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때문에 그애 찬 남자, 곧 벌 받겠지요?

친구 딸아이가 2년 사귄 남자친구와 이별을 했답니다

등록 2011.08.22 11:07수정 2011.08.2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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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이 쉬어가는 명당자리입니다.  울타리 길입니다
어르신들이 쉬어가는 명당자리입니다. 울타리 길입니다 김관숙

우리동네 울타리 길은 오래된 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서 있어서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마사토가 깔려있습니다. 걷기운동을 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걷기운동을 하다 보면 종종 담배연기 냄새를 맡게 됩니다. 길섶을 따라 드문드문 놓인 긴 나무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담배 연기를 조금이라도 덜 맡으려고 빠른 걸음걸이로 그곳을 지나쳐 갑니다.

오늘 역시 담배연기 냄새를 맡게 되었습니다. 상현달 모양새로 조금 휘어진 길을 거지반 벗어날 즈음에, 저만치 있는 의자에 젊은 여자가 홀로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바람이 이쪽으로 불어오고 있어서 여기서부터 그 자리를 지나쳐 갈 때까지 담배연기를 계속 맡으면서 가야만 했습니다.

그 짧은 커트머리를 한 여자는 울타리 길을 등지고 맨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넓디 넓은 푸른 잔디밭을 바라보며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습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당당한 자세때문일까 그 모습이 한눈에도 아주 근사하고 아름답습니다. 빨간 립스틱을 짙게 발랐고 선글라스를 썼습니다. 핸드백 옆에 요구르트 정도가 담겼을 것 같은 작은 비닐봉지가 보입니다. 화면 속에 낯이 익은 탤런트가 튀어나온 것만 같은 호감적인 느낌때문인지 이상하게도 바람에 실려 오는 담배연기에 대한 거부감이 하나도 들지를 않습니다. 

그 자리는 명당자리입니다. 어르신들이 걷기운동을 하다가 쉬어가기도 하고 또 해거름에는 젊은 엄마들이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와 앉아서 퇴근하고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나도 친구와 수다를 떨고 싶을 때는 커피가 든 보온병을 가지고 나와서 더위를 피히기도 합니다.

공원에서 담배를 피던 그 여인이, 친구 딸이었을 줄이야


우리동네 울타리길은 한 바퀴를 도는데 내 걸음걸이로 30분이 걸립니다. 늘 두 바퀴를 돌고는 합니다. 이제 한 바퀴 반을 돌았으니 반 바퀴를 더 돌아야 합니다. 조금 더 걸어가자 길이 직선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자의 정 뒷모습을 보면서 지나쳐 가야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여자는 담배연기를 뻑뻑 뿜어대고 있었습니다. 여자의 모습을 가까이서 제대로 보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땀이 뒷목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면서 온 몸이 끈적거립니다. 빨리 걷기운동을 끝내고 나서 샤워를 하고 저녁준비를 해야 합니다. 저녁에는 남편이 좋아하는 얼갈이 배추나물을 만들어 먹을 생각입니다. 어제 파랗게 데쳐서 냉장고에 둔 것을 다시 한 번 찬물에 헹구어 숭숭 썰어서는 들기름 반스푼을 넣고 집된장 양념에 조물조물 무치기만 하면 됩니다. 요즘처럼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얼갈이 배추나물이 뚝 떨어진 입맛을 상큼하게 돋우어 줍니다.


천천히 마주 오던, 챙이 큰 모자를 깊이 쓴 이웃이 앞을 막고 섭니다. 민소매 부라우스에 샌들을 신은 것으로 보아 걷기운동을 하러 나온 모양새는 아닙니다.
  
"걷기운동 하나 보네. 혹시 오다가 우리딸 못봤어?"
"딸?"

그러자 이웃은 내 뒤쪽 멀리를 바라보다가 눈빛을 반짝하더니 내게 턱으로 방금 지나쳐 온 그 여자를 가리켰습니다. 짙은 화장을 한 바로 그 여자가 딸애라니,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언제나 윤기가 흐르는 긴머리에 화장을 했는지 안 했는지를 모를 정도로 맨 얼굴만 같아서 삼십을 넘긴 나이에도 청순해 보이기까지 하던 딸애가, 그 여자라니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일까 푸른 그늘 속에 그 여자는 아니 이웃의 딸애는 아까보다 더 근사해 보입니다. 나는 그제야 며칠 전에 점심 모임에서 이웃이 딸애가 결혼을 전제로 2년 동안이나 만나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한 말을 생각했습니다.

그때 모두들 '그럴 수도 있지 요즘은 그런 거 아무것도 아니라구'라며 가볍게들 넘어갔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를 해서인지 헤어진 이유를 물어보지들도 않았습니다.       

빵빵한 조건에 홀딱 넘어간 남자

"놀라기는, 저 정도로 스트레스 푸는 게 난 고맙다구."
"근데 회사도 저러구 출근해?"
"요즘 휴가잖아. 휴가 끝나면 다시 지 모습 찾겄지. 어때? 꼭 탤런트 같지?"

"엉, 몰라봤다구. 근데 왜 헤어진 거야?" 
"실은 그 눔이 우리딸을 찼다구. 사주가 안 맞는데나. 사주가 안 맞는다는 말처럼 무서운 말이 어딨어. 바로 헤어졌지. 근데, 헤어지고 나서 딸애가 그러더라, 사주가 안 맞는다는 말은 핑계래. 저 보다 더 좋은 조건을 갖춘 요즘말로 조건이 아주 빵빵한 여자가 나타났다는 거야. 빵빵한 조건 앞에 머리 팍 숙이는 남자인줄 모르고 2년씩이나 믿고 사랑하던 게 분하고 억울해서 죽겠다지 뭐야."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할지를 몰라하는데 이웃이 딸애가 있는 쪽을 힐긋보며 '이제 그만 딸애한테 가봐야 해' 하는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오늘 날씨 참 좋네, 바람도 있구말야."
"근데 저기서 모녀가 데이트 해?" 
"외출하고 돌아오다가 날 불러내지 뭐야. 하늘이 너무 푸르다고 잔디밭도 한창 예쁘고 바람도 좋고 그러니까 같이 땀도 식히고 그러자네. 그러는 거 보니까 어쩜 낼부턴 담배도 안 피고 립스틱도 짙게 안 바를 거 같아." 

이웃은 한시름을 놓았다는 듯이 환하게 웃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잔주름이 자글거리는 핼쑥한 눈매에서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동안 딸애의 립스틱 짙게 바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속으로 울었는데,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데, 얼마나 힘 들었는데...

깊은 상처는 딸애만이 받은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얼마나 분하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면 그 예쁘던 눈매가 저 지경이 되었을까. 문득 환청을 들었습니다. 그 옛날에, 동백기름을 곱게 바른 머리에 은비녀를 찔러 단정하게 쪽을 찐 외할머니의 노기어린 목소리가 내 귓가를 스쳐갔던 것입니다.

'필시 그 눔두 언젠가는 똑같이 당할 게야! 아주 똑같이! 아암!'
'할머니 똑같이라니요? 백 배, 천 배, 아니 만 배로 당해야지요!'

그러나 나는 지금 당장 그 남자가 벌을 받는 것도 아니란 생각에 속이 하나도 시원치가 않습니다. 더불어 요즘세상에 '그럴 수도 있지. 요즘은 그런 거 아무것도 아니라구' 하던 친구들의 말에도 공감이 갔습니다. 

담배연기에도 아픈 사연이 서려있을 수 있네요

저만치 잰걸음으로 짙은 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가는 이웃의 뒷모습이 가벼워 보입니다. 친구들의 말이 위안을 주기도 하였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늘이 푸르다고, 바람도 좋으니까 같이 땀을 식히자고 불러낸 딸애 전화가 큰 힘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나는 울타리길에 나와 앉아서 담배를 피는 사람들을 만나면 속으로 '유해성분이 많은 담배를 왜 피우는 것일까, 왜 지나는 사람들에게까지 해를 끼치나' 하면서 담배연기를 덜 맡기위해 재빨리 그들을 지나쳐 갈 생각만을 했습니다. 그들이 피워 올리는 담배연기들 중에는 아픈 사연이 어려있는 것도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더구나 이웃 딸애가 과감하게 변신을 하고 거기 앉아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담배를 뻑뻑 피우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나는 다시 매미소리가 한창인 푸른 울타리길을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놓습니다. 나도 뭔가 한시름을 놓은 기분이 듭니다. 아마도 며칠 후에는 화장을 했는지 안 했는지를 모를 정도로 맨 얼굴만 같아서 청순해 보이기까지 하던 이웃의 딸애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빵빵한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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