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작 기념탑호주군이 참전했던 전쟁의 전몰자를 기리기 위한 안작기념탑. 아시아 속 유럽섬이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자 절규처럼 다가온다.
오창학
나 역시 안작을 떠올리면 맬 깁슨이 한창 젊었을 때 출연한 <갈리폴리(1981)>란 영화의 끝장면이 생각나 마음이 무겁다. 육상선수를 꿈꾸던 청년이 죽음이 뻔한 돌격명령에 몸을 던지고 적탄에 맞아 숨지는 끝장면에서 오랫동안 멍했던 기억이 있다. 어이없는 영국 장군의 명령과 이에 따른 호주 젊은이들의 죽음.
이런 저런 생각에 탑돌이 하는 신도처럼 안작탑 주변을 서성이다보니 한국전 참전 내역도 눈에 띈다. 이렇다 할 설명 없이 'KOREA 1950-1953'이라 양각된 동판이 박혀있을 뿐이지만 가슴 한 쪽이 파이는 느낌이다. 계절마저 반대인 이 먼 나라에서까지 우리 아픈 역사를 복기해야 한다.
한국전 당시(1951.4.23) 로열오스트레일리안 연대 3대대가 남하하는 중공군 118사단의 포위에 맞서 가평군 죽둔리 504고지에서 끝까지 진지를 사수한 '가평전투'는 호주군의 역사에서나 한국전사에서도 중요한 사건이다. 밀리기만 하던 유엔군에게 반격의 시간을 벌어줄 수 있었고, 중공군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로 3대대의 부대명은 '가평대대'가 되었고 현재도 시드니 외곽의 주둔지에는 가평에서 가져온 바위가 상징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니 전몰자를 기념하는 안작탑에 한국전쟁의 기록이 빠질 수 없었을 게다.
전망 좋은 언덕에 세워진 작은 탑이라 치부해도 그만이지만, 안작탑은 인구도 얼마 되지 않는 아시아 속 유럽 섬나라 호주의 비애를 반영하는 것만 같다. 어둠 속에서 대하는 탑의 모습은 더욱 그렇다. 적은 인구로 스스로를 지키기에 역부족이었던 그들로서는 늘 자신을 지켜 줄 보호막이 필요했을 것이다.
때문에 영국이라는 보호막을 위해서는 1,2차 세계대전을 자신의 것인 양 끌어안아야 했고, 2차 대전 후 노쇠한 영국을 대신해 새 보호막으로 삼은 미국을 위해서는 한국전쟁과 월남전, 그리고 이라크, 아프카니스탄전까지 참전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살아남고자 하는 몸부림처럼 느껴져 애처로움이 더하다.
우리는 하나(all for one, one for all)새 날이 와도 짐을 꾸릴 필요가 없는 앨리스스프링스의 며칠은 달콤하다. 고립된, 그러나 모든 곳을 연결하는 아웃백의 심장에서 우리의 여정도 중반을 맞았다. 이전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이쯤에선 신체부작용을 경험하기 마련인데 이번에도 예외가 없다.
나는 이미 며칠 전부터 임플란트를 위해 걸어둔 교정와이어가 풀려 잇몸이 찢기고 있었다. 이곳을 벗어나면 아마 퍼스쯤에나 가야 치과가 있는 곳을 만나게 될 것이어서 열 일 제치고 치료부터 받았다. 교정와이어를 끊어내는 5분의 수고비로 20만 원을 뜯겼다. 집 나와선 절대 아프지 말아야 할 일임을 처절하게 통감한다. 경숙은 설사로 체력을 소진하고 있고 아내는 감기인지 머리가 아프고 다리가 시리다 한다.
▲일출을 볼수 있는 열기구 비행새벽에 시행하는 열기구 투어는 아웃백의 장엄한 일출과 지상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오창학
이런 상황은 열기구 투어 후 더욱 악화되었다. 돈을 내고 열기구를 펴고 접는 노역까지 치루고 맛보는 하늘은, 아니 지상의 광경은 황홀했다. 그러나 시드니와 30분 시차가 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일찍 나왔거니와 비행 준비를 하는 동안, 그리고 비행하는 내내 새벽추위에 떤 탓에 모두가 기운 저하를 맞았다.
특히 고소공포로 기구에 오르지 않고 지상에 남았던 최 감독의 상태는 더욱 심각하다. 남편의 심장부정맥이 도진 게 아닌가 하여 경숙은 여행을 중도 포기하는 상황까지 고려했다. 병원행을 거부한 최 감독이 포도주로 몸을 회복하기까지 아픈 당사자가 다른 아픈 사람을 서로 염려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나 아닌 누구에게 의지가 되고 고마웠던 순간이다.
▲왕립항공의료서비스(Royal Flying Doctor Service)앨리스스프링스 본부에 마련된 전시공간. 호주 아웃백 지역의 의료를 담당하는 시스템이다. 무선과 전화로 진료 상담을 진행하고 비행기를 이용해 환자를 후송한다. 앨리스스프링스 본부는 3대의 비행기로 반경 600Km를 담당한다.
오창학
그래서인지 앨리스스프링에서 들른 곳 중 왕립항공의료서비스(Royal Flying Doctor Service) 본부와 방송통신학교(School of the Air)가 인상 깊다. 아웃백지대의 반경 600Km를 담당하며 환자를 진료하고 후송하는 항공의료서비스는 비용 대 효과의 문제를 떠나서 단 한 사람까지 책임지겠다는 의지처럼 보인다.
또 왕립항공의료서비스의 무선 인프라를 활용해 아웃백 지대 아이들에게 무선통신교육을 실시해 왔던 방송통신학교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이제 호주, 혹은 아웃백만의 독특한 시스템으로 자리 잡은 두 시설은 '우리는 하나(all for one, one for all)'를 외치던 '삼총사'의 구호를 떠올리게 한다. 아무도 포기하지 않겠다며 개인는 팀을 염려하고 팀은 개인을 염려했던 우리의 모습처럼.
▲방송통신학교(School of the Air)아웃백에 흩어져 있는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무선통신과 인터넷 등을 활용하여 교육이 이루어진다. 영국 넓이의 10배에 해당하는 지역의 학생들 120여 명을 대상으로 방송 수업이 진행된다.
오창학
앨리스스프링스의 왕립항공의료서비스와 방송통신학교 |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Royal Flying Doctor Service) 1928년 호주 태생의 장로교 선교사 존 플린(John Flynn)이 설립한 왕립항공의료서비스는 그 당시 갓 태동한 퀸스랜드 & 노던 테리토리 항공(콴타스 항공의 전신)으로부터 임대한 항공기로 처음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앨리스스프링스 본부가 문을 연 것은 1939년부터다.
호주 전역에서 운영하는 50대의 비행기 중 앨리스스프링스 본부에서는 3대를 운영한다. 한반도의 몇 배에 달하는 면적을 비행기 3대로 담당하고는 있지만 대상 인구라야 3만 6천 명 가량에 불과하므로 무리한 일은 아니다. 질병 상담과 진료는 전화나 무선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항공기 후송 여부는 의사만 결정할 수 있다.
왕립항공의료서비스에 이용되는 기종은 필라투스 PC-12단발기로 최대 4명을 후송할 수 있는 의료장비를 포함해 대당 가격이 6백만 달러를 넘는다. 일반적 운영비는 정부가 부담하지만 항공기를 교체하거나 의료장비를 구입하는 등의 자본설비비는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하므로 모금과 RFDS 방문센터의 상품 판매이익금 등으로 충당한다.
이 서비스는 호주 의료보험이 가입된 국민에게만 무료여서 여행자보험조차 들지 않은 외국인은 치료도중 야반도주하는 일도 있다 한다. 그러나 왕립항공의료서비스는 아웃백 내의 거주자 뿐 아니라 여행자의 생존을 책임지는 든든한 구원자이다.
●앨리스스프링스 방송통신학교(Alice Springs School of the Air)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를 위한 광역 고주파 무선 체계를 확립하면서 그 통신망을 교육에 활용할 수 있도록 1951년 설립한 것이 앨리스스프링스 방송통신학교다. 이곳에선 영국의 10배 면적인 130만 ㎢m의 영역을 포괄하며 약 120명의 학생이 등록되어 있으니, 그들 표현처럼 '세상에서 가장 넓은 교실'인 셈이다. 예전엔 무선 통신을 통해 수업을 진행했으나 세월이 좋아진 만큼 지금은 인터넷 화상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외에 우편과 이메일, 전화, 팩스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일 년에 한 차례씩은 교사들이 직접 방문하기도 하고 세 차례 앨리스스프링스에서 학생들이 다 모이는 행사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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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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