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녀 음악회남편이 왕년에 기타 좀 쳤다는데 이제야 실력 확인 했습니다. 딸아이가 건반소리를 얹어주니 제법 음악회 느낌 납니다.
한진숙
그러고 보니 남편의 변화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동네에서 가수 활동을 하는 대학 동기의 공연을 몇 번 갔다 오더니 기타를 냉큼 샀습니다. '대학시절 기타로 여자들 여럿 홀렸다'는 거드름을 결혼 생활 내내 들었지만 이제야 그 실력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딸이 전자피아노 치고 남편이 기타를 퉁기니 음악이 됩니다. 귀도 즐겁지만 눈도 즐겁습니다. 아이와 아빠가 한 곳에 앉아 선율을 맞추는 그림... 행복한 가족 티가 팍팍 납니다.
# 소행주 아이들공동밥상이 펼쳐진 어느 날 저녁. 놀기 반 먹기 반 하던 아이들이 소란합니다.
"애들이 나 때려!"9살 오빠가 동생들이 때렸다며 울먹입니다. 꼬마들에게 주먹을 날릴 법도 한데 참고 와서 그저 일러바치기만 합니다.
"오빠가 먼저 놀렸어."7살, 5살 여동생들이 입 모아 소리 지릅니다.
"**아, 여자애들한테 '네 머리 모양 이상해' 그러면 상처받아."12살 언니가 사건의 전말을 알아차리고 중재에 나서는군요. 7살 여동생이 파마를 했는데 예쁘다고 말해주기는커녕 '이상해!'라고 딱 꼬집어 말한 게 화근이 되어 7살짜리는 찔끔찔끔 짜고 여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오빠에게 보복을 한 모양입니다.
"그래도 나도 아파. 말로 하면 되지, 왜 때려!"여동생들의 주먹이 제법 셌던지 오빠의 언성도 높습니다.
"알았어. (때린 거) 미안해 오빠."꼬마들도 오빠가 아팠다는 것을 이해한 모양입니다. 서로 마음을 조금씩 알아줬더니 다시 웃음을 찾습니다. 숟가락을 놓은 아이들은 1층 주차장에 자전거 타러 나가고 속도가 늦은 어린애들은 마음이 바빠 반찬도 없이 밥만 우걱우걱 입 속에 구겨 넣고 언니 오빠들을 따라나섭니다.
소행주 아이들은 19명이나 됩니다. 그 중에 학교 안 간 8살 이하 꼬맹이들만 9명이고 11월달에 6층에서 아가가 태어나면 10명이 됩니다. 여자아이들이 14명이고 남자아이들은 겨우 다섯인데다가 꼬맹이들 중 남자는 단 한 명입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놀이가 아무래도 여자애들 방식으로 흘러가는데 저녁 식사 후 1층에서 놀 때는 다소 시끄러운 편입니다. 여럿이다 보니 서로 사기충천해 목소리가 높아지나 봅니다.
"너희들이 동네 강아지들이냐? 왜 이리 시끄러워?"길 건너 앞집 아파트 사는 할머니 한 분이 호통을 치기도 했습니다. 재잘재잘 노는 소리가 어떤 이에게는 소음이구나 싶어 마음 한 쪽이 스산해지지만 같이 사는 동네니 아이들 노는 시간을 정했습니다. 이른바 1층 통금시간입니다.
우리 집 세 자매는 일단 놀이 맴버가 적지 않은 까닭에 집에서 저희끼리도 잘 놀았었습니다. 하지만 놀 시간이 많은 주말에는 여지없이 컴퓨터게임을 하고 싶어하고 세 명이 주르르 컴퓨터 앞을 지키고 앉아있는 적이 많았습니다. 못하게 막자면 애들을 데리고 나가야 하는데 게으름이 천성인 엄마와 복닥거리는 것이 힘든 아빠는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애들을 눌러 앉히게 되지요. 어쩔 수 없이 '컴퓨터 해라'고 허락할 수 밖에...
소행주에 사니 이 고민이 어느덧 해결되었습니다. 물놀이, 영화보기, 1층 사방치기, 자전거타기, 복도에서 소꿉놀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놀기... 놀 사람과 놀거리가 많다 보니 컴퓨터 찾는 시간이 급격히 줄었습니다. 텔레비전에 눈 박고 있는 시간도 확연히 줄었습니다. 놀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니 피드백 없는 컴퓨터와 텔레비전이 성에 찰 리 없으니까요. 주말엔 놀이에 팔려 식사도 거르기 일쑤인데 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간식을 얻어먹는 덕택에 배고파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집에 애들이 몰려올 때를 대비해 간식을 넉넉히 준비해 놓는 센스가 필요합니다.
# 소행주 멘토들주말마다 집들이가 이어지던 어느 날, 집들이 없는 세 집이 모여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포도주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와인 냉장고까지 마련하고 포도주 예찬론을 펼치는 앞집에 모여 포도주를 음미하였습니다. 어른들이 제대로 포도주에 빠지자니 심심해하는 꼬맹이들에게 어떤 꺼리를 줘야 할 상황입니다.
"너희들 목욕할래?""네에!"몇날 며칠 이어지는 지루한 장마 때문에 늘 땀에 절어있는 꼬맹이들이 목욕놀이를 마다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것도 여럿이 같이! 친형제가 아님에도 서로 원초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창피하지 않을 만큼 아이들 사이는 가깝습니다. 우리 집에 목욕탕이 있으니 아이들은 우리 집에서 목욕놀이 중이고 어른들은 앞집에서 포도주를 즐기는 중입니다. 두 집 현관문을 열어놓으면 우리 집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앞집까지 들리니 아이들 안전도 걱정할 거 없습니다.
포도주 얘기로 시작된 술자리는 소행주에 사는 이야기,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로 옮겨다닙니다. 소행주에 꼬맹이들이 많고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이들도 있기에 육아는 항상 중요 대화소재입니다.
"지랄 총량의 법칙 알아? 애들은 지랄할 만큼 해야 크게 되어 있다는 거지."박장대소가 터집니다. 아이들이 이미 스무 살이 넘은 앞집 선배 엄마의 말입니다. 아무 일 없을 것 같은 순둥이가 언제가 부모에게 크게 어필할 일을 저지르게 되고 자라는 동안 그렇지 않았다면 늙어서라도 그런 순간을 겪으면서 자신의 지랄양을 채운다고 합니다. 성장의 필수조건이라네요.
그러니 매사 툴툴거리고 사고치는 까칠이를 뒀다고 한탄할 거 없답니다. 끝없이 지랄할 것 같아도 어느 정도 임계치에 도달하면 순하고 고운 아들딸이 된답니다. 순둥이든 까칠이든 거칠 것은 거치게 되어 있고 그러면서 아이들은 큰다는 육아선배의 말씀을 들으면서 위안도 얻고 걱정도 되었습니다. 우리 집은 순둥이도 있고 까칠이도 있으니까요.
부모와 자녀 세대만 사는 핵가족이 일반화되면서 인생선배로서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조부모님의 자리가 없습니다. 소행주는 30대부터 50대까지 입주민들이 분포하다 보니 나이 드신 분에게 살아봐야 아는 지혜를 얻는 순간이 있습니다. 조부모님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멘토가 되는 거지요.
요리 멘토도 있습니다. 같이 식사하는 자리가 잦아지다 보니 집마다 요리 특징이 어느 정도 보이는데 들기름과 참기름을 적절히 사용하는 분에게 소스 배합 요리 팁을 살짝 배웁니다. 특히 오븐에 굽는 감자 요리는 놀라운 맛이었습니다. 감자를 살짝 삶아 올리브유와 소금, 버질을 살짝 버무려 오븐에 구워내는 요리입니다. 앞집 엄마의 작품이었는데 2층 씨실에 있는 공용 오븐이 있기에 가능하기도 했지요. 팁을 자세히 물어보고 나도 살짝 흉내냈더니 아이들이 너무 잘 먹어 자주합니다. 마침 제철 하지감자도 한 박스 사놓은 터라 올해 감자는 참 맛나게 먹는 중입니다.
12살 된 우리 집 큰 딸아이는 언젠가 앞집 언니들을 멘토로 삼을 것 같습니다. 동생 말고 언니가 필요하다고 외치던 우리 딸은 소행주에 언니들이 있어 좋답니다. 꼬맹이들이 우리 집에 놀러오면 열 번 중 여섯 번은 귀찮아하면서 언니들 방에 놀러갈 일이 생기면 좋다고 뛰어갑니다. 엄마가 채워주지 못하는 것을 앞집 언니들에게서 얻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아이들 같이 키우기, 다르게 키우기"몇 시에 갈 거예요?""10분 뒤 1층에서 만나."우리 아이들은 아침마다 인터폰으로 6층에 전화를 합니다. 우리 집 막내와 둘째 아이, 6층 아이가 같은 어린이집에 다녀서 아침엔 6층 엄마가 애들을 데려다 주고, 오후엔 내가 애들을 데려옵니다. 어쩌다 오후에 6층 엄마가 집을 비우는 날이면 저녁 전까지 내가 애들을 돌봐주고 나조차 일이 있어 나가봐야 할 때는 다른 층 엄마에게 우리 애들과 6층 아이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세 아이가 같이 등하원을 하다 보니 절로 친해졌는데 별일 아닌 일로 이상기류가 흐르기도 합니다. 언니가 6층 아이 편을 들 때 우리 막내는 언니의 배신이 서러워 울고, 막내가 6층 아이와 한 편이 되면 우리 둘째도 눈물을 참지 못합니다. 우리 집 자매끼리 똘똘 뭉치면 6층 아이가 서글퍼하는 모양입니다. 셋이라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시소게임인데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아침이 되면 세 아이는 또 나란히 어린이집에 갑니다.
어린이집에 다니지 않는 꼬맹이를 키우는 다른 층 엄마들은 세 집이서 품앗이를 한답니다. 하루에 4시간, 두 집 아이를 우리 집 아이랑 같이 돌봐주는 방식입니다. 한 명의 희생으로 두 엄마가 이틀 동안 4시간씩 자유를 만끽하는 거지요. 아기들도 옆집 엄마들을 낯설어 하지 않고 셋이 잘 놀아서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육아에 지친 엄마들에게 아이 없이 지내는 한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는 비슷한 연령대,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게 여러모로 좋을 듯합니다.
육아 방식을 서로 배우기도 합니다.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라도 엄마로서 배울 점이 보입니다. 생떼를 쓰는 아이를 오랜 시간 설득하고 기다리는 끈기를 보고 탄복하다가 우리 아이 세 번 야단칠 것을 두 번으로 슬며시 줄이기도 합니다. 내게 큰 소리 치지 않고 아이들을 휘어잡는 스킬을 물어보는 분도 있습니다. 집마다 육아 방식이 달라서 가끔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엄마는 왜 안된다고 해? ***이는 엄마가 놀아도 된다는데!"낮 동안 줄기차게 같이 놀고도 저녁 먹은 후 다시 시작된 놀이를 우리 집 아이는 멈출 수가 없답니다. 엄마는 그만 놀라고, 집에 올 시간이라고 하는데 다른 집 아이는 조금 더 놀도록 허락을 얻은 모양입니다. 가족이 모여서 쉬어야 할 시간임에도 남의 집에 늦게까지 있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하는 엄마와 좀 더 유연하게 생각하는 엄마와의 차이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지켜야 할 규율이 다른 집 아이들보다 좀 더 많은 편입니다.
"**이 엄마와 네 엄마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어. 틀리고 맞고 문제는 아니고, 집집마다 교육방식이 다른 거지. 네 엄마는 이런 엄마니까 네가 맘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네."불친절한 설명이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는 어이없어 하지만 그냥 밀고 나갑니다. 대단한 육아원칙은 아닙니다. 엄마가 일정한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면 아이는 나름대로 적응하고 그 안에서 융통성을 찾게 되리라 믿는 것뿐입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엄마가 되고 싶진 않으니 우리 집 아이들은 툴툴거릴 일이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부부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