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동북부 지역 순례길에 오르다

분단의 땅에서 평화의 기도를 하다

등록 2011.07.24 18:30수정 2011.09.05 10:4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11년 3월 강원도 홍천에서 아름다운마을 초등학교와 생동중학교를 14명의 친구들과 함께 시작했다. 공동생활을 하며 서석면 효제곡 마을 생활을 경험했다. 생태뒷간을 쓰며 그 오줌과 똥으로 농사를 짓는다. 2km 거리에 떨어져 있는 학교와 생활관을 오가고, 오가는 길에 보는 풀, 나무, 곤충, 열매를 본다. 가끔은 가까이서 관찰하는 다람쥐, 고라니, 멧돼지에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봄에는 봄나물을 뜯어 먹고, 여름에는 오디를 따 먹으며 자연의 흐름을 자연스레 몸으로 익혔다. 오가며 만나는 마을 주민들에게 큰 소리로 인사하며 어엿한 마을 주민이 되어 갔다.

 

이 흐름을 이어서 홍천이 속한 강원도 땅을 공부하기 위해 강원도 동북부 순례길에 올랐다. 강원도 땅에 서려 있는 질곡과 역사를 알아보고, 거기서 시작되는 평화와 생명의 이야기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기 위해서이다. 2011년 7월 18일에서 22일까지 홍천에서 시작하여 인제, 양구, 고성, 속초를 돌아보며 강원도 동북지방을 순례했다.

 

어떻게 마을에서 총 소리가 들리나요?

 

"땅 땅 땅"

 

우리가 찾아간 DMZ 평화생명동산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처음 총소리를 들어본 친구들은 무슨 소리냐고 질문했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마을에서 총소리가 왜 들리는지 의아해 했고, 무서워했다. 마을에서 총소리가 들리는 것은 당연히 의아해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사는 지역 주민들에겐 이 소리가 일상에서 듣는 익숙한 소리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두려움'과 '익숙함'의 차이가 자연스럽게 친구들에게 느껴졌다.

 

총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만든 무기이다. 이 소리를 처음 듣고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반면 이 소리를 매일 듣는 이들에게 총소리는 익숙하다. 그러나 이 익숙함은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만성화된 것이다.

 

DMZ 평화생명동산은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해방 이후 소련의 점령을 받고 있던 38선 이북의 땅이었으나 6. 25 이후 휴전선 이남에 자리 잡으며 남한 땅이 되었다. 

 

DMZ 평화생명동산을 가기 위해 46번 도로를 타다 452번 도로를 탔다. DMZ 평화생명동산으로 오는 길에서 주요 도시와는 다른 자동차 정체현상을 경험한다. 서울과 주요 도시에서 출퇴근 시간을 피해야 한다면 이 도로에선 군대 차량 훈련 시간을 피해야 한다. 1차선 도로에서 느릿느릿 가는 군용 차량이나 전차 행렬을 만나기라도 하면 상당히 피곤해 진다.

 

또 서화면에는 8개의 법정리가 있다. 그 중 4개 '리'는 민통선 혹은 비무장 지대 안에 포함되며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다. 나머지 4개 리(천도리, 서화리, 신적리, 서흥리)에만 사람이 산다. 서화리는 서화면 면소재지였으나 전쟁 이후 민통선 지역이 되며 주민들이 살지 못하는 땅이 되었다. 그러다가 1958년 3월부터 민간인이 입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453번 도로를 기준으로 왼쪽은 주민들이 사는 마을이고 오른쪽은 모두 군대다. 주민들 중 70% 군인이고, 그러기에 이 촌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군인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이곳에 자리 잡은 학교의 90%는 군인 자녀들이다.

 

서화면의 반은 텅 비었고 나머지 반은 군대가 마을 구석구석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우리가 방문한 DMZ 평화 생명동산은 이런 지역에 자리잡았다. 우리를 안내해 주기 위해 나오신 천도리 이장님과 DMZ 평화생명동산 박준수 선생님으로부터 줄기차게 이 지역의 실상을 들으며 우리가 사는 강원도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왜 북한을 '적'이라고 표현하나요?

 

DMZ 평화생명동산의 선생님들과 함께 제4땅굴과 을지전망대를 갔다. 제 4땅굴은 1978년 제3땅굴이 발견된 지 12년만인 1990년 3월 3일 양구 동북방 26k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a

제4땅굴을 발견하는 도중 남한에서 유일하게 희생된 군인이다. 이후 이 개는 소위로 격상되었다. ⓒ 정유곤

제4땅굴을 발견하는 도중 남한에서 유일하게 희생된 군인이다. 이후 이 개는 소위로 격상되었다. ⓒ 정유곤

제 4땅굴을 들어가기 전 '개 동상'이 하나 보인다. 4살 된 독일산 세파트인데 그 계급이 소위이다. 지뢰를 탐지하는 계급이 있는 군견이었는데 땅굴을 발견하며 유일한 남한 측 희생자이다. 제 4땅굴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지뢰를 탐지하며 앞서서 들어간 이 세파트가 지뢰를 밟았다. 그리고 그 개는 훈련받은 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멈추어 서 있어서 나머지 병사가 빠져나갈 수 있었단다. 그래서 그 계급이 소위로 격상되었다. 또 이 땅굴은 북한에서 10년에서 12년 정도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그에 비해 우리는 첨단 장비로 발견된 지점에서 땅굴이 파져 있는 구간까지 금방 팠다고 한다.

 

땅굴을 파고 발견하는 것에서도 우리는 체제경쟁을 일삼는다. 북한은 땅굴을 다이나마이트와 재래식 기구로 파며 많은 사람이 죽고 오랜 시간이 걸렸단다. 하지만 우리는 첨단 기계로 순식간에 땅굴을 파며 소위로 격상된 개 한 마리의 죽음만이 있었을 뿐이다.

 

제 4땅굴 안에는 땅굴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전동차가 있다. 우리와 같이 단체로 온 손님들이 줄을 서고 있어 40분가량을 기다려서야 그 전동차를 탈 수 있었다. 대략 100m 정도 운행하는 전동차는 이제 안보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기다려서 탈 수 있는 놀이기구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안은 여전히 삼엄하다. 우리가 타고 간 전동차 레일 옆쪽으로는 "적이 사용한 레일"이라는 말이 적혀 있다.

 

군대 차량과 민간 차량이 부딪쳐 전복사고가 일어나 을지전망대를 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다행히 그 상황이 처리되어 을지전망대를 갈 수 있게 되었다.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를 통과하고, 을지전망대 도로 옆으로는 남과 북이 갈라진 현실을 잘 보여주는 흉한 철조망들이 쳐져 있다. 또 길 양 옆으로 '지뢰'라고 적힌 표시가 듬성듬성 꼽혀 있다.

 

초등학교까지 을지전망대 근처의 마을에서 사셨다는 천도리 이장님은 이 지역을 오가기 위해 출입증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 출입증에는 사단장, 인제 군수, 보안 담당자 확인이 찍힌 도장이 있었단다. 과거에는 그 출입증만이 이 삭막한 '길'을 지나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출입증은 '특권'이 아니다. 다만 이 삭막한 곳에 자신이 산다는 것을 자각하게 해 주는 '확인증'일 뿐이다.

 

a

안개가 자욱해서 아쉽게도 직접 북한을 보지 못하고 모형을 보며 을지 전망대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 정유곤

안개가 자욱해서 아쉽게도 직접 북한을 보지 못하고 모형을 보며 을지 전망대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 정유곤

을지전망대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그래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 북한 땅을 눈으로 직접 보는 감격은 잠시 미뤘다. 영상을 보고, 전망대에서 보이는 산과 지형지물을 축소한 모형물을 보며 담당 병사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그 설명 중 황당한 이야기에 우리 친구들의 귀가 솔깃한다. 북쪽은 선녀탕을 만들어 여군들이 그곳에서 알몸으로 목욕을 하게 했단다. 그에 경쟁이라도 하듯 남한에서는 가칠봉에서 미스코리아 수영복 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한 곳의 문을 열어둬서 미스코리아 참여자들이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북한 병사들이 볼 수 있게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친구들은 헛웃음을 짓는다. 이렇게 유치할 수가… 군사적 대치는 분노와 미움을 낳지만 이런 유치함도 낳는다. 그 유치함 뒤에서, 한 사람의 인권이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된다. 우리가 처한 분단체제는 미움과 분노를 낳고, 한 사람의 인권이 무시되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용납되는 폭력을 낳는다. 우리는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 폭력이 일상화되고 익숙해져서는 안된다. 이 폭력을 어색하게 여기고 분노할 수 있는 감수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돌아와서 하루를 돌아보고 무엇을 공부했는지 함께 나누었다. 모든 친구들이 동일하게 질문한다. "왜 북한을 적으로 표현하나요?"

 

누군가를 '적'으로 정하고 살아가는 삶은 참 불행하다. 그런데 그 적을 한 민족이었던 북한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삶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북한군이 우리의 '적'이 아니라 북한군을 '적'이라고 규정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평화롭게 공존하려면 그 시대적 규정을 먼저 깨야하지 않을까?

 

한반도의 통일을 기도하는 타기모토 스님을 만나다

 

a

우리가 묵은 한국 DMZ 동산 서화재다. 이곳에서 타기모토 스님을 만났다. ⓒ 정유곤

우리가 묵은 한국 DMZ 동산 서화재다. 이곳에서 타기모토 스님을 만났다. ⓒ 정유곤

우리가 한국 DMZ 평화생명동산에서 묶은 숙소는 '서화재'라는 한옥집이었다. 그곳에서 2010년부터 머물고 계신 일본 스님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의 성함은 타키모토 잇코이다. 오랜 시간을 만나진 못했지만 아침 식사 시간 우리 친구들과 대화하며 밥상을 함께했다.

 

어떻게 일본에서 이 땅에 오게 되었는지 여쭤보았다. 능숙하진 않지만 스님은 천천히 우리말로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2년 전 한국에 와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고 한다. 한국으로부터 많은 문화를 전해 받은 것에 대한 고마웠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을 사죄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싶어서 이곳에 오셨단다. 새벽 5시부터 기도를 하고, 6시부터 넓은 부지의 평화생명동산을 작은 북을 치며 걸으며 기도하는 스님을 볼 수 있었다.

 

아침밥 먹는 동안 타키모토 스님의 이야기에 모두 감동을 했다. 싸움과 분쟁이 일어났던 땅,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땅에서 타지에서 온 스님 한 분이 기도를 한다. 한 사람의 기도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는 울림이 되었다. 전쟁의 흔적이 강하게 새겨져있기에 누구보다 힘들고 피해의식에 젖어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상처와 아픔이 서려 있는 곳에서 우리는 더 간절히 평화를 소망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사는 강원도 땅. 그 곳에서 우리도 평화의 기도를 한다.

 

a

DMZ 평화생명동산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인제의 가장 북쪽에서 평화와 생명의 역사를 증언하는 이곳이 있어 참 감사하다. ⓒ 정유곤

DMZ 평화생명동산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인제의 가장 북쪽에서 평화와 생명의 역사를 증언하는 이곳이 있어 참 감사하다. ⓒ 정유곤

#강원도 #서화면 #DMZ 평화생명동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구순 넘긴 시아버지와 외식... 이게 신기한 일인가요?
  2. 2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중 대전 유흥주점 간 정준호 집행위원장
  3. 3 '윤석열 대통령 태도가...' KBS와 MBC의 엇갈린 평가
  4. 4 청보리와 작약꽃을 한번에, 여기로 가세요
  5. 5 5년 뒤에도 포스코가 한국에 있을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