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공항서 가장 위험한 건 '면세 쇼핑백'

[필리핀에서 현지인처럼 살기①] '김치 귀신'이 돼버린 필리핀 사람들

등록 2011.08.18 10:38수정 2011.08.18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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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휴가도 '친정'이 있는 필리핀으로 갑니다. 필리핀에서 시집온 다문화가정 며느리 이야기가 아닙니다. 식구들이 10년 전부터 필리핀 '일로일로'라는 도시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가족에게 필리핀은 '눈부시게 하얀 모래해변의 휴양지'가 아닌 그저 편안한 '친정집'입니다.

일로일로는 7000개가 넘는 필리핀 섬 중에서 여섯 번째로 큰 파나이 섬(Panay)의 중심지입니다. 한국에서는 '보라카이 갈 때 비행기가 내리는 큰 섬'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쉬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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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이섬의 북쪽 끝에 보라카이 섬으로 가는 항구, 까띠끌란이 있습니다. 일로일로는 파나이 섬 남쪽 끝에 있습니다. ⓒ 조수영


일로일로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어학원도 많고 자동차 관련이나 옷가게, 식당 등 우리 가족처럼 사업상 오신 분들도 많아서 2000명 정도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오가는 학생을 더하면 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때문에 마닐라-일로일로 간 국내선 비행기에서는 한국인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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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로 시내. 매연이 심한 도시입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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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일로 시내 ⓒ 조수영


일로일로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마닐라로 가서 국내선을 이용해서 파나이 섬으로 가야 합니다. 인천공항에서 마닐라로 떠나는 비행기에는 개성이 드러나는 여행용 가방을 들고 선글라스를 쓰고 '공항패션'을 뽐내는 여행객들이 많이 탑니다. 하지만 필리핀 친정으로 가는 나의 가방은 시커먼 이민가방에 '친정엄마가 주문하신' 고춧가루만 가득 들어있을 뿐입니다.

필리핀 사람들에게 김치는 반찬이 아니라 요리

한국 사람이 필리핀에 가서 산다고 해서 김치, 된장 등 한국 식품을 안 먹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필리핀에 정착할 무렵에는 한국을 오갈 때마다 고추장, 된장, 마른 오징어, 심지어 한국라면까지 사 날랐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품목이 간단해졌습니다. 된장이나 고추장은 한국식품점(일로일로에만도 두 곳이나 됩니다)에서 업소용 대용량을 주문하면 한국에서와 비슷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원래는 비벼먹는 필리핀 라면에 물을 붓고, 고춧가루 확 뿌리고, 거의 꼴뚜기 수준의 필리핀 오징어와 파를 넣고 끓이면 나름 맛있는 짬뽕이 됩니다. 단무지처럼 길쭉하게 생긴 필리핀 무와 반드시 씨를 버려야 먹을 수 있는 필리핀 오이까지 현지 재료로 거의 모든 한국 음식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평균 20~30% 비싼 한국 식품점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고춧가루입니다. 그렇다고 한국의 태양초 고춧가루의 맛을 중국산(필리핀 시장도 이미 중국산이 점령했습니다)이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김치도 담그고, 우리 입맛에 맞는 매콤한 반찬을 만들려면 한국서 공수해온 고춧가루가 생필품 1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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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슈퍼에서 한국식품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단 평균 20% 비쌉니다. 품목에 따라 2배 비싼 것도 있습니다. ⓒ 조수영


필리핀에서 친구를 사귀는 데 김치만한 음식이 없습니다. 필리핀 사람들에겐 김치가 반찬이 아니라 한국요리입니다. 우리가 아는 필리핀 사람들, 좋게 말하면 '김치 마니아', 과장되게 표현한다면 '김치 귀신들'입니다.

옆집에 사는 변호사 보브네 식구들, 가끔씩 초대해서 식사를 하면 맨입으로 김치 두 서너 접시를 뚝딱 해치웁니다. 자동차 정비 사장인 앤드류도 김치 한 통이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엔진 오일도 공짜로 갈아 줍니다. 일로일로에서 혼자 사는 한국 총각들(괜찮은 사람들 많습니다)에게 김치를 챙겨주시는 어머니는 완전 '킹왕짱'입니다. "어머님, 어머님. 최고"하면서 하트가 뿅뿅 날아옵니다. 필리핀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김치를 좋아하는 것이 한국 사람으로서 기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한 번에 20㎏씩 담가도 한 달이면 바닥이 나는 탓에 어쨌든 고춧가루 공수는 힘든 일입니다.

항공기 제한 무게를 넘지 않기 위해서 집에서 체중계로 몇 번이나 무게를 쟀는지 모릅니다. 유가가 오르면서 항공사들이 제한 무게를 철저하게 검사해서 조금만 방심하다간 추가요금을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필리핀 국내선은 외국인은 물론이고 현지인까지 추가 1kg까지도 돈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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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중을 재고 발권을 받는 카운터입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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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색 티를 입은 항공사 직원들이 7KG 넘는 손님을 칼 같이 잡아냅니다. 외국인이든 현지인이든 예외가 없습니다. 조금 벗어난 트렁크 무게 때문에 걸린 이 여행객은 트렁크 속의 운동화로 갈아 신고서 합격입니다. 어차피 무게가 같은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뒤쪽에는 필리핀 언니들이 너무 살벌하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따지고, 싸우고, 못 들어가게 막고 장터가 따로 없습니다. ⓒ 조수영


필리핀 공항, 복불복에 도전하자

그동안 필리핀을 오가면서 일어난 사건들 이야기만 해도 얇은 잡지 한권은 될 것 같습니다. 출발시간이 넘어도 비행기가 준비되지 않아 한두 시간 기다리는 것은 보통이고, 대신 승객들이 일찍 도착하면 시간이 되지 않아도 출발합니다. 한 번은 마닐라를 떠나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가 30분이나 가다가 '비행기에 이상이 있으니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돌아가는 내내 비행기는 덜컹 거렸고, 내 심장은 이미 필리핀 열대우림에 추락해 버렸습니다.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뜻밖의 횡재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발권을 하는데 직원이 물어봅니다.

"일등석에 앉아서 가도 되겠어요?"
"(흥, 어디다 바가지를 씌울려구) 나 돈 없어요."
"추가 금액은 없어요. 예약을 많이 받아서 일반석이 만석이라 그래요."
"(갑자기 페이스 오프) 와우~ 완전 땡큐."

말로만 듣던 일등석, 일단 다리를 뻗고도 두 뼘은 남는 넓은 좌석에, 자리에 앉자마자 승무원들이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며 샴페인 한 잔과 따뜻한 물수건을 줍니다. 기내식은 그릇부터 다릅니다. 따끈한 도자기 그릇에 알록달록한 전채요리까지. 기내식 카트가 굴러오는 소리에 긴장하다가 비프든 치킨이든 어차피 비슷한 걸쭉한 소스를 뿌린 거지만 앞좌석에서 매진될까 간절히 기다리는 그런 초조함은 없습니다. 레스토랑에서나 볼 법한 두꺼운 도화지 메뉴판에서 우아하게 선택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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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준비하면 인천-마닐라 99,000원짜리 완전 저렴 항공권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 조수영


맨 앞자리에 앉으면 일일 승무원이 되기도 합니다.

"내 영어 알아듣겠어요?"
"아. 네."
"그럼 제가 하는 기내 방송 한국어로 통역해서 기내 방송을 좀 해주세요."
"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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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공항의 검색대 직원들 ⓒ 조수영


100달러를 내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필리핀 입국심사는 뭐 다른 나라와 비슷합니다. 여권을 주면 컴퓨터에 입력하고 옆 직원과 수다를 떨거나 핸드폰 문자를 보다가 본인이 맞나 얼굴 한 번 슥 훑어보고 도장 꽝 찍어주면 끝납니다. 문제는 세관 심사입니다.

"너 100달러 내."
"왜? 나 오버한 거 하나도 없는데?"
"너 그거 쇼핑한 거잖아. 가지고 들어가려면 100달러 내야 해."
"그런 게 어딨어? 세금을 내도 한국에 내지. 왜 여기서 내?"
"하여튼 100달러 내."
"야, 내가 산 화장품이 100달러인데 너한테 100달러 주라고?"
"그럼 50달러."
"그래. 그럼 나 이거 지금 안 가져가도 되니까 니가 가지고 있어. 내가 다시 한국 갈 때 그때 찾아갈게."
"난 그날 쉬는 날이야. 그렇다면 너는 스페셜하게 10달러만 내면 가지고 갈 수 있게 해줄게."

내 출국날짜도 모르면서 자기가 쉬는 날이랍니다. 결국 50페소(우리 돈으로 1200원 정도)에 합의를 봅니다. 이 녀석 1200원 벌려고 30분이 넘게 실랑이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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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쪽에 앉는 행운 ⓒ 조수영


한국인, 테러를 시도하다

국내선으로 갈아탈 때입니다. 가방이 검색대를 통과하는데 검색대 직원, 이 자식의 씩~ 웃는 표정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요즘 필리핀 공항에서 우산을 잡는다는 이야길 들었으면서도 한국을 출발할 때까지 주야장천 내린 비 때문에 접이식 우산을 수화물에 넣는다는 것을 깜빡 잊었던 겁니다. 

(이 녀석 한국어로 말합니다) "우산! 우산!"
"(또 한국인이 봉이군) 이거?"
"우산 안 돼! 이건 무기야."
"왜? 이게 총이니? 칼이니? 이 작은 우산으로 뭘 하겠니?
"우산은 위험해."
"긴 우산도 아니잖아. 국제선에선 괜찮았어."
"위험해."
"끝이 뾰족한 것만 안되는 거 아니었어?"
"아무튼 안 돼!"
"그럼 수화물루 부치고 올게."
"지금은 안 돼!"

이렇게 작정하고 덤빌 땐 2단계 작전입니다. 일단 강하게 말하고 그 자리를 벗어납니다.

"그래, 너 가져."

잠시 후 20페소(500원) 지폐를 움켜 쥐고 그 녀석에게 다시 갔습니다. 우산 주인을 다시 만난 녀석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내 우산을 살랑살랑 흔들어대며 반기는 모습을 보니 더욱 기가 막힙니다. 20페소를 받은 녀석은 이번에는 가방을 가리킵니다.

"(또 한국어로) 가방, 가방."
"왜? 또..."

우산을 가방에 넣어주더니 친절하게 지퍼까지 잠궈 줍니다.

"오케이, 오케이. 이젠 오케이.(생끗)"

내가 넣으면 비행기를 위협하는 테러 무기였던 우산도 직원이 가방에 넣어주면 괜찮은가 봅니다. 10년 넘게 필리핀을 내 집처럼 오가면서도 항상 신경 쓰이는 필리핀 공항입니다.

귀찮은 말싸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면세품목은 배낭이나 트렁크에 넣는 것이 좋습니다. 면세점 쇼핑봉투는 이놈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입니다. 듀티프리 '봉다리'는 버리고 다른 가방에 넣는 정도만으로도 그냥 통과입니다. 면세점 봉투 들고 있는 신혼부부로 보이는 사람들, 좀 화려하게 입은 사람들 다 잡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안되고 대화도 안 되는 최악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조건 깎아 달라고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돈이 없다고 하고 부르는 가격에 처음의 최소 80%이상 깎아서 합의 보는 것이 마지막으로 시도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어떨 때 그냥 나갈 수 있는 혜택을 받을 때는 좀 섭섭하기도 합니다.

'내가 좀 빈곤해 보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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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우리 동네 아이들입니다. 저희 가족은 필리핀 일로일로의 L.J.레디스마 라는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 조수영

덧붙이는 글 | '필리핀에서 현지인처럼 살기' 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우리 가족의 필리핀 정착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덧붙이는 글 '필리핀에서 현지인처럼 살기' 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우리 가족의 필리핀 정착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필리핀 #일로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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