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공포의 '줄빠따'...난 고문관이었다"

[기사 공모-병영 구타의 추억] "군대 꼭 가고 싶습니다"가 만든 비극

등록 2011.08.11 12:03수정 2011.08.1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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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군 길상면 해병대 2사단 해안초소에서 7월 4일 오전 김아무개 상병이 동료들을 향해 조준 사격을 해 4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김아무개 상병 포함)하는 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다른 부대에서 지원나온 군인들이 무장한 채 트럭에서 내리고 있다.
강화군 길상면 해병대 2사단 해안초소에서 7월 4일 오전 김아무개 상병이 동료들을 향해 조준 사격을 해 4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김아무개 상병 포함)하는 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다른 부대에서 지원나온 군인들이 무장한 채 트럭에서 내리고 있다.권우성

1982년 10월 말 현역입영대상자로 조국의 부름을 받고 입대하자마자 나는 바로 집에 되돌아갈 뻔 했다. 논산훈련소에서 다시 신체검사를 받는 동안 안과 항목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지독한 근시 때문이었다. 고학력 사회가 되면서 안경을 쓴 병사들이 흔했지만 지독하게 나쁜 시력을 가진 장정은 엄격하게 걸러내 현역병 부적격자로 분류했다. 결국 나는 재신검을 통과하지 못한 다른 장정들과 함께 귀향조치가 내려질 때까지 대기해야만 했다. 

물론 내가 본적지에서 받았던 첫 신체검사 결과도 썩 좋지 않았다. 2급 을종을 받았음에도 현역입영대상자로 분류됐다. 대학 재학생의 신분이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 것이다. 재신검에 불합격한 동료들은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산뜻하게 군복으로 갈아입고 교육연대로 넘어가는 장정들이 더 부러웠다. 입대하기 전에 이미 예상했던 일로서 나는 각오한 바가 있었다. 한번 입대한 이상 만기제대하고 돌아가겠다고 내 자신에게 맹세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결코 사나흘 만에 귀향하지 않겠노라고 공공연히 떠벌리며 송별인사를 했었다.

나는 며칠 동안 노역에 동원되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귀향열차를 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뿐이었다. 그것은 남자로서의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고, 그밖에 알량한 애국심을 내세울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우선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사립대학 학생으로서 부모님께 잠깐 무거운 짐을 벗겨 드리고 싶었다. 지난 3년간 매학기 빚을 내어 등록해야 할 정도로 우리는 가난했다. 둘째는 실패만 거듭하고 있는 소설가 지망생으로서 바닥나버린 소재를 얻기 위한 새로운 경험이 필요했다. 마지막 한 가지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곧잘 지적받곤 하는 느린 동작과 구부정한 자세도 엄격한 훈련을 통해 교정하고 싶었다. 이래저래 나에게 군대는 훌륭한 도피처였다.

훈련소에서 '귀향조치' 기다리던 나... "군대 꼭 보내주십시오"

나는 사나흘 후 조용한 시간을 택해 안과 담당군의관을 찾아갔다. 군대생활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군의관은 나의 두꺼운 안경알부터 보고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나는 안경을 낀 상태에서 뭐든지 잘 볼 수 있다며 그를 설득했다. 군의관은 나의 눈을 기계로 정밀검사한 후 여전히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계속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안경 끼면 뭐든 잘 볼 수 있어 군대생활 잘 할 수 있습니다. 군대 꼭 좀 보내주십시오!"


그가 마지못해 나에게 세 번 이렇게 반복해서 물었다.

"너 정말 군대 가고 싶나?"
"네, 정말 가고 싶습니다. 보내주십시오!"


나 역시 세 번 똑같이 반복해서 큰 소리로 복창했다. 결국 그는 나의 진심을 확인하고 보라색 고무인과 자신의 도장을 몇 군데 찍어 나에게 필요한 서류를 넘겨줬다.

"너, 군대생활 잘 해!"

그가 마지막으로 나를 향해 걱정스럽게 한 마디 던졌다. 나는 자신있게 대답하고 물러나왔다. 나머지 과정도 모두 통과했다. 마침내 풀빛 제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나는 '진짜 사나이'를 부르며 어설프게 열을 지어 행군하는 대열에 끼어들었다.

5주 과정의 신병교육을 잘 마치고 나는 강원도 민통선 산악지역의 포병부대로 보내졌다. 선임병들은 나의 두꺼운 안경알부터 보고 놀라며 어떻게 그런 시력으로 군대에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논산훈련소에서 재신검을 받는 과정에서 결격사유가 생겼던 일과 다시 안과 군의관을 설득해 도장을 받아내고 이등병이 되어 자대까지 온 사연을 고백했다. 게다가 알량한 애국심을 내세워 현역병으로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싶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고참병들은 하나같이 웃으며 조롱했다.

"나 같으면 얼씨구나, 하고 집에 돌아갔을 거야. 군대생활이 2박 3일도 아니고, 3년을 X뺑이 쳐야 하는데, 그렇게 나쁜 눈으로 애로사항 많겠다. 게다가 동작도 되게 뜬 놈이…, 서글프다, 서글퍼."

그들은 나에게 그렇게 좋은 기회를 박차고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며 탄식할 뿐이었다. 아무도 나를 격려하거나 칭찬하려고 하지 않았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심'도 비웃음거리에 불과했다. 'X같은 군대', 할 수만 있으면 빠지고 싶은데 대한민국 남자로 건강하게 태어난 죄 때문에 여기 와서 X뺑이 치고 있다는 것이 대부분의 병사들이 인식하는 군대요, 국방의 의무였다. 그들은 신체적 결함이 있거나 학력이 부족해 오히려 현역병 징집을 면하고 방위병으로 단기복무하거나 아예 병역면제를 받은 이들이 부러운 것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일부 특권층에서는 자녀들을 교묘하게 신체검사에 불합격시키거나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군대에 보내지 않아 종종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현역병을 면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거부하는 군의관을 설득시켜 '지옥' 같은 곳에 자원해 왔으니 그들로서는 딱하기도 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별종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동정도 칭찬도 받을 수 없는 군대라는 엄연한 현실에서 완벽한 '또라이'나 '고문관'으로 취급받았다.

남의 관물도 못 훔치던 고문관... 매일 밤 이어지는 '줄빠따'

1982년 12월 초에 자대에 왔는데, 강원도 산악지방 특유의 강추위가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콧물이 흘러내리다가 금세 얼어버려 코 끝에 고드름이 생길 정도였다. 더욱이 안경을 낀 병사들은 바깥에서 실내로 들어갈 때마다 렌즈에 생기는 성에 때문에 앞을 분간할 수 없어 불편을 겪어야 했다. 나는 잠깐 헤매며 급히 렌즈를 닦아서 끼고 앞을 확인하고는 했다.

이렇게 나쁜 시력에 행동도 민첩하지 못한 얼치기 애국자에게는 또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관물을 잃어버렸을 때 그것을 찾아 채우지 못하는 것이었다. 병영에서 잃어버린 자기 관물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로서 사실은 남의 것을 훔쳐서라도 채워야만 했다. 그런데,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도둑질을 할 수가 없었다.

선임병들은 군대에서 남의 관물에 손을 대는 것은 도둑질이 아니라 '위치이동'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유독 나의 관물은 잘 없어졌다. 훔칠 줄 모르는 탓에 나는 채우지 못했고, 그런 행실을 봐주는 법이 없어 곧잘 지적 받고 얼차려를 받기 일쑤였다. 심지어 같은 포반(분대)의 고참병이 관물을 잃어버려도 졸병이 수단껏 채워줘야만 했다. 그런데, 자기 관물은커녕 고참병의 것도 챙겨줄 줄을 모르니 나는 고문관 신세를 면할 길이 없었다. 

밤마다 닥치는 점호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관물조사라도 하다가 뭐 하나 부족한 것이 드러나면 나만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포반 전체가 같이 당했다. 당직사관으로부터 졸병 군기를 제대로 못 잡는다고 질책을 받은 고참병들은 점호가 끝난 후 세면장으로 나를 불러내 구타를 하거나 가혹하게 기합을 줬다.

그 당시 구타는 군기교육을 위해 당연한 군대문화로 정착돼 있었다. 선임병들은 거의 매일 밤 졸병들을 포상으로 불러내 매질을 했다. 100명 쯤 되는 포대 내에서 계급별로 매타작하는 이른바 '줄빠따'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병장들이 상등병들을 때리고, 상등병들은 다시 일등병들을, 일등병들은 이등병들을 집합시켜 때리는 식으로 위에서부터 차례로 내려가면서 바로 아래 계급을 단체로 때리는 구타였다.

보통 1개 포대에 구경 155㎜ 곡사포가 6문씩 방열돼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후미진 곳에 있는 1포반이나 6포반 포상이 주로 구타가 이뤄지는 은밀한 집합장소였다. 주로 사용되는 매는 길이 1m 정도 되는 쇠파이프 같은 '작기봉'이었다. 작기봉은 가정용 수도관 정도의 굵기로, 대포를 방열할 때 유압장치가 된 곳에 끼워서 펌프질 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작기봉으로 엄청난 무게의 무기를 두 개의 포 바퀴 대신 톱니형태의 중심축에 힘을 받게 하여 땅바닥에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고참병들은 그 쇠막대기로 종아리를 때리기도 하고 때로는 소화기관이 있는 배를 때리기도 했다. 하필 배를 때리는 이유는 맞은 흔적이 잘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 종아리는 시퍼렇게 맞은 자국이 남아 간혹 구타로 문제가 생길 때는 난처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배를 맞는 것이 더 가혹하게 느껴졌다. 어떤 병사는 배를 몇 대 맞다가 소화도 되지 않은 음식물을 몽땅 게워내기도 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차라리 엉덩이나 종아리를 때려 달라고 엎드려 뻗치곤 했다.

고참의 갑작스런 이단옆차기에 실신... 후회했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군대 내 인권 문제를 다룬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군대 내 인권 문제를 다룬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에이앤디픽쳐스

한번은 집합을 당해 훈계를 듣는 자리에서 한 고참병이 갑자기 이단옆차기로 나의 배를 힘껏 차며 쓰러뜨렸다. 나는 잠깐 숨이 멎는 것 같았고 의식마저 가물거렸다. 다행히 넘어갈 듯한 숨이 겨우 돌아왔고, 곧바로 의식도 살아났다. 나는 가까스로 일어서면서 사람이 이렇게 급소를 맞고 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병사는 고참병에게 잘못 맞아 성기능 장애가 생긴 것 같다며 늘 어두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는 불만을 제기하기 어려웠다. 가해자나 국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기껏 간부들이 포병이었던 그 병사를 1년 남짓 남은 기간 취사병으로 보직을 바꿔 근무하도록 배려해줬을 뿐이었다.   

나는 이렇게 구타가 심한 병영에서 내가 애초에 가졌던 신앙이나 신념에 따라 군대생활을 해나가기가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지 새삼 깨닫고 뒤늦게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번 선택한 이상 되돌릴 수 없었다. 만기제대할 때까지 병영생활을 해야만 했다.

나는 곧장 헛된 망상을 버리고 최선을 다해 군대생활을 끝까지 하기로 했다. 여전히 얻어터지면서도 몇 가지 결심을 했다. 내가 고참병이 되면 부하들을 무자비하게 때리거나 가혹하게 다루지 말자고…. 또한 남녀의 성기나 성관계를 비하시켜 쓰는 욕설이나 은어도 배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비록 고문관 노릇을 하더라도 나는 이런 원칙을 철저히 지키기로 했다.

짬밥을 먹으면서 군대생활은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러나 나는 졸병들을 가혹하게 다룰 줄 몰랐다. 상병이 되고 병장이 된 후에도 나는 부하들을 인간적으로 대하려고 노력했다. 훈련을 나가든 작업을 나가든 나를 선임병으로 만난 부하들은 여간 행운이 아니었다. 너무 인간적으로 대하다보니 게으름을 피우거나 나태한 모습을 보이는 병사도 있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물리적인 기합을 주는 대신 말로 훈계할 뿐이었다. 그래서 실적이 나빠지면 내가 간부나 고참병한테 질책을 받거나 매를 맞았다.

그런 식으로 일관했던 나는 병장이 되어서도 장교나 하사관한테 곧잘 얻어터졌다. 심지어 나는 이런 소리도 들었다. 졸병들 군기 다 뺀다고…. 그래도 나는 나 혼자 당하더라도 졸병들을 괴롭히는 방식으로 군기를 잡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하고 같이 있는 순간 만큼은 졸병들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간혹 '소원수리'라는 것을 쓸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간부나 고참병들이 지레 협박하니 모든 병사들이 백지로 낼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 불만이나 애로사항을 썼다간 무서운 보복으로 돌아왔다. 만일 고참병들의 구타를 고발하는 불만사항을 적은 쪽지가 한 장이라도 나오면 당장 그날 밤부터 포대 전체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소원수리라는 허울 좋은 말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다. 폭력화된 집단은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시켜도 100% 불만이 없게 구성원들을 강요하며 철저히 폭력으로 다스렸다. 이것이 군사정권시절 내가 겪은 군대였다.

덧붙이는 글 | '병영 구타의 추억' 응모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병영 구타의 추억' 응모 글입니다.
#소원수리 #군기교육 #포병 #현역입영 #허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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