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앵커 도전 인터뷰 사진
이영미
딩동 초인종이 울린 모양인지 우리 집의 반려견 쭈니와 도란이가 대문으로 나간다. 문을 열고 보니 좋은 내음이 나는 상큼한 30대 초반의 분이 까만 가죽가방을 들고 서 있다. 미리 딸이 문자메시지를 보냈길래 나는 들어오라고 했다. 딸이 보낸 문자메시지는 "엄마! 내 결혼 때 도와준 웨딩사에 연락해서 엄마 분장해주라고 했어!"였다.
그 전날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2차 카메라테스트를 위하여 의상과 분장은 자체적으로 알아서 준비해오라는 연락이었다. 그래서 딸이 내가 편안하게 집에서 받을 수 있게 아는 곳에 연락을 해서 사람을 보내준 것 같았다. 분장을 하면서 나는 딸아이 시집 보낼 때도 해보지 않은 속눈썹을 처음 달아보았다.
분장이 생각보다 오래 걸려 미리 예약해놓은 KTX 시간이 임박해오자 조바심이 나기도 했었지만, 다행히 신호대기에 많이 걸리지 않아 아슬하게 오송역으로 가서 무사히 영등포역까지 가게 되어 방송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523명의 지원자중 1차예선을 통과하여 2차에 올라간 지체, 시각, 편마비 등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 30여 명이 열심히 원고를 읽고 있었다.
원고를 받아서 읽기 연습을 하는데 방송에서 자막통역을 하는 수화통역 선생님이 와서 도와주고 싶다면서 읽어보라고 하셨다. 읽었더니 통역 선생님께서 너무 단조롭다고 하셨다.
그리고 자기에게 대화하는것처럼 읽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코스닥주식 지수 읽을 때, "125.45"일 경우 "일백이십오점사오"인데 내가 "일백이십오점사십오"라고 읽고 "35.06" 일 경우 "삼십오점영육"인데 내가 "삼십오점공육"이라고 읽는다고 지적해주셨다.
자막수신기가 있어 방송을 볼 때 앵커가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눈으로 볼 수는 있어도, 소리의 고저와 소리의 장단 및 액센트, 띄어읽기 등은 어떻게 알 도리가 없다. 하물며 주식지수 읽기는 자막에도 숫자로 나올 뿐이고 초등학교에서 배운다는 소수점 이하 읽기도 못 들으니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잘못 읽는다는 겸연쩍음보다 이제라도 바로 알게 되어 참 고맙고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숨을 조절하고 시키는 대로 다시 읽어보지만 발음의 고저강약과 속도는 조절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내 소리를 들어야 내 소리를 조절할 수 있는데 나는 소리를 들어서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수백 수천을 반복하고 온 신경을 가다듬어 호흡을 연습해서 소리를 내뱉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이 원하는 대답 알지만, 거짓말은 못하겠어
마침내 내 순서가 왔다. 10여 명의 심사위원과 셀 수 없는 카메라들. 내 자리만 불이 환히 켜지고 나를 주목하는 시선들. 떨렸다. 일단은 간단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
어떻게 앵커를 뽑는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고 얼마나 준비했나요?""어느 날 갑자기 티비를 보는데 홍보자막을 보고 벼락치기로 준비했어요""어떤 계기로 도전하게 되었나요?""우리나라 청각장애인은 못 듣는다는 이유로 언어습득의 기회를 잃어 언어장애라는 복합장애로 살아가는 사람이 대다수인데 앞으로 우리의 아들 딸인 청각장애 아동들이라도 언어장애가 없어 소리를 못 들어도 소리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요!"그리고 내게 주어진 3가지 뉴스원고를 읽었다. 통역선생님은 아까 연습할 때보다 자연스럽게 잘했다고 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또한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심사위원이 질문할 때 어떤 답을 하면 점수가 높게 올라가는지.
얼마나 준비했느냐고 물을 때 간절히 원하고 오랫동안 준비했다고 말했어야 하고, 도전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특정장애유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정보전달 하는 앵커라는 직업 자체가 너무 매력 있기에 꼭 하고 싶고 그래서 내 인생에 소중한 도전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어야 했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인생과 현실은 유기농 농사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암소의 걸음처럼 우직하게 걸어가는 것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것을 나는 경험에서 알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성취하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 가는 과정에 대한 진실성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편한 길이 아닌 힘든 길을 택해서 걸어가고 있는 나는 늘 웃는다. 처음에는 이러한 나의 선택에 대해서 설왕설래 참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진실이 아닌 부질없는 말들은 시간의 거름이 흐르면 진실의 강에 떠내려간다. 그리고 남는 것은 두 발바닥으로 걸어간 시간의 흔적들이다. 그 흔적들에게서 우리의 딸들과 어린 청각장애아동들이 민들레 희망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 것일까?
무용은 꼭 두 다리로 턴을 잘하는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림은 꼭 두 눈과 두 손이 있는 사람만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방송은 꼭 말을 잘 듣고 잘 말하는 사람들만이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청각장애인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계속 도전해서 우리의 아이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에 대한 가능성을 꽃 피워 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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