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해리 스파이서 2011년
해리 스파이서
해리 스파이서(Harry Spicer)씨는 지금 호주 한국전쟁 참전용사회 회장이다. 나는 현대사를 공부했지만 부끄럽게도 한국전쟁에서 호주군의 역할과 희생에 대해 그동안 깊이 알지 못했다.
몇 년 전 호주 시드니와 캔버라로 출장을 가서 전쟁박물관 등을 방문한 적도 있었지만 유럽이 비하면 신생 국가인 호주가 한국전쟁 중 어떤 공헌을 했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한국전쟁 61주년을 맞아 이 기사를 준비했다. 아래는 지난 몇 주간 해리 스파이서씨와 내가 나눈 이메일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먼저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을 감사드린다. 한국전쟁 당시 당신의 계급과 역할은 무엇이었나?"난 상병이었고 분대장으로 7~10명의 부하가 있었다. 호주 미들섹스 보병연대 1대대 소속 이었다. 당시 나는 젊은 군인 사병이었기 때문에 내 역할은 그저 상부의 명령에 따르는 단순한 것이었다."
- 1950년 처음 한국에 대해 들었을 때, 그리고 한국에 간다고 했을 때, 또 한국에 도착했을 때 인상이 어땠나?"한국에 전투하러 간다고 들었을 때 나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 전 우리군은 홍콩에 주둔해 있었다. 당시 홍콩에서 한국으로 도착하니 한국 경치가 홍콩처럼 산이나 언덕이 많았고 나는 우리가 막 떠난 홍콩과 한국의 경치가 너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난 19살에 불과해서 뭔가 흥미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이 없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도 못한 채 말이다."
"눈 앞에서 전우가 사라졌을 때, 최악이었다"- 한국전쟁 중 가장 충격적인 경험이 무엇이었나? 또 어려운 임무는 무엇이었나."최악의 경험은 내 앞에서 금방 이야기를 나누던 멀쩡하던 전우가 한 순간에 죽거나 부상당하는 순간이었다. 또 한국 피난민들이 당시 비참한 상황에서 살려고 몸부림치던 모습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중공군과 북한군으로 부터 탈출하려고 사력을 다하는 한국 피난민들의 모습도 보았다.
더욱이 영하의 추운날씨에 불씨 하나 없이 한데서 자며 덜덜 떠는 노인, 여성, 아이들의 모습도 너무 불쌍했던 기억이 난다. 걸어서 피난 가는 행렬을 여기저기서 봤다, 등에다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 길가 여기저기 죽어서 빨래처럼 널브려져있는 피난민들 시신도 봤다. 더욱이 탱크에 깔려서 마른 오징어처럼 납작하게 죽은 채 길가에 그대로 버려져 있던 아이들 시신도 지금 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참 이상하다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데 하나도 안 잊힌다.
한번은 1950년 9월 인데 우리부대가 길 건너 한 언덕 위 고지를 점령한 적이 있다. 그런데 미 공군이 우리 군에게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아마 우리가 그 부근에 있던 적군인 줄로 알았던 것 같다. 그 폭격으로 우리 군에 백여 명의 사상사가 생겼다.
부상자들은 모두 화상인데 피부가 시커멓게 타들어간 전우들 모습을 보니 무섭게 소름이 끼쳤다. 또 그 부근에서 네이팜탄 폭격으로 북한군 2명이 지프차에 앉은 채 그대로 죽어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그 북한군 몸 덩어리가 마치 숯처럼 새카맸다.
어려운 임무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유엔군이 후퇴하기 시작했을 때 유엔군을 엄호하는 것이었다. 나는 후퇴를 안 하고 후퇴하는 유엔군을 엄호하기 위해 돌진하는 중공군에게 총을 미친 듯이 쏘아댔는데 정말 하기 싫었다. 그 와중에 미처 후퇴를 못하고 중공군과 육박전을 하는 유엔군의 모습도 보았다, 아군과 적군이 서로 괴성을 지르면서 총과 대검으로 때리고 찌르면서 죽고 죽이는 모습을 보니 그게 바로 생지옥이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