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주동자 아냐?"...이게 서울대식 '평화'입니까

'평화롭게' 마무리됐다던 서울대 본관 점거농성...돌아온 건 '학생 징계'

등록 2011.08.19 11:41수정 2011.08.19 11:41
0
원고료로 응원
a

최갑수 서울대법인화반대 공동대책위원장(맨 오른쪽)을 비롯한 서울대민주화교수협의회, 서울대학교 공무원 노동조합, 전국대학노동조합 서울대학교지부 회원들이 5월 31일 오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대학본부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서울대 학생들의 비상총회 결정을 지지하며 법인화 추진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서울대학교 법인화 전면 재논의를 요구하며 학생들이 4주 동안 대학본부 점거 농성을 벌인 지 50일 정도가 흘렀습니다. 점거 해제를 논의하던 당시 학생들 사이의 이견이 있기도 했지만, 대학측의 입장을 존중하고 투쟁의 장을 새롭게 확장시키기 위해 점거 해제를 결의하였습니다. 6월 26일 마무리된 점거 농성은 본부 측의 표현을 따르자면 "길고 긴 마라톤 대화를 거쳐 평화롭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17일 대학 본부 측은 '점거 농성 주도 학생'이라는 딱지를 붙여 징계위원회를 열 것임을 천명하였습니다. 다음은 관계자를 통해 언론에 보도된 학교 측의 입장입니다.

"징계위 위원 9명 가운데는 학생들에 대해 제적이나 무기정학 등의 무거운 처벌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단순하게 가담한 학생들은 처벌하기 어렵지만 점거를 주도한 학생들의 중징계는 불가피하다."

"(퇴학이나 퇴교 조치 등) 좀 더 강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학생들의 미래를 생각해 무기정학 수준으로 결정이 모아지고 있다."

현재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것으로 알려진 이는 총학생회장 이지윤씨(23, 인류학과)와 부총학생회장 임두헌씨(23, 응용생물화학부), 총학생회 집행국 이한빛씨(22, 정치학과) 세 명입니다. 대학 측은 학사 업무 수행을 방해하거나 건물에 무단 침입한 학생을 징계할 수 있다는 학칙을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총학생회 측은 자신들의 징계방침을 관철시키는 요식행위에 불과한 징계위원회에 출석하지 않을 것임을 밝힌 상황이며, 오늘(19일) 오후에는 학교 측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입장 표명과 피켓팅 시위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a

대학 법인화에 반대하는 서울대 학생들이 5월 31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대학본부 건물에 위치한 총장실을 점거한 채, 다음주 예고된 기말고사를 준비하며 공부를 하고 있다. ⓒ 유성호


두 얼굴의 본부, '평화로운 타결'은 어디로 갔나?

공식적으로 점거 농성이 끝난 6월 26일과 그 닷새 뒤인 7월 1일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총장 명의의 공문이 서울대 학내 메일을 통해 구성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대학교 집행부는 국립대학법인화가 개교 이래 가장 큰 학교의 변화라는 사실을 보다 더 깊이 성찰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줄임) 특히 학생들의 의견수렴에 부족한 부분이 있었던 것은 서울대학교 집행부의 책임입니다. - '친애하는 서울대 가족 여러분께', 2011년 6월 26일

서울대학교 법인화를 둘러싼 논란과 학생회의 대학본부 점거농성을 거치면서 많이 염려하고 불안하셨을 줄 압니다. (줄임) 학생회는 집행부 교수님들과의 길고 긴 마라톤 대화를 거쳐 지난 6월 25일 평화롭게 점거농성을 풀었습니다. (줄임) 아무 불상사 없이 사태가 종식되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 '서울대학교 학생 여러분께', 2011년 7월 1일

대학 운영의 대표자인 총장 명의로 발송된 두 글을 읽으면서, 사실상 '법인화는 중단할 수 없다'는 본부 측의 의지를 확인하면서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대학 측이 한달 가까이 진행된 학생들의 투쟁 의지를 존중하고 의견 수렴이 부족했다는 책임을 일정 부분 인정한다는 의사를 드러냈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 위안은 잠깐이었습니다. 위원회를 열어 학생회 집행부를 징계하겠다는, 대학 본부 측 스스로 '평화롭게' 타결되었다는 학교 측과 학생 대표자 간의 약속을 깨는 행위로 말미암아 저의 위안도, 학생 사회의 불온한 평화도  곧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a

오연천 총장 명의로 발송된 전자우편 지난 7월 1일 '법인화 설명서'가 첨부된 전자우편이 학내 구성원들에게 발송되었다 ⓒ 서울대학교


우리는 학교의 감시대상도, 처벌대상도 아니다

지난 7월 18일, 학생과에서 제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전화를 건 쪽에서는 학생과라는 말만 했을 뿐 자신의 직책도,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로 다짜고짜 제 이름을 확인하고는 지금 좀 만나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으니 시간을 좀 내달라고 했습니다.

그 요청을 거절하고 할 말이 있으면 전화로 밝혀달라고 하자, 그 사람은 <경향신문> 7월 15일자에 실린 저의 인터뷰 내용을 거론하며 비상학생총회가 열렸던 5월 30일의 본부점거 과정에서 저의 '가담 정도'를 확인하는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명백한 사찰 행위였습니다.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라 그 자리에서 즉각 전화를 끊지 못하고 애매하게 답변을 피하느라 진땀을 흘렸던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속에서 불이 납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한 달 뒤인 오늘 징계위원회가 열립니다. 점거 농성이 잘 마무리되었고 학생들의 의견 수렴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는 학교 측의 발언이 무색하게, 학교 측은 여론이 잠잠해진 틈을 타 사찰 행위로도 모자라 자신들의 문제점을 지적한 학생들을 손수 징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필 총학생회 소속 3명이 징계위에 회부된 까닭을 "본관과 총장실 점거를 주동한" 책임이 크기 때문이라고 밝힌 대목에서는 코웃음이 날 뿐입니다. 설립준비위원회를 해체하고 법인화를 전면 재논의할 것과, 실력행사로서 본부 점거를 결의한 것은 그 3인이 아니라 5월 30일 광장에 모인 2천 명이 넘는 서울대 학우들이었습니다.

본부 측의 주장을 듣고 있으면 '니가 맨 앞에 서 있었으니까 주동자다'라고 몰아붙였던 독재 정권 시기의 막가파식 시위 탄압이 떠오릅니다. 정말로 주동자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면 저를 포함해 본부 점거를 결의한 모든 학우들을 징계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일방적인 법인화 추진을 멈추기 위해 학생들이 선택한 본관 점거라는 방법은 의견을 개진하고 반영시킬 제대로 된 창구조차 없는 학생들의 최후 수단이었습니다. 교직원과 학생, 학부모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중대한 사안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도, 의견 청취도 없는 법인화 추진에 항의하기 위해 정의감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학생들의 실력행사는 백번 정당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국가 중대사와 관련해 자신들의 의견 개진을 위한 수단으로 유생들이 일종의 동맹휴업을 벌이는 '권당(捲堂)'이 종종 일어났고 이에 대해 결코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기득권을 가지지 않은 학생들이 의견을 개진하기 위해 농성을 벌이는 것은, 더구나 그것이 '평화시위', '문화시위'였다는 점에서 대화와 의견 교환의 장을 만들어내는 생산적인 행위입니다.

무단 점거를 하고 업무를 방해했으니 징계를 하겠다는 대학 측의 억지논리에 한숨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서울대 본부 측의 전향적이고 민주적인 결정을 촉구합니다.
#서울대 #징계 #법인화 #오연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금반지 찾아준 사람이 뽑힐 줄이야, 500분의 1 기적
  2. 2 검찰의 돌변... 특수활동비가 아킬레스건인 이유
  3. 3 '윤석열 안방' 무너지나... 박근혜보다 안 좋은 징후
  4. 4 '조중동 논리' 읊어대던 민주당 의원들, 왜 반성 안 하나
  5. 5 "미국·일본에게 '호구' 된 윤 정부... 3년 진짜 길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