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배신한 놈은 계속..." 뒤통수가 따가웠다

[공모-이직] 아직 끝나지 않은 나의 이직 이야기

등록 2011.06.08 17:21수정 2011.06.08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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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실 한쪽 벽 풍경

사무실 한쪽 벽 풍경 ⓒ 이희동


어렸을 때 난 전학과 거리가 먼 아이였다. 1980년 화곡동으로 이사 들어온 우리 가족은 자식들에게 고향을 만들어주고 싶다던 아버지의 의지대로 이후 화곡동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난 화곡동의 터줏대감으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대신 난 다른 아이들보다 전학생들과 유독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난 그들에게 첫날부터 무작정 친근하게 다가갔는데, 토박이로서 그들이 안쓰러운 만큼 잘 해줘야 한다는 근거 없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대부분의 전학생들이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학교를 옮긴 바, 그들의 상황이 어린 눈에도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로 보였던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친한 친구들과 헤어지고,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그런 내가 나이 서른이 넘어 처음으로 전학생의 입장이 되었으니, 바로 이직을 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회사, 새로운 분위기  

5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2개월쯤 쉬다가 들어간 새로운 회사. 비록 업무량과 연봉은 다르더라도 같은 물류업계인 만큼 분위기는 비슷하려니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착각이었다. 이미 첫 출근에 대한 내 자세부터가 이전 회사와 판이하게 달랐다.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서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나의 등장이 기존 구성원들에게 누를 끼치는 건 아닐까? 이전 회사에서는 공채로 동기도 있고, 23기 운운하며 우리 회사라는 소속감도 강했는데, 과연 새로운 회사에서 나는 그와 같은 소속감을 가질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들. 문득 어렸을 때 봤던 전학생들이 떠올랐다. 새로운 환경에 전전긍긍하는 나의 모습이 이전에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전학생의 모습과 흡사했던 것이다.  


물론 전학과 이직이 같을 수는 없다. 전학이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학교를 옮긴 뒤 공통된 과목을 이수하지만, 이직은 자신의 의지대로 회사를 옮긴 뒤 또 다른 업무를 배워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학과 이직은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 결국 두 경우 모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입생도, 신입사원도 아닌 이들이 새로운 학교와 직장에 들어가 기존에 있던 이들과 아무렇지 않은 듯 어울려야 하는 어색한 상황.

면접을 보면서 사장님이 회사 분위기에 빨리 적응하길 바란다고 했을 때는 으레 그러려니 했다. 회사마다 그 분위기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고, 특히 경력사원에게는 회사 분위기 적응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겠거니 지레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입사 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번 회사의 분위기가 이전 회사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벽에 걸린 태극기와 사훈의 문제인 줄로만 알았다. 요즘 관공서에서도 보기 힘든 태극기가 걸려 있는 만큼 보수적이겠거니. 회사 자체가 가장 보수적이라는 제조업체에서부터 분리되었으니 보수적인 분위기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윗사람들이 수저를 들어야만 먹기 시작하고, 윗사람들보다 먼저 퇴근하려면 눈치 봐야했지만 그것도 그냥 그러려니.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회사의 인적구성, 즉 순혈주의에서 오는 부담감이었다. 이전 회사는 어쨌든 대기업으로서 경력사원도 많았기에 누가 어디서 왔든, 신입이든 경력이든 전혀 커다란 이슈가 아니었다. 그에 반해, 이번 회사는 알짜 중소기업으로서 경력사원이 손에 꼽히는, 순혈주의에 가까운 회사였다. 실제로 10년이 넘는 역사에 200명쯤 되는 직원들이 있지만 경력사원은 내가 8번째라고 하니 순혈주의라고 할 수밖에. 

따라서 난 행동 하나하나에, 언사 한마디 한마디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경력사원들의 언행이 회사의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상, 난 내 행동이 건방치게 비쳐지는 건 아닌지, 내가 무심코 뱉은 말이 혹자에겐 상처가 되는 건 아닌지 끝없는 자기검열을 해야만 했다. 이전 회사 같았으며 그냥 한 번 웃고 넘어갈 일들이 새로 옮긴 회사에서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다시 내게로 돌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순혈주의가 강한 회사에서 경력사원이 가질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 결국 그것은 시대와의 불화가 초래한 부작용이었다. 시대는 개인의 이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신자유주의인데, 회사는 IMF 이전 기업들이 그랬던 것처럼 순혈주의를 바탕으로 하니 경력사원으로 들어온 이들은 불편할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회사가 순혈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만큼 종신고용제를 추구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 역시도 경력사원에게는 부담스러운 부분이었다. 어쨌든 회사가 종신고용제를 추구한다면 그만큼 결속력이 강할 수밖에 없는데, 그럴수록 '한 번 배신한 자는 계속 배신한다'는 편견 역시 강하기 때문이다. 근 한달이 지났음에도 결코 함께 어울리기 쉽지 않은 경력사원의 비애.

덕분에 난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전 회사를 다니면서는 노력해도 빠지지 않던 뱃살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기뻐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것은 스트레스로 인한 체중감량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살이 빠질까. 과연 그 옛날 전학생들도 그랬던가? 결국 나의 이런 스트레스는 첫 번째 회식 때 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다.

첫 번째 회식과 핸드폰

a  위태위태하던 나의 이직생활은 첫 회식에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위태위태하던 나의 이직생활은 첫 회식에서 사고를 치고 말았다. ⓒ 김귀현


첫 번째 회식은 입사한 지 1주일도 안 돼 열렸다. 공식적인 자리는 아니었지만 사장님을 제외하곤 나의 업무와 관련된 전국의 모든 사원들이 모였고, 내게는 처음 보는 이들도 많았던 만큼 결코 편하지 않은 자리였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설 때마다 일어나서 인사하고 술잔을 따라야 하는 그런 자리.

문제는 역시 술이었다. 난 그동안 받았던 스트레스를 술로 풀겠다는 생각에 줄창 마셔댔다. 덕분에 1차가 끝났을 때부터 만취해 경력사원으로서 지켜야 할 모든 예의범절을 머릿 속에 지운 상태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할 정도로 만취한 그때.

이후 술자리는 파했고 난 택시를 타고난 뒤 필름이 끊겼는데, 눈을 떠보니 집과는 전혀 상관없는 상암동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었고 주머니에 항상 들어있던 스마트폰은 사라지고 없었다. 술에 취해 스마트폰을 어딘가에 흘린 것이었다. 할부금이 1년도 더 남은 나의 스마트폰.

집으로 돌아온 뒤 다음날 아침부터 계속해서 전화를 했지만 전화기는 꺼져 있었고 휴대폰의 마지막 위치는 전혀 생뚱맞게 중랑구로 표시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습득한 뒤 그리로 움직였다는 이야기.

그러나 반전은 이틀 뒤 일어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핸드폰 위치를 추적했더니 핸드폰이 노원구에 전원이 켜져 있는 상태로 통화음이 가는 것이었다. 뒤이어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 경찰이었다. 노원구 강력반 형사였는데 나의 스마트폰을 장물아비에게 넘기려는 걸 잡았다는 것이었다.

꾸물거릴 새가 없었다. 당장 찾아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스마트폰을 찾았다. 경찰의 이야기인즉, 범인은 나의 스마트폰을 광화문께에서 습득했고 이를 다시 팔려고 했다는 것이다. (교통카드로 추적해본 결과 나는 택시를 타고, 버스를 타려고 광화문에서 내린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때 흘린 듯) 이렇게 핸드폰을 찾기란 매우 낮은 확률인데 매우 운이 좋다며 조심하라는 그이.

스마트 폰을 잃어버린 뒤, 새로운 회사에 취직해 나름 신고식을 하는구나 했던 난 기쁠 수밖에 없었다. 부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경력사원으로서의 스트레스를 풀어야 할 텐데 과연 언제쯤 난 꼬리표를 뗄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기사공모 '이직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덧붙이는 글 기사공모 '이직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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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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