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보기에도 긴장한 한 학생이 찾아왔다. 어제 성관계를 했는데 아무래도 불안하다는 것이다. 성관계 이후 살펴보니 콘돔이 찢어진 듯해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는 그 학생은 초초해하면서 해결방법을 물었다. 절대 임신은 안 된다며 이제라도 피임약을 먹으면 될지 불안해했다.
나는 그 학생을 안정시킨 후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응급피임약을 먹으라고 했다. 몸에 해로워도 먹어야겠다는 그 학생에게, 걱정하는 만큼 몸에 해롭지 않고 일반 피임약보다 조금 센 정도이니 괜찮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음날 그 학생은 의사가 별 말 없이 처방전을 써줘서 약국에서 약을 사먹고 훨씬 마음이 편해졌다며, 이 때문에 왜 병원에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처럼 사후피임약 사용자들은 병원 처방전을 받는 데 물리적 접근 이상의 심리적 어려움을 호소한다. 비슷한 사례로, 토요일에 성관계를 했는데 응급실에서 정말 '응급'으로 처방을 받느라 고생했다는 한 여성의 하소연도 들은 적이 있다. 월요일에 병원을 가게 되면 성관계 후 36시간 이상이 되어 피임 효과가 감소하기 때문에 응급실을 찾았다는 그 여성은 의사가 결혼 여부, 성관계 빈도, 약 복용 여부 등을 물어서 난감했다며 수치심을 넘어 분노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사후피임약의 정치학
최근 사후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에 대해 정부가 보류 의견을 제시한 가운데 관련 시민단체들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재검토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섰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정부가 사후피임약의 일반약 분류 타당성을 검토하면서 약리적 측면보다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해 보류 결정했다"면서 "안일한 인식과 태도에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사후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을 막는 근거는 무엇인가? 특히 자유롭게 판매되고 있는 피임약에 반해 사후피임약은 처방전이 필요한 전문약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무엇 때문에 사후피임약은 처방전이 필요한가? 정말 피임약이나 콘돔처럼 사후피임약을 누구나 살 수 있다면 한국사회의 성문화가 더욱 문란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인가? 아니면 낙태가 불법인 한국의 상황에서 사후피임약 등의 규제를 잘하면 근본적으로 낙태를 줄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이해관계가 있는가?
사후피임약의 일반약 전환 보류는 의/약계 등을 비롯한 관련세력의 이해관계와 낙태, 여성, 성관계를 바라보는 사회문화적 입장차이에 대한 '사후피임약의 정치학'으로 설명해야 한다.
사실상 사후피임약의 경우 의사들이 그 사유를 특별하게 묻고 처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을 필요는 없다. 사후피임약은 환자가 원한다면 의사가 처방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의료적으로 위험한 약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일각에서 논의되고 있는 여성 건강의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오심, 메스꺼움 등도 과용이나 오용하지 않으면 극복할 수 있는 개인차일 수 있다. 어떤 약도 과용, 오용은 위험하다. 단지 하루에 한알씩 먹는 피임약에 비해 사후피임약은 한 번에 먹기 때문에 호르몬의 정도가 강하며, 성관계를 할 때마다 복용하면 피임 효과가 없다.
사후피임은 책임있는 성관계를 위한 것
또한 사후피임약의 일반약 전환과 성관계의 무분별한 증가와의 관련성을 걱정하는 것 자체가 오산이다. 원래 피임(도구의 개발)은 안전한 성관계의 증가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사후피임약도 수정된 난자가 착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궁벽을 불안정하게 하는 피임약의 성분과 유사하며, 말 그대로 한 번에 먹는 피임약이다.
콘돔이나 피임약을 쉽게 산다고 성관계가 증가될 것이라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사후피임약도 성관계 후 사용할 수 있는 피임약일 뿐이다. 따라서 성관계가 무책임해질 수 있기 때문에 사후피임약을 일반약으로 풀기가 어렵다는 이들에게 과연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는지를 다시 묻고 싶다.
오히려 사후피임약을 사용한 사람들은 성관계 이후까지 임신을 예방하는 적극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며, 성관계에 대해 더욱 책임을 지는 태도라 할 수 있다. 반면 성관계에 무책임한 사람들은 사후피임은 물론, 사전피임도 잘 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후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을 통해 성관계의 책임성을 강조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일반약 전환이 걱정된다면 사후피임약만을 믿고 성관계를 한다면 '피임하지 않은 무책임한 자'라는 것을 강조하여 홍보하면 된다. 사후피임약의 효과보다 상대적으로 사전피임을 더 많이 강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또 사후피임약은 성관계 직후, 최대 72시간 안에 복용해야 효과가 있기 때문에 생명권하고도 관련이 없다. 수정된 난자도 생명이라고 주장하면 할 말은 없지만, 착상 이후부터 생명이라고 여기는 관점에서도 낙태 금지를 주장하려면 사후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은 필요하다.
또 여성의 건강권을 이유로 사후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을 반대하는 측에서도 피임 실패와 원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한 낙태 등 '여성건강의 범위'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아니면 누구 말대로 사전이든 사후든 남성이 먹는 피임약을 만들면 어떨지 조심스럽게 제안해본다. 행여나 여성이 먹는 사후피임약의 편리성으로 남성이 피임을 여성만의 책임으로 미뤄버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성관계의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나
마지막으로 사후피임약의 논란에서 꼭 짚어볼 것이 있다. 성관계의 결정권은 관계에 합의한 당사자에게 있으며, 사전이나 사후에 무엇을 사용하든 피임도 성관계의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혹 준비되지 않는 임신의 중단권은 성관계 당사자에게 있지만, '수정란이 머물 곳'을 가진 여성에게 조금 더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책입안자들은 무엇보다도 '여성의 입장'에서 신속하고, 안전하고, 편리하게 사후피임약이 선택되도록 고려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변혜정님은 서강대 성평등상담실 상담교수입니다.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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