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심야식당'에서 즐기는 느끼한 추억의 맛

[푸드 스토리 17] 버터밥, 추억을 부르는 향긋함

등록 2011.08.04 10:23수정 2011.08.0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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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쏟아졌다가 날이 활짝 갰다가 완전 종잡을 수가 없네요. 이런 날엔 짜증만 팍팍 나고 밤엔 잠도 잘 안 와서 퀭한 눈으로 있다가는, 결국 고픈 배를 안고 주방으로 직행하게 되죠. 그런데 냉장고를 열어봐도 입맛을 당길 게 하나도 없네요. 있는 거라곤 버터와 옛날 소시지뿐이니. 그렇다면 오늘 밤참 메뉴는 추억의 음식, 버터밥과 분홍소시지 부침입니다.


버터라이스 옛날 분홍 소시지와 감자 된장국을 곁들인 버터라이스 상차림. 된장국을 버터라이스에 넣어 비벼먹어도 맛있다.
버터라이스옛날 분홍 소시지와 감자 된장국을 곁들인 버터라이스 상차림. 된장국을 버터라이스에 넣어 비벼먹어도 맛있다.조을영

버터 라이스 갓 지은 따뜻한 밥에다 버터를 넣어 비벼먹는다.
버터 라이스갓 지은 따뜻한 밥에다 버터를 넣어 비벼먹는다.조을영

버터밥은 참 심플한 음식이죠.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에서도 매우 드라마틱하게 그려진 영혼의 음식이고요. 길모퉁이 어느 골목에 자리 잡은 '심야식당'. 그곳은 밤이면 문을 열고 아침이면 닫는 기이한 가게입니다. 과묵한 한 남자가 초라한 그 가게에서 메뉴도 따로 없이 그저 손님이 주문하면 즉석에서 무엇이건 만들어주는 곳. 비싸고 화려한 음식은 못 만들지만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줄 음식을 내는 곳. 그곳이 바로 심야식당입니다.

그곳에는 기억 속에 묻어둔 소박한 음식들만 있습니다. 이를테면 여름 더위로 깔깔한 입안을 씻어줄 '오차즈께'(녹차에 밥을 말아먹는 것), 다른 재료를 넣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계란말이', 문어 모양으로 동심을 사로잡던 '비엔나소시지 볶음' 같은 것들이죠. 화려한 서양코스요리만 먹던 까다로운 음식평론가를 감동시킨 버터밥, 이곳의 빠질 수 없는 메뉴입니다.

저도 그런 버터밥을 이 야심한 밤에 만들어보려고요. 금방 지은 따뜻한 쌀밥과 버터만 있으면 뚝딱 만들 수 있는 음식. 지금의 중장년들도 어린 시절 많이 먹은 음식이라죠. 저 역시도 아버지가 이걸 굉장히 좋아하셔서 냉장고엔 버터밥 만들 버터가 따로 있었을 정도였으니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아버지께서는 식사를 하시다가도 문득 버터를 가져오라 하시곤 숟가락으로 밥을 헤쳐서 그 속에 버터를 한 술 떠 넣으셨어요. 따뜻한 밥의 온기로 버터가 흐물해지면 그 위에다 간단한 고명도 얹으셨죠. 잘 구워서 소금과 들기름을 바른 김, 감자와 풋고추를 넣어 자작하게 끓인 된장찌개, 숟가락을 대면 노른자가 포르륵 깨어지는 반숙 계란 후라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때론 고추장으로 간을 맞추기도 하셨고, 참기름과 간장, 깨소금을 뿌려선 고소한 냄새를 폴폴 풍기며 비벼 드셨어요.

버터라이스 계란 반숙 프라이,김가루를 넣어서 비벼먹으면 더욱 감칠맛 나는 버터라이스가 된다. 간장을 살짝 뿌리고 깨소금을 추가해도 맛있다.
버터라이스계란 반숙 프라이,김가루를 넣어서 비벼먹으면 더욱 감칠맛 나는 버터라이스가 된다. 간장을 살짝 뿌리고 깨소금을 추가해도 맛있다.조을영

우리도 먹겠다고 어머니께 조르면 "아서라, 비린내 나서 못 먹는다" 하시며 무슨 맛으로 그걸 드시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끌끌 차셨죠. 그래서 그 맛이 너무 궁금한 채로 눈과 코와 머리로만 기억해두었답니다.


향긋한 버터 듬뿍, 때론 날계란을 넣어야 더 맛나다며 톡톡 깨뜨려서 간장이랑 참기름이랑 깨소금을 듬뿍 뿌려 드시던 모습, 아직도 선합니다. 한입 받아먹으려 하면 "애들은 먹어봐야 비위만 상한다" 하며 손을 내저으시던 어머니. 그리고 그 맛이 어떤 것일까 애타 하면서 저는 어느새 어른이 되었고, 버터밥은 기억 저편에만 남아 있었습니다.

잘 보이고 싶어 안달 난 남자들이 사주던 화려한 스테이크도 먹어봤고, 이것저것 맛있단 음식도 만들어봤습니다. 덕분에 밖에서 사먹는 음식은 도저히 성에 차지 않게도 되었고요. 하지만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버터밥은 과연 어떤 맛일지 아직까지는 고이 간직만 해두었는데, 오늘은 직접 만들어 보았습니다. 아버지 앞에 앉아 입을 헤 벌리고 그 맛을 궁금해 하던 아이 시절을 떠올리면서요.


부들한 반숙 계란은 버터의 기름기를 잔뜩 품은 밥알과 함께 입안으로 들어옵니다. 버터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오니 잠시 큰 숨을 쉬며 그 비린 느낌을 참아봅니다. 익숙하지 않아선지 첫 술은 꽤 힘겹지만 한술 두술 들어갈수록 묘하게 '꼬소한' 것이 자꾸 입맛을 당기네요. 김에다가 싸먹어도 보고 그 옛날 아버지처럼 된장 한 술, 고추장 반 술을 섞어서 비벼먹어 봅니다. 계란 씌워 부친 옛날 분홍 소시지도 얹어먹고요.

버터라이스와 옛날식 분홍소시지 .
버터라이스와 옛날식 분홍소시지.조을영

버터밥. 아버지도 이 음식으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으셨던가 봅니다.  그래서 그리  맛있게 드셨겠지요. 그때는 버터가 귀하고 꽤 비쌌을 텐데 뭔가 남다른 식성을 가지셨구나 하며 흐뭇한 미소도 지어봅니다. 그리고 이 음식을 통해서 어떤 추억이나 평온을 건져내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여러분 영혼의 음식은 무엇인지요? 자장면? 김치찌개? 돈가스? 흔히 먹는 별식이나 요리도 좋지만 그 사람의 삶의 과정과 지난 추억의 한 단면이 오롯이 숨쉬는 음식도 가장 맛있는 요리 중 하나가 아닐런지요. 그렇게 맛과 추억까지 함께 먹으며 몸이 살찌고, 마음이 살찌고, 삶의 결이 풍부해지는 것이겠지요.
#버터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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