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정의는

[연재소설]미래는 남은자들의 유서이다(56)

등록 2011.06.07 10:14수정 2011.06.0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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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이 퇴원해 집으로 돌아온 날 밤이었다.

- 이제는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나. 정말 안 나. 그래서 또 까맣게 잊어버릴 것 같아. 


삼촌은 손끝을 힘겹게 들어 책상 서랍을 가리켰다. 방을 치워주었을 때 테이프로 밀봉되어 있어서 궁금했던 그 서랍이었다.

- 아무리 떼려고 해도 떨어지지가 않아.
- 좋은 거야?

무엇을 넣어놓았기에 몇 겹으로 테이프를 감았을까. 칼로 테이프를 가른 후에야, 서랍 속의 갈색 서류봉투를 꺼낼 수 있었다. 묵직했다.

- 혹시라도 그 근처에 갈 일이 있으면, 꼭 가야 한다는 건 아니고 말이지.

삼촌은 또 그런 식으로 말하며, 거무튀튀하게 가죽만 남은 손으로 내용물을 꺼냈다.


- 이걸 그 신부한테 돌려주었으면 좋겠어.

순간 나는 너무 당황해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머리카락이 쭈뼛이 섰다.

사진이었다. 나블루스에서 찍었던, 결혼식 날 이슬람모스크 앞에서 피살된 신랑의 사진들이었다.

내가 이것들을 삼촌에게 주었다고? 언제? 뭐라 그러면서 주었지? 기억을 되돌리려고 했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사내의 표정은 굳고 확신에 차 있었다. 맞아, 밝은 상아색 결혼예복이었지. 인생에서 가장 자부심 강하고 의지에 차 있던 20대. 점령군들을 몰아내고 반드시 독립을 이루겠다는 결연함과 자신감. 희망과 의욕으로 뭉친 젊은이에게 가장 행복하고 기뻤던 날의 표정.

잠시 후 피살되리라 예상했다면 이처럼 밝게 웃었을까. 하늘을 향해 힘차게 팔을 뻗어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을까.

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알았어. 꼭 전해 줄게. 사내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긴 자취를 돌려주어야 할 의무는 원래부터 나의 몫이었다.

- 얼마 안 되지만. 

삼촌은 다시 흰 봉투를 꺼냈다. 겉면에는 정성스런 글씨로 '미지의 여인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1970년대 식 연애편지의 봉투를 보는 느낌이었다. 봉투 안에는 1백 달러짜리 지폐들이 들어있었다. 나는 어떻게 마련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봉투를 받아야 할 여자는 원래 따로 있었다는, 그런 기분 말이다.

한때 숙모였던 그 여자 이야기는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꺼낼 수 없는 금기였고, 돌아가신 후에는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망자에 대한 예의였던 것도 같다.

할머니는 그녀의 손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내보냈다. 아니, 내쫓았다는 것이 더 적절했다. 당신 아들이 병신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근원적으로, 태생적으로, 원래부터 나쁜 여자여서 그런 일이 벌어졌으므로, 그 벌을 달게 받으라고 요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남편으로서의 삼촌. 그는 무능력했고, 무기력했으며, 무소신했다. 늙은 어미의 서슬 퍼런 노기에 벌벌 떨었고, 함께 죄지은 자로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주눅 들었다. 후일 상황을 되돌릴 수 없지만 회상할 자유가 주어졌을 때, 시간은 가슴 저리고 독한 회한을 그에게 되돌려주었을 뿐이다.

- 잘 살고 있겠제? 
- 그럼, 그럴 거야. 

그것이 삼촌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보름 후 겨울이 오기 전에 해바라기라도 더 하겠다고 마당에 나간 삼촌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후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인생의 가장 꽃다운 시절을 파괴당했던 사내는, 삼촌에서 형으로 그리고 오랜 기간 친구로 지냈으나, 결국 피보호자로 생을 마감했다. 작년 가을 11월이었다.

- 수바흐의 부모들이 더 기뻐할 것 같소. 잊지 않고 사진을 전해주니, 뭐라고 고맙다고 해야 할지, 정말 고맙소. 

이모부는 내 손을 잡으며 다시 한 번 사의를 표했다.

- 부탁한 사람은 저의 삼촌입니다. 

나는 삼촌의 사진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지금껏 그가 사진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유언으로 맡겼다고 설명했다. 물론 간략한 소개도 잊지 않았다. 인티파다가 일어나기 7년 전 광주에서 총을 들고 군부 쿠데타에 맞섰고, 그것이 밑거름되어 군부정권을 몰아냈으나, 작년 가을 뇌종양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정부에서도 공로를 인정해 국립묘지에 안장했고, 매년 압제에 저항했던 날을 국가적으로 기념하고 있다는 공식해석도 곁들였다. 그렇지만 그가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자였고, 고문에 의한 뇌손상으로 죽을 때까지 고통 받았다는 사실은 생략했다.

- 이것도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오래된 남편의 부의에서 어머니의 부의로 바뀐 봉투를 내밀었을 때, 이모는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채 흐느꼈다. 그녀는 오늘 언니를 잃었다. 자꾸 그 사실을 잊었다. 가족들이 고인의 명복을 빌 시간을 위해 어서 보내주어야 했다.

- 그 자들은 우리에게 슬픔도 나누지 말라고 강요하는 군요. 

옆에서 조심스럽게 이모의 울음 섞인 탄식을 통역하는 하데르의 표정도 상기되었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고 믿는 무슬림이지만 피를 나눈 형제를 잃은 슬픔과 좌절, 분노와 원망을 어떻게 삭일 수 있을까.

- 삼촌을 대신해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이곳에 오기 전 가장 궁금했던 것은 그녀가 살아있을까 하는 거였다. 어쩌면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삼촌처럼 수분이 모두 빠져나가 말라버렸을 것도 같았다. 그게 가장 두려웠다.

아무런 힘이 되지 않는다 해도 희망조차 오래 전에 버렸다 해도, 삼촌이 꼭 전해달라고 했다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위로하고 싶었다. 당신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지난 10년 동안 누군가가 지구 반대편에서 당신이라는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으며, 당신과 대화를 나눈 적도 없지만, 항상 당신이 안전하기를 기원했고, 당신의 삶이 더 행복하기를 바랐고, 살아있기를 기원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그녀에게 꼭 전해주라며, 삼촌의 젊은 시절 사진을 건네주었다. 직접 주고 싶었던 사진이었다.

5.
그날 밤 전남도청 안에 남았던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준비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다른 도시의 시민들이 달려올 것이라는, 희망이 헛된 것을 알았다면 그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두려움에 몸서리친 후 총을 내려놓고 돌아섰다면 살지 않았을까. 주님께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대속의 멍에를 잠시만 내려놓았으면 그 또한 살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등하지만 차별의 벽은 너무 두텁다는 현실을 인정했다면 그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남아 무엇을 하지? 폭도로 규정된 채 남은 생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죽는 순간까지 80년 5월에서 한 발자국도 더 딛지 못한 '시민군 김영철'*로 남는 것?

과거는 모두 잊기로 스스로에게 맹세하고 고개 숙인 채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사는 게 낫다고 말해야 했을까. 참고 살다보면 좋은 시절이 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죽은 자들은? 산산조각 날 고통을 감내하고 바위에 부딪쳤던 물방울들은 어떻게 하지? 학살자들과 한 하늘 아래 양립할 수 없어 죽음의 공포를 뚫고 싸웠던 의로운 자들은? 그들은 참으로 무모했다고, 정권보다 더 큰 생명을 아무런 가치 없이 버렸다고 질타해야 할까. 서둘러 '죽음의 굿판'을 거두라고, 오만한 눈빛을 부라리며 타일러야 했을까.

이제 광주항쟁은 4.19혁명만큼 오래되었고, 한국전쟁보다는 훨씬 덜 비극적이며, 3.1운동보다 성공한 역사가 되었다.

박제된 그곳에는 더 이상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다. 구차한 사과나 변명 없이, 용서도 없고 회개도 없고 화해도 없는, 처벌하고 반성할 것이 없으므로 재발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없는, 불행했던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삼촌은 그 흔한 유언도, 인생을 회고할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느냐고 묻기에는 인생이 참으로 단순했고, 되돌아보기에는 기억에 남은 시간의 잔존물들이 너무 부족했다.

유서란 대필한 적도 대필된 적도 없으므로, 대신 써줄 수도 없었다.

삼촌은 무의미하게 소멸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묘비에 이름을 새겨서가 아니었다. 인생에서 특정한 행동이 어떤 의미였는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드러난 결과가 아니다. 그가 무엇을 가치 있게 생각했는지에 따라 결정될 문제이다.

- 아침에 다시 들르겠소. 그때까지는 별 일 없을 거요. 

이제 무사히 도시를 빠져나가는 일만 남았다. 텔아비브공항까지 직접 데려다 주거나 필요한 조치를 취해 주겠다는 이모부는, 근엄한 정부 관리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에는 이스라엘 보안회사 관계자들과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거래를 통해 그들이 얻는 수익은, 점령을 유지하고 억압과 폭력을 강화하는데 사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폭력을 직접 저지할 수 없다면, 그들에게 어떤 이익도 가지 않도록 함으로써 항의할 것이다.

남은 것은 하데르와의 정산이었다. 그 역시 총을 들고 밤 새워 도시를 지킬 것이다. 검은 물을 들인 두터운 군복에 군화를 신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약속했던 금액이 담긴 봉투를 내밀었다. 그가 가족을 위해 마련한 마지막 양식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 신이 당신을 지켜주시길!

그는 하마스였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초록색 두건을 머리에 둘렀다. 참으로 결연해 보였다. 주머니에 카메라가 있었지만 그를 담지 않았다. 또 언젠가 무슨 일로 이곳에 오게 될지 모르겠으나, 죽은 자의 사진을 전하러 오는 일만큼은 하고 싶지 않다.

- 잠시 기다려주겠소? 당신과 함께 가겠소. 

나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돌이켜보면 우리들 대부분은 군부 쿠데타가 불의하다고 자각하지 못했다. 단지 폭력적인 아버지를 두려워했을 뿐이다. 그랬기에 가장 선진적이라 확신했던 학생운동 지도부조차 저항하기는커녕, 쿠데타에 빌미가 된다고 전선에서 퇴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당시의 후진적이고 불철저한 인식의 근본이었다. 오랜 압제 밑에서 누적된 두려움과 의기소침, 공포와 노예의식.

그 해 5월 광주가 저항하지 않았다면, 삼촌처럼 총을 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폭력에 굴종했을 것이다.

밤공기가 추울지 모른다고 아내가 챙겨준 사파리를 가방에서 꺼낼 때는, 두려움에 잠시 움찔했다. 그렇지만 평온함과 담담함으로 그것을 밀어냈다. 하데르의 손을 다시 잡을 때 흥건한 땀이 느껴질까 싶어, 침대 시트에 손을 문질렀다. 그도 두려울 것이다.

오늘 밤 이스라엘 탱크가 밀고 들어오면 내일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들었다고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거나 기약 없이 구금될 지도 모르고, 허망한 죽음을 맞게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새벽의 두려움과 공포에 허겁지겁 객실로 도망치거나 말이다.

그들에게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삼촌이 여기 왔다면 그날처럼 되돌아서지는 않을 것이다.

유혹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정의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

에어컨이 다시 가동되었다. 긴 통풍구를 통해 냉각된 바람이 쏟아졌지만, 이곳의 공기는 조금만 문질러도 불꽃이 튈 것처럼 고달프고 건조했다.

이제 나갈 시간이다. 하데르가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가버렸을지 모르겠다. 평화가 본래의 의미로 찾아올 날은 과연 언제일까.

나는 객실 안을 한 번 둘러본 후 문을 열었다.

* 광주항쟁 당시 시민학생투쟁위원회 기획실장을 맡았던 김영철은 도청을 사수하다 27일 체포되어 상무대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내란수괴 및 간첩조작을 위해 가해진 고문과 자살기도로, 심각한 뇌손상을 입었다. 교도소에서 첫 발병 후 정신병원을 전전하다가 1998년 8월 16일 사망했다.
#광주항쟁 #팔레스타인 #국립묘지 #인티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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