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저승에서 소주 한 잔 합시다

최영 시인님, 이승에서의 고통과 고뇌에서 벗어나 편히 잠드시길

등록 2011.07.11 10:49수정 2011.07.1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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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일) 아침에야 휴대전화기에 저장된 전화번호 하나를 삭제했다. 번호 주인은 지난달(6월) 29일 고인(故人)이 된 최영 시인. 그가 내 곁을 떠나간 지도 열흘이 넘어간다. 그러나 그의 정겨운 사투리와 그늘진 표정은 내 가슴 언저리에 영상으로 남아 언뜻 언뜻 내비친다.


a  최영 시인의 40대 모습. <은파에서 째보선창까지> 제1권에 실린 사진입니다.

최영 시인의 40대 모습. <은파에서 째보선창까지> 제1권에 실린 사진입니다. ⓒ 조종안


최영 시인과의 인연은 부산에 살 때 그의 수상록 <은파에서 째보선창까지>(1권-6권)을 통해 맺어졌다. 최 시인이 1973년 7월1일 군산 시청 부시장실에서 공무원 임용 발령장을 받으면서 시작되는 진솔한 고향이야기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던 것.

최영 시인은 1945년생으로 전북 순창이 고향이다. 1968년 맹호부대로 월남전 참전, 제대 후 브루나이 공화국 공사장에서 다쳐 장애의 몸으로 귀국하여 군산에 터를 잡는다. 군산에서 가정을 가졌고, 아들을 보았고, 84년 <시문학>으로 등단, 올해엔 한국 문인협회 이사가 되었다. 그는 군산의 하늘과 땅, 산천을 사랑하고 사람들도 사랑하려고 한다고 말해왔다.

2010년 4월30일 <오마이뉴스>에도 소개되었던 책 '은파에서 째보선창까지'를 읽으며 불완전한 몸으로 병마(우울증)와 싸우면서 무척 고독해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순간 '무척 외롭게 지내는 분이구나, 고향으로 이사하면 열렬한 독자가 되어 드려야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목포역 광장에서 야간 유세를 할 때 갑자기 정전되었다 합니다. 연설 도중 불이 꺼졌는데 김대중씨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포 시민 여러분! 이제 캄캄하여 여러분이 마음대로 박수치고, 마음대로 좋아해도 알지 못하여 잡아가지 못하도록 도와준 목포 시장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냅시다'라고 제의한 후 명연설을 했다는 이야기는 늘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은파에서 째보선창까지> 2권 113쪽) 

최 시인은 감옥에서 6년, 연금생활 10년을 극복하고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자기의 목표에 최선을 다한 김대중의 모습에서 많은 사람이 감명을 받고 있다며 1997년 12월 선거 승리로 50년 만에 이룬 정권교체를 감격해 하며 환영했다. 김대중 카페를 운영하고 있어서 '동병상련'의 정을 느꼈다.


월남에서 돌아온 71년 봄 김대중 후보를 가까이서 보려고 전주고 운동장에 설치된 단상 앞에서 기다렸다는 최 시인은 박정희의 군사독재 18년을 '암울했던 시절', '지긋지긋한 세월'로 묘사했다. 특히 40대 중반에 우울증으로 고생했다는 대목은 더욱 애잔하게 다가왔다. 

"10여 년 전 나는 한 해 동안 내장산을 40회 이상 등반을 하였습니다. 삼학동 사무장에서 의료보장 계장으로 옮겨오던 시절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늘 세상은 쓰레기처럼 보였고, 머리엔 주검으로 가득했던 시절이었습니다. 28일 동안 개정병원 정신과 병동 입원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왠지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은 내장산이었습니다."(같은 책 154쪽) 


당시 40대 중반으로 휴일이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내장산을 찾았다며 산은 어머니요, 계곡은 큰 품으로 느껴졌다고 적고 있다. 최 시인은 만물의 존재와 생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긍정적 사고를 산으로부터 얻어냈다며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수없이 다짐했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렇게 쓴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사연들은 나를 열렬한 독자로 만들었다.  

처음 만남(2009년 9월30일)부터 마지막 만남(2011년 6월29일)까지

2008년 8월 군산으로 이사해서 최영 시인이 <군산뉴스>에 연재하는 '군산풍물기'를 빼놓지 않고 읽으면서 그의 곁으로 한발짝씩 다가갔다. 그렇게 글만 대하기를 1년 남짓. 2009년 9월30일 '오성문화제전' 취재 현장에서 처음 만났다.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지만, 반가웠고 의미도 있었다.

a  2009년 군산 시민의 장을 수여받는 최영 시인. 이날도 표정이 시종일관 무거워 보였습니다.

2009년 군산 시민의 장을 수여받는 최영 시인. 이날도 표정이 시종일관 무거워 보였습니다. ⓒ 조종안


두 번째 만남은 2009년 10월1일 군산 월명체육관에서 열린 '제47회 군산 시민의 장' 수여식장이었다. 최영 시인이 각급 기관장과 사회단체장 등의 추천을 받아 지역발전에 헌신 봉사한 시민(문화체육부분)으로 뽑혔던 것.

당시 산업근로장 수상자가 이웃집 아저씨여서 마을 어른들과 축하해주러 갔다가 만났다. 그는 기쁘고 영광스러운 자리임에도 표정은 무거웠다. 축하해주는 사람도,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해서 수상 장면 등을 찍어 메일로 보냈더니 고맙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가끔 만나 글 쓰는 이야기도 하고, 격려도 하면서 어려움을 털어놓고 메일을 주고받는 사이로 발전했다. 가끔 거리를 거닐면서 군산의 근현대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작가와 독자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고 했더니 너무 과찬이라면서도 흐뭇해했다.

군산 토박이인 나는 73년 7월에 정착한 그에게 50~60년대 군산 분위기를 설명해주었다. 관련 사진도 보내주었다. 어쩌다 그가 연재하는 '군산풍물기'에 등장하는 인물, 관공서, 식당 등의 주소나 이름의 오류를 지적하면 나처럼 꼼꼼하게 읽어주는 독자가 있어서 보람을 느낀다며 고마워했다.

a  군산-장항 마지막 배로 장항으로 추억여행(2009년 10월31일)을 다녀와서 물메기탕을 먹는 최영 시인(우)과 이종예 당시 군산시 생활지원국장(좌). 최영 시인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본 것은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군산-장항 마지막 배로 장항으로 추억여행(2009년 10월31일)을 다녀와서 물메기탕을 먹는 최영 시인(우)과 이종예 당시 군산시 생활지원국장(좌). 최영 시인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본 것은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 조종안


 
군산-장항 뱃길을 잇는 금강호의 마지막 운항에 동승해서 아련한 추억을 되새겼고, 11월에는 이희호 여사를 뵙는 자리에 동행하였다. 2010년 8월에는 하의도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1주기 추모행사에 함께 다녀왔다.

<은파에서 째보선창까지> 한 질을 김대중 도서관에 추천해서 비치해 놓기도 했다. 김대중, 김영삼의 민주화 운동 과정은 물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등 역대 대통령들이 군산을 방문했을 당시 상황을 꼼꼼히 기록해놓고 있어서였다. 그 외에도 김대중 대통령 관련 책자나 관련 정보를 보내주었으며 그때마다 글 쓰는 데 도움이 된다며 기뻐했다.

2010년 12월에는 문우 네 명과 월남 사이공 대학과 북부 하노이 대학에도 들러 미팅을 갖는 시간이 있다며 귀국하면 책으로 나올 거라고 했다. 그러나 책은 출판되지 않았다. 6개월 가까이 만나지 못하다가 지난달 28일(화) <군산뉴스> 김철규 편집인과 셋이서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그날 점심은 최영 시인과의 마지막 만찬이 되고 말았다.

"훗날 저승에서 빈대떡에 소주 대접할게요!"

지난 6월 29일(수)에는 늦게나마 형수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해서 아내와 함께 냉면과 삼겹살을 포식했더니 졸음이 쏟아졌다. 해서 시원한 들녘바람을 가슴에 품으며 낮잠을 즐기려고 거실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오후 4시가 넘어가는 걸 보면서 잠들려는 순간 휴대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구 시청 건물 앞에서 60년대식 추억의 다방을 경영하는 박 마담이었다. 나만큼이나 최영 시인의 열광적 팬인 박 마담은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황급히 말문을 열었다. 

"최영 시인님이 돌아가셨다는데 진짜에요?"
"멀쩡하던 최 시인이 돌아가시다니, 무슨 얘기인지···."

"저도 몰랐는데 시청 직원이 조금 전 3시쯤 집에서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얘기해줘서 알았어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어서 확인해보려고 전화했어요. 두 분이 친하시잖아요."
"설마, 최 시인이···. 아무튼 저도 처음 들었으니 알아봐야겠네요."

등산하다 다친 몸으로 나와서 점심값까지 치렀던 양반이 돌아가시다니 어이가 없었다. 처음엔 설마 했으나 불안이 밀려왔다. 손님의 대화를 엿들은 게 아니고, 시청 직원이 전해주었다는 것과 박 마담이 평소 농이나 장난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 순간 두 개의 단어가 떠올랐다. '우울증'과 '자살'이었다.

최영 시인이 '자살'했을 거라며 한숨을 내쉬자 아내도 깜짝 놀랐다. 전날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 눈을 피해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살이 사실로 확인되기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a  지난달 29일 최영 시인 빈소. 점심을 먹은 다음날 영정사진으로 대하다니,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더군요. 문학 행사 자료 보내주기로 약속까지 했는데..

지난달 29일 최영 시인 빈소. 점심을 먹은 다음날 영정사진으로 대하다니,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더군요. 문학 행사 자료 보내주기로 약속까지 했는데.. ⓒ 조종안


비보를 듣던 날 밤 아내와 장례식장을 찾아 상주를 위로했다. 이튿날도 찾아가 문상객들과 슬픔을 함께했다. 그러나 영정 앞에서 절을 하지 않았고, 고인이 저승 갈 때 여비나 다름없는 부의금도 전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싫었고, 너무 미웠기 때문이었다.

주절 없는 얘기인 줄 알면서도 최영 시인이 살아 돌아와 "그렁께로, 잘 가라는 인사 한마디 없고, 저승행 열차에서 사 먹을 계란 값을 한 푼도 주지 않아 서운했어요!"라고 말하기를 기대해본다. 정겨운 사투리 '그렁께로'도 듣고 싶고, 단골집 '대정칼국수'에 가서 빈대떡에 소주 한 잔 대접하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싶어서다.

"최영 시인님! 훗날 저승에서 만나면 빈대떡에 소주 한 잔 대접하겠으니 이승에서의 고통과 고뇌에서 벗어나 편히 잠드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평소 사랑하던 후배 이종예 시인이 보내온 글도 함께 올립니다."

최영 시인 추모 글

이종예

시인으로 살다가 시인으로 떠난 사랑하는 최영 선배님
당신은 내 가슴에 담아두고픈 위대한 분이었습니다.
새벽을 알리는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도 
멀리서 들려오는 수탉의 홰치는 소리도
답답한 내 가슴을 시원케 하진 못합니다. 그저 울고 싶습니다

금강을 건너던 장항선 마지막 부둣가에서
뱃머리 부여잡고 울던 당신
시인으로 살다가 시인으로 떠나는 당신은 바보랍니다.

7월 초하루에 고은 시인의 <만인보> 재단이
그의 고향 군산에서 발족했습니다.
이 행사를 앞장서서 추진해야 할 당신이 
나 잠깐 쉬겠다고 하면서
연재 하던 <군산풍물기>를 두고
하늘나라에서 사용할 원고지 한 뭉치 들고 떠나다니요

당신은 바보랍니다
수많은 시민들 가슴에
수많은 문인들 가슴에
상처만 남기고 떠나는 당신은 바보랍니다!

어이 종예씨 이리 좀 와
당신 지난 번 글 너무 멋졌어!
그런데 뭐라고 하더라? 그렁게 잘 쓴 글이지
우리 잘 해보드라고···.

이 말을 내 가슴에 남겨두고 떠나시는 바보
최영 시인님 안녕히 가세요. 은파에서 째보선창까지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까지.

그간 수고 많이 하셨소
다시 만날 그날까지 하늘나라 주님 곁에서 편히 쉬소서!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최영 시인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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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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