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 역의 이태곤.
KBS
광개토태왕이 광활한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당시의 중국이 5호 16국 시대였다는 점에 있다. 5호(胡) 즉 다섯 유목민족이 북중국에 난입해 16개 왕조를 세움에 따라 중국의 원심력이 약해진 시대였기 때문에 그가 좀더 쉽게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9시~12시 국가들이나 중국에 비해 낙후된 경제력을 갖고도 짧은 시간 내에 대대적인 영토확장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광개토태왕의 리더십이 그만큼 출중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똑같은 직원과 똑같은 자본을 갖고 회사를 경영했는데도 전임 CEO는 연간 100억의 매출액밖에 올리지 못한 데 비해 후임 CEO는 500억의 매출액을 올렸다면, 우리는 변화의 원인을 리더십의 차이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304년부터 5호 16국 시대가 시작되었는데도 광개토태왕(391년 즉위) 이전의 고구려 군주들은 중국을 상대로 뾰족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에 비해 광개토태왕은 21년간의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 영토를 대대적으로 확장시켜 고구려가 동아시아 2위, 아시아 3위의 대국으로 급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를 만든 장본인이다. 광개토태왕 이전의 고구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와는 거리가 멀었다.
광개토태왕 시대는 9시~12시 방향이 강성한 시대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우라면 0시~3시 방향의 고구려로서는 힘을 쓰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의 등장으로 인해 약 250년 동안 한민족은 아시아의 강자로 활약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당시의 고구려는 남(9시~12시 국가들)의 시대에 나의 발전을 이룩했던 것이다.
남의 시대에 나의 발전을 구가하는 사례는 역사적으로 그리 흔치 않다. 고구려 멸망 이후의 발해도 만주를 지배하기는 했지만, 발해의 지위는 고구려에 비해 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9시~12시 국가들에 비해서도 강하지 못했다.
고구려 이후 아시아에서 그런 기적을 연출한 대표적 사례로는 19세기 일본을 들 수 있을 정도다. 서양이 동양을 압도한 19세기 서세동점의 시대에 일본은 동양 국가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청일전쟁 때 받은 배상금을 밑천으로 해서 러일전쟁(1904~1905년) 이후 세계 최정상급으로 떠올랐다. 19세기 일본 역시 남의 시대에 나의 발전을 구가했지만, 이런 사례는 그리 흔치 않다.
남의 시대이니 나는 조용히 숨죽여 살며 다음 기회나 노려보자는 생각으로 살았다면, 광개토태왕은 그런 위업을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9시~12시 국가들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으니, 우리 고구려는 훗날을 기약하자'고 생각했다면, 그는 광활한 영토의 주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핸디캡을 핸디캡으로 여기지 않고 핸디캡에 자극을 받아 한층 더 맹렬히 질주하는 도전정신. 그런 도전정신이 원동력이 되었기에 광개토태왕의 고구려는 남의 시대에 나의 발전을 구가하는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민족이 광개토태왕을 만난 것은 대단한 행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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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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