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지 못한 사연을 이야기 하려니 눈물부터 흐른다
김혜원
깊은 장마가 잠시 주춤한 지난 7월 8일, 또 한 분의 늦깎이 공부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서울 도봉구 창동의 가인초등학교를 찾았다.
손녀 같은 나이의 앳돼 보이는 여자 선생님 앞에서 오늘 배운 문장을 띄엄띄엄 읽어 가시는 할머니들. 어쩌다 발음이라도 틀리면 사춘기 소녀들처럼 꺄르르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예순, 일흔의 당신들 나이는 어디로 가버리고 책상 크기에 맞는 초등학교 어린이로 돌아간 듯 천진난만해 보인다.
수업을 마치고 반장의 구호에 따라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사랑합니다' 표시를 만들어 인사를 하는 모습 역시 딱 초등학생들이다.
할머니의 이름은 김순자. 연세를 여쭈니 당황하신다.
"원래는 예순다섯인데 주민등록이랑 호적에는 43년생 그러니까 예순아홉으로 되어 있어요. 남편이 혼인신고를 하면서 나이를 그렇게 고쳤다고 하더라고요."할머니의 고향은 강원도 고성. 네 살에 부모님을 잃었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가 민간인 신분으로 국군에게 길 안내하는 일을 했다가 그만 북한군 총에 맞아 돌아가셨어요. 그 충격으로 어머니도 같은 해에 돌아가시고.... 그때 제 나이가 네 살이었지요. 열여섯 큰언니, 열두 살 작은언니 그리고 저 이렇게 셋만 남겨두고 가셨어요."국군 길 안내하던 아버지는 북한군 총에....
부모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김 할머니를 키운 건 큰언니였다. 하지만 졸지에 부모를 잃고 두 동생과 함께 고아가 되어 버린 큰언니도 어린 막내동생을 가르칠 만한 형편이 되지는 못했다.
"큰언니가 열아홉에 결혼하면서 저를 데리고 갔어요. 작은언니는 어느 집 아이 봐주는 일 하러 보내졌고, 저는 어려서 데리고 시집을 간 거예요. 여덟 살에 조카가 태어났는데 바깥일 하는 언니 대신 조카를 업어 키우고 집안 살림하느라 학교 갈 생각도 못했지요. 열아홉에 결혼할 때까지 조카 셋을 모두 제가 키웠어요. 집안일도 거의 도맡아 했고요."학교 갈 나이가 되었지만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에 결혼한 언니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다 보니 학교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였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인사하는 어르신들.
김혜원
"언니와 성이 다른 것도 모르고 살았어요. 동네에서는 누구나 저를 박순자라고 불렀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위에 두 언니와는 제가 성이 다르더라고요. 호적은 언니들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 김씨로 되어 있더라고요. 그것도 결혼 후에 알았고, 알고부터는 김순자로 불렀지요. 언젠가 큰언니에게 공부도 시키지 못할 거면 보육원에 보내지 그랬냐고 원망을 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다 이유가 있었다 싶더라고요." 조카 셋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면서 언니 집에 얹혀살던 할머니는 열아홉에 여덟 살 많은 총각과 결혼을 한다. 하지만 부모가 없었기에 혼인신고를 하면서 나이를 속일 수밖에 없었다. 혼인신고 이후 할머니는 원래 나이인 47년생 돼지띠가 아닌 43년생 양띠로 살게 된다.
"열아홉에 결혼하려면 부모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부모님이 안 계시니까 증인을 세우라는 거예요. 증인 세우고 뭐하고 복잡하니까, 우리 신랑이 네 살을 올려서 혼인신고를 했다더라고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문제가 많았지요."할머니가 시집간 곳은 강릉시 연곡면 행정리.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옹기를 만들며 사는 옹기촌이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흙이 좋고, 땔감이 많은 데다가 사철 맑은 물이 흘러 옹기장이들에게는 천혜의 지형이었다.
"흙도 좋고 물도 좋고 땔감도 많으니 좋은 그릇이 나왔어요. 옹기, '꺼먹이'라고 불렀는데 질그릇, 물동이, 설거지 그릇, 화로, 자배기, 똥장군, 항아리 다 만들었죠. 밥은 먹고살만 했지만 양은, 스텡(스테인리스), 플라스틱 그릇이 나오면서는 사양길이었어요. 그래서 서울로 왔죠."옹기 굽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고 살던 옹기장이 부부가 삶의 터전이었던 옹기터를 버리고 서울로 이사 왔다. 더 이상 옹기를 구워서는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낯선 땅 서울에 와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날품팔이 막노동이 전부였다.
옹기장이, 서울 핫도그에 꽂혔네"남편은 막노동 나가고, 나는 어린 막내를 등에 업고 뭘 할 수 있을까, 뭘 해야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우리 애들하고 먹고살 수 있을까, 궁리하면서 시장을 돌아다녔어요. 그러다 핫도그 장사가 눈에 띄었지요. 간식이라고는 감자나 옥수수 밖에 몰랐던 내 눈엔 그게 아주 신기하더라고요."요리라면 자신이 있었던 할머니. 시골에서 밀가루에 막걸리를 넣고 빵을 쪄내던 솜씨라면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그 길로 핫도그 손수레를 구입해 삼 개월 남짓 장사를 해보았을까. 기름 온도가 너무 오르는 바람에 핫도그가 기름 속에서 터져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고 말았다.
"얼굴이고 팔이고 온통 데어서 허물이 벗겨지고 난리도 아니었지요.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그땐 화상 입은 살이 꺼멓게 변해서 한동안 엄청 흉했어요. 힘들었지만 다시 재기했어요. 어쩌겠어요. 애들하고 살아야 하는데···."할머니가 구워 파는 핫도그는 도봉시장의 명물이 될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물론 중간에 화재로 핫도그 손수레를 홀랑 태워 버린 일도 있었지만, 칠전팔기 또순이 할머니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10원짜리 핫도그 팔아서 우리 아이들 학교 보내고 먹고 살았지요. 나중엔 일수를 얻어서 시장 한 켠 가건물에서 분식점을 시작했는데 그 자리에서 23년을 했어요."할머니가 핫도그를 파는 동안 할아버지는 지인의 도움으로 도봉구청 청소부 일을 하게 되었다. 많건 적건 월급을 받는다는 게 정말 고마웠다.
"남편은 청소부로 20년, 나는 분식집 23년. 열심히 벌어서 아이들 공부시키고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어쩌다 아이들 가정환경조사서에 부모의 학력이나 하는 일을 적으라고 하면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도 했지만 어쩌겠어요. 그래도 자식 넷 모두 대학 보내고 잘 자라 이제는 자기 몫을 하고 사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좋은지 몰라요." 23년 같은 자리에서 분식집을 해 온 할머니. 많은 경쟁 가게가 생겨도 유독 할머니 가게 앞에만 손님이 줄을 섰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나 비결을 물었다.
"손님의 입맛은 정직하거든요. 잘 되는 가게는 별거 아니에요. 신선한 재료, 정성 그리고 욕심 부리지 않는 것. 이것만 잘 지키면 절대로 망하지 않아요. 저는 많이 남기려고 하지 않아요. 손이 커서 다른 가게보다 뭐든 크기도 크고 양도 많지요. 그러면 되더라고요. 분식집뿐만 아니라 장사는 뭐든 마찬가지 같아요. 좀 밑지고 판다 싶으면 그게 남는 거예요."
▲마음에 품은 배우지 못한 한을 이제는 풀게 되었다는 김순자할머니
김혜원
자식들이 모두 성장해 제 몫을 할 때까지 자신의 꿈을 뒤로 미루어 온 할머니. 어린시절부터 품어왔던 배움에 대한 한을 예순다섯이 되어서야 풀게 되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학교에 나와 공부하게 된 게 꿈만 같다.
"배려받는 건 처음... 손자 직접 가르치고 싶다""어린 시절에 방학 때면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와 잠깐씩 글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때 배운 게 전부였어요. 그래도 그때 조금 배웠다고 쉬운 글자는 읽을 수 있지만 받침 많고 어려운 글자는 지금도 잘 모르고 무엇보다도 쓰는 건 정말 자신이 없지요."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은 무엇이든 읽는 버릇을 가져다주었다. 그나마 아는 글이라도 잊을까 봐 지하철역이나 길거리에 꽂혀 있는 무가지 신문을 들고 와 찬찬히 읽는 게 할머니의 유일한 공부였다. 그러다가 신문 정보란에서 무료 한글교육에 대한 공지를 봤다.
"지금이 저에겐 유일한 기회예요. 손자 둘을 돌보고 있는데 네 살, 다섯 살이거든요. 둘 놀이방에 보내놓고 여기에 오는데, 애들 초등학교 가기 전에 저도 한글공부를 마치려고 해요. 아무래도 초등학교 가면 또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서요.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몰라요."평생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낸 적이 없는 할머니. 언제나 자신은 뒷전으로 미루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던 할머니가 처음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여기 오면 나만을 위해 뭔가를 하는 거잖아요. 선생님이 나를 위해 공부를 가르쳐 주시고,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 주시고, 나를 위해 교재도 준비해 주시고... 누구에게 이렇게 배려받고 대접받는 게 처음이라서 얼마나 황송하고 고마운지 몰라요. 내 생전에 이렇게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상상도 못했어요. 요즘은 정말 행복해요."65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할머니. 이제 막 한글을 배워 읽고 쓰기 시작했지만 배운 공부로 손자들 공부고 가르치고 23년 분식집을 하며 터득한 요리법이 담긴 요리책도 쓰고 싶다는 꿈이 있으시다며 수줍게 웃으신다.
"23년간 분식집을 하면서 제 나름대로 요리법을 많이 알게 됐어요. TV를 봐도 요리 프로그램에 늘 관심이 많은데 글을 익히면 그동안 제가 알던 요리법을 책으로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내 아들, 딸, 며느리에게 주고 싶고 손자들에게도 남겨주고 싶어요. 우리 애들 자랄 땐 내가 글을 몰라 가르쳐 주지 못했지만 손자들은 가르치고 싶어요. 배워서 남 주자는데 저도 그러려고요. 욕심은 많은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무학력 성인을 위한 문자해득 프로그램은? |
서울시교육청(교육감 곽노현)은 지난 4월부터 초등학교 15곳, 문해 교육기관 16개 기관 총 31개 기관에서 초등학력 취득이 가능한 문자해득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 무료로 운영되며 외부기관에 따라 3만 원의 수업료를 받는 곳도 있다.
만18세 이상 저학력, 비문해 성인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이 프로그램은 각 단계 중 자신의 수준에 맞는 단계부터 교육과정을 이수할 수 있고, 3단계부터 이수할 경우 최소 1년 만에 초등학교 졸업학력 취득이 가능하다.
수업은 한글과 초등 1∼2학년 과정을 배우는 1단계와 초등 3∼6학년 교과를 반영한 2·3단계가 있으며 각 단계의 이수 기간은 1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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