굴을 덮쳤다. 방한모를 쓴 일행들도 차가운 바람을 피해 고개를 잔뜩 움츠렸다. '만주의 겨울은 바람이 지배한다'라고 했던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강추위는 바람도 얼려버릴 기세였다.

 

추위에 압도되어 그런지 작년 여름에 다녀갔으니 오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도리가 아니었다. 멀리서 왔으니 고인에게 인사드리는 게 예의이고, 따라온 의미도 훼손될 것 같았다. 해서 힘이 들더라도 오르기로 마음먹고 앞장서 나갔다.

 

여름에는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타고 오는 풀냄새가 코를 즐겁게 해주고 땀방울도 식혀주었다. 그런데 겨울바람은 몸을 더욱 지치게 했고, 마스크에 고드름을 달리게 했다. 방목해놓은 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던 언덕도 황량하게 변해 있었다.

 

 저항시인, 항일시인, 민족시인 등으로 불리는 윤동주 무덤. 눈을 뿌려놓은 것 같았는데요. 꽁꽁 언 땅에서 고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항시인, 항일시인, 민족시인 등으로 불리는 윤동주 무덤. 눈을 뿌려놓은 것 같았는데요. 꽁꽁 언 땅에서 고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종안
저항시인, 항일시인, 민족시인 등으로 불리는 윤동주 무덤. 눈을 뿌려놓은 것 같았는데요. 꽁꽁 언 땅에서 고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조종안

 

언덕길을 1km 남짓 오르니까 묘소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보였다. 흰 눈이 듬성듬성 쌓인 무덤들을 헤치고 조금 더 나아가니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남향받이에 자리한 윤동주 묘가 나타났다. 사방이 탁 트여 전망이 좋았다. 햇볕도 1년 내내 쬘 것 같았다.

 

인솔자가 준비해간 소주를 잔에 따라 올리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8세에 생을 마감한 윤동주 시인의 명복을 빌었다. 윤동주와 고종사촌으로 한집에서 태어난 '청년문사'(靑年文士) 송몽규 묘에도 들러 고인을 기렸다.

 

송몽규(1917년)는 윤동주와 같은 학교에 입학했고, 대학도, 감옥생활도 함께했다. 두 사람은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23일의 시차를 두고 생을 마감했는데 송몽규는 1935년(18세)에 정식으로 '조선 문단'에 데뷔한 문인으로 알려졌다. 

 

'3·13 항일의사 묘역'에서

 

  ‘3·13반일의사능’에서 포즈를 취한 학생 참가자들. 학생들은 만주의 항일역사를 친구들에게 알리겠다고 말했습니다.
‘3·13반일의사능’에서 포즈를 취한 학생 참가자들. 학생들은 만주의 항일역사를 친구들에게 알리겠다고 말했습니다. 조종안
‘3·13반일의사능’에서 포즈를 취한 학생 참가자들. 학생들은 만주의 항일역사를 친구들에게 알리겠다고 말했습니다. ⓒ 조종안

 

윤동주 묘소에서 내려오는 길에 3·13 항일의사 묘역에 들러 묵념을 올렸다. 박영희 시인은 '3·13 반일운동'(1919년)에 대해 설명을 간단히 마치고 학생 참가자들을 불러 사진촬영을 권했다. 그는 중요한 사건이니 오래도록 기억하라는 의미라고 이유를 밝혔다.  

 

묘역에는 1919년 3월13일부터 4월 말까지 용정에서 46회에 걸쳐 일어난 만세운동 때 희생된 순난의사(殉難義士) 열세 분의 영혼이 모셔져 있었다. 묘지에 시신이 없는 이유는 일제가 시신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3·13 반일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북간도 최초의 반일운동으로 그 불길은 '15만 원 탈취 사건'(1920년 1월), '봉오동 전투'(1920년 6월), '청산리대첩'(1920년 10월) 등으로 이어졌다. 당시 <독립신문>은 그날의 함성을 대서특필했다고 한다. 다음은 당시 보도 내용.

 

"3·13 반일사건 중 48명이 부상을 입고, 94명이 체포되었으며 19명이 순난당했다. 3월 17일, 합성리 공동묘지에서 순난자 장례식을 성대히 거행했다. 룡정(용정) 3·13반일 시위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하여 실패되었지만, 그 후 항일투쟁을 새로운 단계에 추진시키는데 마멸할 수 없는 역할을 했다." (박영희의 <만주를 가다>에서 발췌) 

 

윤동주 묘소와 3·13 항일의사 묘역 참배를 마치고 곧바로 버스에 올라 두만강 변 국경지대로 이동했다. 국경도시 '도문(图们)'과, '봉오동 전투 유적지'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시계는 오전 10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2011년 1월 10일부터 17일까지 항일유적과 함께 하는 겨울 만주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연길 간판 #윤동주 시인 묘 #3·13반일의사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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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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